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노백린과 임정의 비행학교 추진이 가능했던 배경 중 하나는 재미동포 사회에서도 공군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과 열기가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발명된 본고장에서 떠들썩한 비행기 관련 뉴스를 접해온 한인들은 미국도 참전한 1차 대전을 지켜보면서 공군의 위력을 절감하고 있었다.
특히 도산 안창호가 동포들을 상대로 펴낸 신한민보는 '공군이 필요하다'는 화두를 반복적으로 던졌다. 신한민보는 "공기선이 향후 정찰기나 폭격기로 크게 활용될 것"이라고 보도하거나(1909년 3월 10일), 1차 대전을 이용해 한민족이 장래를 모색할 것을 권하면서 비행기 사진을 함께 싣는다거나(1914년 1월 29일), '전쟁과학'난을 만들어 무기로서 비행기 소개 시리즈를 게재하는(1916년 9월 8일~10월 5일) 등 비행기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신한민보의 캠페인은 실제 한인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쳐 비행술을 배우려는 한인 청년들이 줄을 이었다. 1918년 육군항공대 소속으로 1차 대전에 참전해 전쟁영웅이 된 조지 리가 한국인 최초 파일럿으로 날아오른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조지 리 외에도 1918년 미군에 자원 입대해 비행기복역병이 된 이성창과 1919년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육군비행학교에서 훈련받은 최자남과 박낙선, 같은 해 펜실베이니아주 에싱턴(Essington) 비행학교를 졸업한 노정민 등 한인 청년들은 독립전쟁을 꿈꾸며 비행술을 배웠다.
최자남은 1919년 7월 육군비행학교에서 보낸 편지에서 "비행자 중에 부상이 있을 때는 두려움도 없지 아니하되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비행기에 올라 태평양에 높이 떠 쥐 같은 왜왕의 머리를 부술 예상을 느낄 때에는 대한공화국 만만세 소리가 절로 나온다"고 썼다. 노정민은 1919년 10월 "천강지손 반도민족은 국가의 치욕을 씻고 민국의국민된 자격과 직책을 하려면 비행술을 연구치 아니하고는 조국을 빛내며 후일에 공중전쟁을 시험하며 세계열강과 더불어 문명을 서로 다툴 수 없다 하나이다"는 내용의 광고를 신한민보에 내기까지 했다.
이들 외에도 당시 많은 한인 청년들이 미국 곳곳에서 비행술을 배우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20년 2월 5일 비행학교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노백린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동남쪽으로 약 42㎞ 떨어진 레드우드시티(Redwood City)에 있는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방문했을 때도 이용근·이용선·이초·장병훈·한장호·오림하 등 한인청년 최소 6명이 조종사가 되기 위해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이들 중 오림하를 제외한 5명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할 것을 맹세하며 1919년 5월 캘리포니아에서 결성된 청년혈성단 발기인들이다.
이성창·최자남·박낙선·노정민 등 비행학교 지원 줄이어
재미동포 재력도 또다른 동력… 독립자금 절반 제공
윌로스 비행학교 설립이 가능했던 또 다른 배경 중 하나는 당시 부쩍 성장한 재미동포 사회의 재력이다. 당시 재미동포 사회에는 쌀농사에 종사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거부(巨富)들이 포진해 있었다. 1912년부터 상업적 쌀농사를 시작한 캘리포니아는 세계대전이 터지며 유럽이 폐허로 변하자 쌀농사로 엄청난 부를 긁어 모았다. 캘리포니아 쌀농사의 메카가 바로 윌로스를 끼고 있는 대평원이다.
쌀농사를 통해 부자가 된 재미동포들의 경제력은 이 무렵 독립운동의 버팀목이었다. 1919년 재미동포의 독립자금 기부액 8만8000달러 가운데 49%에 달하는 4만2955달러가 캘리포니아 한인농장의 '곳간'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정휴 교수(포항공대)의 논문 '상해임시정부의 초기 재정운영과 차관교섭'(한국사학보 제29호)에 따르면 1919년 5월~1920년 12월 10일 임정 재정수입 13만1909달러(상하이 실버 달러 기준) 가운데 재미동포 기부금이 45%를 차지했다. 당시 임정 재무총장 이시영 명의로 감사장(1920년 10월 16일자)을 수여받은 재미동포 독립연금 최대 기부자 4명(김종림·임준기·신광희·김승길)이 모두 쌀농사로 부자가 된 인물들이었다. 특히 이 중 김종림은 최대 쌀부자로 '최초 재미동포 백만장자'였다.
그가 벌어들인 순익만 1918년 약 28만달러, 1919년 약 52만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윌로스 비행학교 설립을 위해 일시불로 2만달러를 내놓고 매달 3000달러씩 지원하기로 하는 등 비행학교 설립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당시 김종림은 레드우드비행학교에서 조종술을 배워 독립전쟁에 참가하려는 한장호의 교육비를 이미 지원해주고 있었다.
| 임정 비행장교 박희성·이용근 |
박희성 추락사고 후유증으로 단명… LA 일본인 묘지 틈에 묻혀
이용근 평양서 교사하다 1916년 미국행, 5년 만에 임정 장교로
박희성(朴熙成ㆍ1896~1937)과 이용근(李用根ㆍ1890~?)은 윌로스 비행학교 출신으로 1921년 7월 18일 임정에 의해 비행장교로 임명된 인물들이다.
박희성의 유족에 따르면 그는 1910년대 후반 연희전문(연세대학교의 전신)에 다닐 때 형 박희도가 "학교에 다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미국으로 가서 비행술을 배워 독립전쟁에 참가하라"고 권유해 학교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갔다. (박희도는 3·1 독립선언을 했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으나 일제말 변절을 이유로 반민특위에 체포됐다) 박희성은 1920년 2월 윌로스 비행학교가 개교하자마자 입교해 정몽룡, 조종익 등 다른 한인 생도 23명과 함께 비행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박희성은 1920년 말 김종림의 농원이 타격을 입으면서 비행학교가 기능을 못하게 되자 이듬해 1월 새크라멘토 소재 미국인 비행학교로 옮겨 훈련을 계속했다. 박희성의 소개로 이용근도 3월부터 이 학교에서 훈련을 계속했다. 박희성은 조종술이 매우 뛰어났던 것 같다. 새크라멘토 비행학교에서 학비를 면제해 줄 정도였고, 당시 신한민보도 "우리 비행학생 중에 가장 이름이 높은 박희성"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는 1921년 4월 10일 캘리포니아주 레드우드시티 비행장에서 조종사자격 시험을 치르다가 사고를 당했다. 신한민보는 "마지막 6000척(尺)을 오르는 시험을 치르다가 불행히 비행기가 흠이 나 300척 위에서 떨어졌는데 박씨가 탔던 비행기는 전부 파상되고 박씨는 30분 동안 기절하였다가 천행으로 생명을 보전하였는데 하체가 크게 상하여 의사의 수술을 받고 겨우 생명의 위험을 면하였더라"며 사고 정황을 전하고 있다. 당시 기체사고를 일으킨 비행기는 새크라멘토 비행학교 소속 백인 비행교관 소유였는데, 그가 박희성과 이용근 등 한인학생들의 애국심에 감동해 무료로 빌려준 것이었다.
하지만 박희성은 입원 3주도 못돼 퇴원해 5월 22일 새크라멘토 비행장에서 조종사자격증 시험을 다시 치르고 기어코 합격했다. 그는 1921년 7월7일 국제항공연맹(FIA)으로부터 조종사자격증을 받았다. 박희성이 다시 시험을 치르던 날 이용근도 시험을 치르고 합격해 역시 국제항공연맹으로부터 조종사자격증을 받았다. 이용근은 윌로스 비행학교 설립 이전 캘리포니아주 레드우드시티의 미국인 비행학교에서 한장호, 장병훈 등과 함께 비행술을 배우다 1920년 6월 17일 임정 비행학교로 옮겼다.
이용근은 1890년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나 숭실중학(1906~1911)과 평양 관립일어학교(1911~1912)를 마친 후 3년간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16년 미국으로 갔다. 그는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1~2년간 농장일을 하다 1917년 로스앤젤레스로 옮겼으며 이곳에서 흥사단에 가입해 흥사단 제80 단우가 됐다.
임정은 1921월 7월 14일 정례국무회의에서 박희성과 이용근을 비행장교로 임관시키고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포상금도 주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른 공식적인 임관명령은 이로부터 4일 후인 7월 18일에 있었다. 그러나 박희성은 추락사고 후유증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살다 독립전쟁에도 참가하지 못했고 1937년 41세의 나이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숨을 거뒀다. 현재 그가 영면해 있는 로스앤젤레스 도심 공동묘지는 일본인들이 애용하는 곳으로 변해 아키히토 일왕이 왕세자 시절 기념식수를 하기도 했다. 박희성은 바로 그 기념식수에서 몇 m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일본인들의 묘에 둘러싸인 채 잠들어 있다. 묘비명 'Son of Korea(한국의 아들)'와 태극문양만이 외롭게 그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