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소설 안중근 불멸] [62]

    입력 : 2009.03.20 03:06

    제5장 아들의 한철

    내닫듯 여남은 발자국을 다가간 중근이 막 손을 뻗어 그 꽃을 꺾으려는데 갑자기 발밑이 허물어지며 그의 몸이 비탈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제야 중근은 그 비탈 끝에 곧 수십 길 벼랑이 이어진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얼른 손을 내뻗어 무언가 붙잡고 매달릴 만한 것을 찾았다. 몇 그루 가는 관목이 잡혔다가 뿌리째 뽑히면서 중근의 몸은 점점 벼랑가로 미끄러졌다.

    마침내 비탈이 끝나고 벼랑가에 이르렀다. 하지만 중근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두 손으로 휘젓듯 붙잡고 매달릴 만한 것을 찾았다. 그때 중근의 오른손에 무언가 굵직한 것이 잡혀 왔다. 남은 왼손을 그쪽으로 모아 쓸어 잡고 보니 벼랑 끝에 나 있던 주목 등걸이었다. 키는 작아도 오래 묵어 그걸 붙잡고 매달린 중근의 무게를 버틸 만했다. 중근이 겨우 정신을 가다듬어 내려다보니 발밑 수십 길 아래 거친 바위 골짜기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거기서 떨어지면 뼈는 으스러지고 몸도 갈가리 찢기어 사방에 흩어질 판이었다.
    "어이, 이보게들, 날 좀 올려주게."

    중근이 놀라고 당황한 가운데도 경망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위를 보고 그렇게 소리쳤다. 비탈의 관목들에 가로막혀 산꼭대기에 있는 벗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누군가 중근의 목소리를 펄쩍 놀라듯 받았다.

    "응칠이 자네, 떨어지지 않았네그려."

    중근이 떨어질 때 못 지른 비명을 대신하듯 그렇게 소리쳐 놓고 다시 감격 어린 목소리로 이었다.

    "기다리게. 곧 밧줄을 내려주겠네."
    일러스트=김지혁
    그런 다음 마침 거기까지 술통을 지고 따라온 일꾼의 지게꼬리에 도포 끈 대여섯 개를 꼬아 이어 중근이 매달린 벼랑가로 내려주었다. 중근이 그 밧줄을 잡고 몸을 다시 산꼭대기로 끌어올리면서 보니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는 벗들의 안색이 모두 흙빛이었다.

    "이보게, 자네 무엇 하러 그 낭떠러지로 뛰어들었는가?"

    온몸이 땀에 흠뻑 젖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상처 없이 중근이 산꼭대기로 돌아오자 허교(許交)하고 지내는 사이이기는 해도 나이가 중근보다 네 살이나 많은 안악 백 유학(幼學)이 나무라듯 물었다. 그때도 중근이 꺾으려 했던 꽃은 아직 벼랑 가까운 비탈에서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중근은 무심코 그 꽃을 가리키려다 말고 무안함을 감추는 웃음과 함께 둘러댔다.

    "태산에 올라 천하가 좁은 걸 알았다는 이도 있지 아니하오? 나도 거기 서서 우리 해서(海西) 땅이 좁은 것을 굽어보려 하다 그리됐소이다."

    꽃 한 송이에 목숨을 건 게 부끄러워 그리 말했으나 중근이 목숨까지 돌아보지 않고 다가가려 했던 것은 한 송이 꽃이 아니라 그것으로 표상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일로 중근이 드러내 보인 것은 경박이나 성급이 아니라, 지고(至高)한 가치를 향한 자기투척의 용의였으며, 죽음조차 잊게 하는 아름다움에의 탐닉과 몰입이었다.

    이름에 무거울 중(重)자를 넣어 경계했을 만큼 중근의 타고난 경박이나 성급함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그 가을에 있었던 총포 사고가 될 것이다. 그날도 중근은 마음 맞는 벗 예닐곱과 산으로 노루사냥을 갔는데, 들고 나간 총은 동학군 토벌 때 쓰던 영국제 양총(洋銃)이었다. 하지만 서두르다 그리됐는지 총 한 방 쏘아보기도 전에 총알이 총열 안에 끼어 빼낼 수도 들이밀 수도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사이에도 몰이꾼들의 함성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중근은 총열 안을 소제할 때 쓰는 쇠꼬챙이로 마구 총구를 쑤셔댔다. 그러다가 쇠꼬챙이가 막혀 더 들어가지 않자 손바닥으로 쇠꼬챙이 뒤를 힘껏 쳤다. 갑자기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총열 안에 박혀 있던 총알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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