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89특집/1920년생들] 25세에 광복… 6·25와 4·19 겪고 50代에 한강의 기적 일궈

입력 2009.03.05 02:45 | 수정 2009.03.05 09:19

조선일보 창간과 함께 태어난 1920년생들은 스물다섯에 광복을 맞았다. 갓 서른을 넘겼을 때 6·25전쟁을 겪고 불혹에 4·19혁명을 지켜보고 50대에 '한강의 기적'을 지휘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정근식(52) 교수는 "1920년생들은 일제 말기에 청춘을 보내고 6·25와 4·19와 5·16을 내리 겪었다"며 "민족사의 고통을 에너지원 삼아 국가 건설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1920년생인 김용규(金龍奎) 전 국무총리실 행정실장, 김종락(金鍾珞) 대한야구협회 고문, 김태길(金泰吉) 서울대 명예교수, 언론인 문제안(文濟安)씨, 백선엽(白善燁) 전 육군참모총장, 산악인 전우순(全遇舜)씨, 한교석(韓喬石) 전 한양대 교수를 만났다(가나다 순).

산악인 전우순씨.

◆산악인 전우순씨
故 金추기경과 같은 날 징병

1944년 1월 20일, 일제의 학병(學兵) 동원령에 따라 조선 청년 4385명이 전쟁터로 떠났다. 경성역, 부산항 등 전국 곳곳에서 일본 군가가 울려 퍼졌다. 부모형제는 소매를 적시며 울었다. 이날 징병된 청년들 중 하나가 전우순씨였다. 김수환(1922~2009) 추기경·'사상계' 발행인 장준하(1918 ~1975)씨·현승종(90) 전 국무총리 등도 같은 날 일본 군복을 입었다.

일본 본토에 배치된 전씨는 1945년 8월 15일 거리에서 연합군의 공습을 받고 정신을 잃었다. 얼마 후 한 일본인이 전씨를 흔들어 깨우며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했다"고 알려줬다. 다음날 일본 신문 1면에 백의(白衣)를 입고 태극기를 든 한국인들의 사진이 실렸다. 전씨는 "눈물이 쏟아져 글자를 읽을 수 없었다"고 했다.

◆영문학자 한교석 교수
계초 장학금으로 경성제대 마쳐

한교석(당시 25~28세) 전 한양대 교수는 "해방 직후는 햄릿의 대사처럼 생의 매순간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인 시대였다"고 했다. 함경남도 함주 출신인 한 교수는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계초 방응모(方應謨) 선생이 주는 장학금으로 경성제대 영문과를 마쳤다.

그는 1945년 10월 반공(反共) 혐의로 공산주의자들에게 체포돼 1년간 구(舊)소련의 우수리스크와 평양 등에서 수형생활을 했다. 한 전 교수는 "하루 한 덩이의 딱딱한 빵으로 목숨을 부지하며 절망과 싸웠다"고 했다.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쏘아라

1920년생들에게 6·25전쟁은 '인생 최대의 사건'이었다. 북한군이 남침했을 때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은 육군 제1사단장이었다.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다부동(경북 칠곡)을 지키라는 임무를 맡았다.

다부동 전투 중에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고 알렸다. 백 전 총장이 나가보니 정말 국군이 후퇴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이틀을 굶은 상태였다. 백 전 총장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

백 전 총장은 "6·25를 모르는 젊은 세대를 무조건 원망할 수는 없지만, 그때 싸운 분들 덕분에 이 나라가 있다는 점은 기억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김태길 서울대 명예교수
거제 수용소 2년 포로생활

김태길 서울대 명예교수는 전선(戰線)의 반대편에 있었다. 이화여대 전임강사였던 그는 1950년 6월 25일 세브란스 의대(현 연세대 의대) 교정에서 동료들과 배구를 하다 북한군 남침 소식을 들었다. 김 교수는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강요로 의용군에 들어갔다. 유엔군 참전 소식을 듣고 후퇴하던 중 의용군 인솔자가 "남한 출신은 고향으로 가도 좋다"고 했다. 김태길 교수는 고향으로 돌아오다 국군에게 붙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2년을 보내고 1953년 석방됐다. 김 교수는 "전쟁은 모두에게 고통이었다"고 했다.

◆김용규 전 총리실 행정실장
조선일보 통해 대사건 접해

1970년 김용규 국무총리실 행정실장은 수출 담당 공무원들을 이끌고 28개국을 돌았다. 가는 곳마다 한국 상사 주재원들이 단기 필마로 분투하고 있었다.

"세계가 한국을 모르던 시절 그들은 '메이드인코리아' 제품을 들고 무작정 해외 시장 문을 두드렸어요. 달러가 없어서 외교관도 마음대로 못 나가던 시절이에요. 출장비가 모자라면 사비를 털어 보탰지요."

그런 노력 덕분에 자고 나면 건물이 서고 도로가 뚫렸다. 조선소와 제철소, 방직공장과 전자회사가 신제품을 쏟아냈다. 국민들은 매일 새벽 집 앞에 툭 떨어지는 신문을 보고 어제와 다른 오늘을 확인했다. 언론인 문제안씨는 "조선일보를 통해 경부고속도로 개통, 포항제철소 건립 소식을 접했다"며 "그때마다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이 넘쳤다"고 했다.

◆김종락 대한야구협회 고문
"야구도 올림픽" 레이건 친서

김종락 대한야구협회 고문은 금융인 출신이다. 은행에 다닐 때부터 조선일보 주최 청룡기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를 열심히 봤고 퇴직 후 대한야구협회 회장을 맡았다. 친동생 김종필 당시 공화당 의장이 듬직한 우군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김 고문은 세계야구연맹 부회장이었다. 당시 야구는 올림픽 종목이 아니었다. 김 고문은 "야구를 올림픽 시범 종목으로 채택해달라"는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야구는 '주최국 권한'으로 올림픽 시범 종목이 됐다. 그는 "한국 야구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평생의 꿈이 이뤄진 것 같았다"고 했다.

◆우리는 한국인, 고난에 지지 않는다

1920년생들은 이승만·윤보선·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등 10명의 대통령을 겪었다. 이들은 "어떤 위기가 닥치건 국민의 마음을 모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산악인 전우순씨는 "10월쯤 네팔의 아일랜드피크(6189m)에 등정해 일본인이 세운 최고령 기록(85세)을 깰 계획"이라며 "아흔이 다 된 늙은이도 새로운 목표에 도전하는데, 젊은 사람들이 기운을 내면 좋겠다"고 했다.

원로들은 '동갑내기' 조선일보에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은 해방 직후 독립운동가 조만식(1883~1950) 선생의 비서로 일했다.

1932~33년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조만식 선생은 "조선일보를 경영하는 일이 곧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일했다'고 말하곤 했다. 1954년부터 56년째 조선일보를 구독해온 김용규씨는 "조선일보를 통해 4·19, 5·16 같은 대사건을 접했다"며 "일류국가가 된 대한민국에서 '내 친구 조선일보'와 함께 100살 잔치를 벌이고 싶다"고 했다.

조선일보가 창간된 1920년에 태어난 김종락 대한야구협회 고문(왼쪽부터),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 김용규 전 국무총리실 행정실장이 2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나 한국 사회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1920년생은

1920년에 정확히 몇 명이 태어났는지에 대한 통계는 없다. 첫 인구조사(센서스)가 1925년에야 이뤄졌기 때문이다. 1925년에 만 5세였던 사람 숫자로 유추해 보면 1920년생은 50만8578명(남자 26만1584명, 여자 24만6994명)이다. 하지만 출생 신고를 미루는 관행이 있었고 조사원이 집을 찾아다니며 나이를 묻는 식이어서 정확한 수치는 아니라고 통계청은 설명했다. 2008년 12월 말 현재 국내에 생존한 1920년생은 전체 인구(4955만2045명)의 0.07%인 3만4714명이다. 100명 가운데 7명이 살아있는 셈이다.

행정안전부 통계에 따르면 남자가 9236명, 여자가 2만5478명으로 남자에 비해 여자가 3배 가까이 많이 생존해 있다.


 

89세 맞은 1920년생들이 말하는 대한민국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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