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한시(漢詩) 2편이 새로 발굴됐다. 세속적인 성공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갈 길을 걸어가겠다는 의지를 담은 내용이다.

노승석(盧承奭)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대우교수는 서울의 고서수집가가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한시와 충무공의 수결(手決·자필 서명)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이 사실을 공개했다. 이 문서는 칠언율시(七言律詩) 3편이 포함된 글을 26장의 한지 조각에 붓글씨로 이어 쓴 독특한 형식이다.

이 중 두 번째 시는 '빈궁과 영달은 오직 저 하늘에 달렸으니(窮通只在彼蒼天)/ 모든 일은 모름지기 자연에 맡기리라(萬事聊須任自然)/ 부귀함은 때가 있으나 홀로 차지하기 어려운 법(富貴有時難獨擅)/ 공명이란 임자가 없어 번갈아 서로 전하는 것이네(功名無主遞相傳)/ 마침내 멀리 갈 때는 천천히 걷고(終當遠到宜徐步)/처음에 먼저 오를 때는 넘어질 것을 염려하라(初若先登恐�W顚)/ 도성의 누런 티끌 속을 헤쳐 나아갈 길에(九陌黃塵前去路)/ 남의 뒤를 따라가되 (말을) 채찍질하지 말라(且隧人後莫加鞭)'고 돼 있다.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귀와 공명에 연연하지 말고 정진하되 지나치지는 말라는 교훈적인 내용이다. 또한 자신을 좀처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아쉬움을 딛고 '나는 나의 길을 걷겠다'는 고독함과 강직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세 번째 시에서는 '시골에 산다 해서 어찌 반드시 서울과 다르랴(居鄕何必異京華)/ 곳곳의 화평함이 제 집마다 있구나(隨處和平在自家)/ 만나는 곳엔 이제 마음의 불이 움직이는 것 같으니(所遇如今心火動)/ 그곳에선 귓전에 바람이 스치듯 하는 게 제일이지(其方莫若耳風過)/ 악을 제거하려면 반드시 풀을 버리듯이 하고(惡將除無非草去)/ 아름다움을 취해 보면 모두가 꽃이로세(好取看來摠是花)/ 옛 곡조 높고 출렁거리는 산수 밖에서(古調峨洋山水外)/ 창랑의 한 가락을 그대들을 위해 노래하네(滄浪一曲爲君歌)'라고 적었다.

'창랑'이란 중국 전국시대의 시인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나오는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신이 처한 세상의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하는 몸가짐에 대해 읊고 있다.

노 교수는 "첫 번째 시는 주색(酒色)을 경계하라는 내용인데 '동문선'에 나오는 이나(李那)의 시를 조금 변형한 것이지만 나머지 두 시는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아 창작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전체 글의 서두에 '이 열악한 종이에 내 손을 빌려서 글씨를 썼다.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젊은 아이들의 청을 저버릴 수 없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청년들의 요청을 받아 교훈적인 내용의 시를 써 준 것으로 보인다.

글 마지막에는 '비록 지금 붓 놀리기를 청하고자 하나 눈이 침침하고 손이 부드럽지 못하니 어찌하리오. 그러나 다시 노익장(老益壯)이라는 말을 얻고자 한다'고 적은 뒤에 '이순신'이라는 이름과 '일심(一心)'이라는 수결로 끝을 맺었다. 노 교수는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이순신 장군의 수결과 비교하면 심(心)자의 획 2개를 과장해서 쓴 등 동일한 수결이고, '불(不)' '차(此)' '소(所)' 같은 글자에서 장군 특유의 필체가 드러난다"며 "이순신 장군이 전쟁 직전 정읍현감 시절이나 전쟁 중에 쓴 글로 보인다"고 말했다.

노 교수는 이 문서의 원문과 번역문 전문(全文)을 '충무공 서첩 한시 3수'란 제목의 소책자로 간행할 계획이다. 이순신 연구가인 노 교수는 2004년 '난중일기'의 13만자(字)를 처음으로 데이터베이스화한 뒤 150여 글자를 바로잡은 '난중일기'의 첫 완역본을 냈고 지난해에는 현충사 소장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 중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32일치의 '난중일기'를 새로 찾아내 공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