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일본이 파헤친 동굴에… 평화를 세웠다

입력 2009.03.07 02:59 | 수정 2009.03.08 02:10

제주 '평화박물관' 세운 이영근 관장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 일본군은 패색이 완연했다. 필리핀과 사이판이 미군에게 점령당했고 장거리 폭격기 B-29가 매일 도쿄(東京) 하늘을 뒤덮었다. 일본군 수뇌부는 '최후의 방어 요새'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과연 어디에? 황해와 동 중국해 사이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섬. 중국·일본·오키나와를 잇는 요충지이자 중국 침략의 교두보가 됐던 섬. 제주도였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만들어 놓은‘제주 가마오름 동굴진지 / 평화박물관 제공
"얘들아, 우리 오늘은 땅굴에 한번 들어가 보자!"

1963년 어느 날, 제주도 한경면 고산리에 사는 열 살 소년 이영근은 어른들이 말렸던 '그 일'을 꼭 하기로 했다. 친구들과 함께 동네 얕은 산 가마오름에 일본군이 파 놨다는 '땅굴' 속에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끝없이 이어진 어두컴컴한 땅굴은 거미줄처럼 복잡했고 그들은 어느덧 자신들이 들어온 입구를 찾을 수 없게 됐다. 가득 들고 온 짚 풀이 다 타 버린 탓에 신고 있던 고무신을 벗어 불을 붙여야 했다. 그날 밤 소년의 손을 잡고 땅굴을 빠져 나온 사람은 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말했다. "거긴 곳곳에 함정이 있어. 한 번 빠지면 나오지 못해! 이 녀석아, 그 땅굴… 내가 팠다!"

농부였던 아버지 이성찬은 1943년 봄부터 가마오름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곡괭이와 삽만 가지고 하루 종일 굴을 팠다. 사람들이 군수품을 실은 마차를 산으로 끌고 갈 때면, 일본군은 채찍으로 말과 사람을 함께 후려치며 킬킬 웃어댔다. 환자가 생기면 치료를 해 준다고 데려갔는데 두 번 다시 그들을 볼 수 없었다. 일본이 항복하고 나서야 노역은 끝이 났다.

3남3녀 중 장남인 아들 이영근은 중학교만 나온 채 화물차 운전기사로 일해야 했다. 꿀을 배달하러 근처 야산들을 다닐 때 그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아니… 산이란 산마다 다 땅굴이 있잖아!" 아버지는 일흔살이 넘자 아들에게 평생 하고 싶었던 말을 털어놨다. "이걸 세상에 알려야 한다. 이런 역사를 묻혀두다 보면 또다시 그런 일이 되풀이될 수 있어…."

"미쳤다!" 2004년 초, 제주도에 새로운 박물관이 들어선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다. '땅굴'이 있는 가마오름 일대 1만2000평을 통째로 사들여 사립박물관으로 만들고, 땅굴을 일반인에게 개방하겠다고 한 사업자는 ㈜가마오름 대표 이영근이었다.

전세버스 몇 대를 운영하는 사람이 46억원을 들여, 그것도 절반은 빚을 내서 그런 걸 만들겠다고? "원형 훼손과 안전문제가 우려된다" "근대 문화유산에 대한 무분별한 개발로 사유화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거셌다.

하지만 박물관을 짓겠다고 결심한 1996년부터 8년 동안 '미쳤다'는 말을 숱하게 들어 온 이영근이었다. 뭍 사람들은 물론 제주도 사람들도 대부분 '땅굴'의 존재를 모르는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역사의 진실을 알릴 수 있을지 고심했다.

헛간에 쌓아 둔 잡동사니를 다 꺼냈고 이사철엔 남의 집 앞에서 쓰레기 더미를 뒤졌다. 그렇게 해서 당시 일본군의 군복과 각반·물통·탄약상자·수류탄·포차바퀴·측량기, 내무반에 걸어 놓았던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 휘호까지, 주변에 흩어진 당시의 유물을 모았다. 강제 노역을 당했던 노인 200여명으로부터 증언을 들어 60시간 분량을 녹화했다.

올 3월, 제주 한경면 청수리 '평화박물관'의 이영근(56) 관장이 박물관 건물 뒤편의 산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해발 143m의 기생화산인 가마오름은 산 전체가 일본군의 거대 지하요새나 다름없었다.

"출입구가 33개, 연결통로는 17개입니다. 모두 3층 구조, 4개 지구로 돼 있고요." 땅굴 입구로 들어가 보니 성인 두명이 지나갈 수 있는 터널이 있었다. 굴은 왼쪽으로 꺾어지고 다시 왼쪽, 오른쪽으로 굴절되며 미로와도 같이 이어져 있었다. 조명이 없었더라면 누구라도 길을 잃었을 것이다.

땅굴의 총길이는 무려 2㎞. 그중에서 15% 정도인 300m 구간을 복원해 개방한 것이다. 높이는 1m60㎝~2m, 너비는 1.5~3m로 웬만해선 걸어가며 고개를 숙이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이곳을 방문한 베트남 군 장성이 '우리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길 옆 곳곳에 넓게 뚫어 놓은 공간과 '사령관실' '물자보관소' 등의 푯말이 눈에 띄었다. 10평 남짓한 방은 '작전회의실'이었다. 굴을 파는 사람들과 회의하는 일본군처럼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마네킹도 보였다. "모두 증언을 바탕으로 복원한 겁니다."

땅굴 거의 모든 구간의 양쪽 측면과 천장에는 나무 판자가 촘촘히 붙여져 있었다. 천장은 지붕처럼 대 놓았기 때문에 동굴의 정면도는 오각형이 된다. "광복 직후에 주민들이 여기 들어와서 나무를 다 떼 갔어요. 박물관을 만들면서 삼나무로 일일이 다시 복원해 놓았죠." 건축가에게 의뢰했으나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은 탓에 직접 작업했다. 흙벽이 맨 살을 드러낸 곳에는 당시의 곡괭이 자국이 여전히 선명했다.

왜 이렇게 미로처럼 복잡한 구조로 땅굴 진지를 설계했을까? "공기 순환을 고려했을 것이고 적군을 유인하려는 전술적 이유도 있었겠지요." 미공개 지구에는 땅굴의 폭이 넓어졌다가 갑자기 좁아지는 곳이 있고, 깊이가 18m나 되는 함정도 있다는 것이다. 탱크 한 대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실측 평면도에는 벌집을 연상케 하는 요새의 구조가 드러나 있었다.

마치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기독교도의 지하묘지 카타콤(catacomb)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하자 이 관장은 "그런 말을 많이들 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건 묘지가 아니라 군사시설이다. 일본군은 왜 이런 시설을 여기에 만들었던 것일까?
제주도 평화박물관의 이영근 관장은“인류의 어리석음을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 이 땅굴을 복원했다”고 말했다. / 이종현 객원기자 grapher@chosun.com
일본은 1920년대부터 제주도에 대규모 군사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에는 대정읍에 '알뜨르 비행장'이 완공됐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이곳에서 출격한 전투기들이 중국 난징(南京)을 폭격했다.

본격적인 '제주도의 요새화'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이뤄졌다. 1945년 2월 9일 일본군 수뇌부는 연합군의 본토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결호(決號) 작전'을 수립했다. 이중 특히 강조된 '결 7호'는 제주도를 '옥쇄형(玉碎形) 요새기지'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연합군이 규슈(九州) 북부로 상륙해 도쿄로 진격하려면 반드시 제주도를 거쳐야 한다는 계산에서였다.

이에 따라 제주도에 58군사령부를 신설하고 일본 정규군 96사단·108여단과 만주 관동군의 111·121사단 등 7만5000명의 병력을 제주도에 집결시켰다. 당시 한반도 주둔 일본군 22만명의 3분의 1이 넘는 숫자였다.

성산 일출봉, 대정 송악산, 서귀포 삼매봉, 어승생악…. 368곳의 제주도 오름(산봉우리) 중에서 일본이 땅굴 진지를 판 것으로 확인된 곳은 무려 120곳이나 된다. 섬 전체가 전쟁을 위해 철저히 파헤쳐졌던 것이다.

이중 가장 큰 요새는 111사단 산하 243·244 보병연대가 주둔했던 가마오름 땅굴이다. 일본 나가노(長野)현의 마쓰시로(松代) 대본영(大本營) 다음으로 큰 규모의 요새로, '제주도 대본영'이었던 셈이다. 이영근 관장은 "만약 일본의 항복이 늦어졌더라면 제주도에서 큰 비극이 일어날 뻔 했다"고 말했다.

'제주 가마오름 일제(日帝) 동굴진지'는 2006년 문화재청에 의해 등록문화재 제308호가 됐다. 두 차례 안전진단도 받았다고 한다. 2008년 1년 동안만 33만명이 넘는 국내외 관람객이 박물관을 찾아 동굴과 전시 유물, 영상물을 관람했다.

지난해 9월 일본 마쓰시로 고등학교는 학생들의 수학여행지를 일부러 이곳으로 잡았다. 학생 대표 두명이 이 관장의 팔을 끌고 강당으로 갔다. 수많은 학생들이 고개를 숙인 채 꼼짝 않고 앉아 있었고, 흐느끼는 학생들도 있었다. "저희 조상들의 잘못을 사과드립니다. …앞으론 한국과 친구가 되도록 저희가 노력할게요."

아흔살쯤 된 일본 노인 한명이 박물관을 찾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는 이 관장에게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젊어 군대에 있을 때… 바로 여기에 배치됐었소. 그때 한국 분들에게 많은 죄를 졌어요." 그는 낡은 지갑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여행비의 전부인 듯한 만원짜리 세장을 빼냈다. "이렇게라도 사죄하고 싶으니, 당신 부친께 꼭 전해 주시오."

이 관장이 병석의 아버지에게 그걸 전하고 사연을 말하자 그는 짐작 가는 데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방이 될 때, 일본군은 군복을 벗어 던지고 민간인 옷을 입은 채 도망갔다. 그때 내가 사복을 구해 줬다." 아버지는 말했다. "시킨 사람이 나쁘지, 그들이 무슨 죄가 있겠느냐? 전쟁이 끝나니 그들도 울고 빌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

이 관장은 매일 새벽 4시45분과 밤 10시10분 골프장 셔틀버스 운전에 나선다. 부족한 박물관 운영비를 조금이나마 대기 위한 아르바이트다. 그는 가마오름 땅굴의 2㎞ 구간 전체에 대한 복원과 땅굴진지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앞으로의 과제라고 말했다. "전쟁의 비참함과 인류의 어리석음을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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