[임정 수립 90주년―3·1운동에서 임시정부까지] 임시정부, 왜 상하이인가

조선일보
  • 김기철 기자
    입력 2009.04.01 02:54

    "교통 요지이고 비교적 안전"… 거주 한인 절반이 독립운동가

    "국내에는 한 조각의 땅도 확보할 곳이 없고, 국외로 말하자면, 중국의 동삼성(東三省)과 노령 시베리아가 우리 한인 교포들이 가장 번성한 지역이지만 현재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어 안전지대가 되지 못하며, 또 미국령의 각지는 본국과 거리가 너무 멀어서 역시 적합한 위치가 아니다. 오직 중국의 상해는 동양의 교통요지로서, 비록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다른 지역보다는 나은 곳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은 1920년 출간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들어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상하이에는 외국이 관할하는 조계(租界)가 있기 때문에 일본이 간섭할 수 없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이에 우리 독립단은 3월 하순에 대거 상해로 몰려들었다. 이광수는 도쿄에서, 선우혁·김철·서병호·현순·최창식은 본국에서, 여운형은 노령에서, 여운홍은 미국에서 모여들어 프랑스 조계지의 보창로(寶昌路)에 임시사무실을 설치하고…."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몰려든 독립운동가들의 실상을 기술한 박은식의 증언이다.

    《상해한인사회사: 1910~1945》를 쓴 쑨커즈(孫科志) 푸단(復旦)대 교수에 따르면, 1919년 말 경 상하이에 있던 한인은 남자 362명, 여자 326명으로 합계 688명이었다. 1910년 이전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인은 50명에 불과했고, 정치활동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에 비하면, 괄목상대할 만한 변화였다. 1920년대 초반 프랑스 조계 샤페이루(현재의 淮海路)를 중심으로 한인 거주지역이 형성됐다.

    1920년대 상하이 거주 한인들의 절반은 직업적 독립운동가들이었다. 나머지 한인들은 교사·공무원·회사원·노동자·선원 등으로 생계를 이었다. 한인들이 많이 일한 업종은 전차 검표원이었다. 영국·프랑스·중국 전차회사는 한인들이 책임감이 강하다며 앞다퉈 채용했다. 1923년 영국인 전차회사에 근무한 한인과 가족을 합치면 100여명이나 됐고, 1932년 영국인 버스회사에서 해고당한 한인이 130여명에 달했다는 통계도 있다.

    1920년 3·1운동 기념행사에 참여한 한인은 500명이었고, 1925년에는 400여명, 1928년에는 600~700명, 1930년에는 500명이었다. 이들 상하이 한인사회는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배후기지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그러나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이후 일본의 탄압을 피해 임시정부 요인과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를 빠져나가면서 한인사회의 성격은 바뀌었다. 일본 세력이 확대되면서, 친일(親日)적인 한인들이 대거 상하이로 진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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