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89특집/임정 수립 90주년]1917년 상하이, 독립운동가 14인 "한민족 정부 세우자" 전격선언

조선일보
  • 김기승·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장,순천향대 인문대학장
    입력 2009.03.05 03:02 | 수정 2009.03.09 10:00

    3·1운동에서 임시정부까지 [1] '대동단결의 선언'
    신규식·박용만 등 주도… 주권내준 합방 무효 주장
    헌법·독립외교 공론화… 임정 탄생에 결정적 역할

    헌법 전문에 명시된 대로, 대한민국은 1919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잇고 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맞아, 국내외의 여러 독립운동 진영이 3·1운동에서 임시정부 수립까지 함께 손잡고 근대국가의 기초를 닦아가는 여정을, 대표적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이 6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2년 전인 1917년 7월 중국 상하이에서는 해외 독립운동자 14인 명의로 해외단체의 통일적 최고기관 조직을 위한 민족대표회의를 개최하자는 '대동단결의 선언'이 발표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신호탄이었다.

    이 선언은 전체 한민족을 '통치'할 통일기관은 '대헌(大憲·헌법)'을 제정하여 법치를 행하며 '국민 외교'를 실행한다고 했다. 그것은 '통일국가'를 거쳐 '원만한 국가'로 발전하는 전 단계로서, 대한제국의 영토·국민·주권을 승계한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첫걸음이었다.
    신규식(가운데)과 박달학원 학생 신성모(왼쪽), 신건식(오른쪽). 박달학원은 신규식 이 1912년 상하이에 세운 동제사(同濟社)가 운영한 청년 교육기관이다./독립기념관 제공

    독립운동자들은 먼저 주권(主權)의 수수가 민족 내부에서만 이루어진다는 민족사의 불문율에 의거하여 이민족에게 주권 양여를 규정한 '합방'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경술 국치일을 황제가 주권을 포기하여 주권이 2000만 동포 전체에게 귀속된 '국민주권 선언의 날'이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국내 동포들은 주권 행사가 어려운 상황에 있으므로 해외 독립운동자가 주권 행사의 위임을 받아 임시정부를 만들어야 할 권한과 책임이 있다고 하여 임시정부 수립의 법리적 당위성을 밝혔다.

    '대동단결의 선언'의 실질적 지도자는 신규식과 박용만이었다. 신규식은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가하고 상하이에서 동제사(同濟社)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1915년 이상설 중심의 신한혁명당에 가입하여 광무 황제를 옹립한 망명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했던 경험이 있었다. 박용만은 1914년 이상설이 노령(露領) 연해주에서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했을 때, 이에 참여하여 미주 지역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했다.

    또한 그는 1909년 미국의 한인 자치기관으로 조직된 대한인국민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는데, 이 조직은 노령·만주·멕시코 등지에도 지부를 갖고 있어 해외한인 전체를 대변하는 '무형(無形) 정부'의 역할을 한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각기 임시정부 수립운동 경험이 있던 두 사람은 임정수립 운동의 거두 이상설이 1917년 3월 작고하자 그의 유업을 계승하여 민족사 신앙의 지도자 윤세복· 박은식·신채호, 국제정세와 근대적 지식에 밝은 김규식·조소앙·신석우·한진교 등 14인과 함께 7월 상하이에서 '대동단결의 선언'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조소앙이 기초한 선언문은 국내외 각지로 발송됐다. 지금 독립기념관에는 미주의 안창호에게 보냈던 그 원본이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안창호 각하 및 동지 제위에게' 보내는 서한과 선언 찬동 여부를 회답하는 '찬동(贊同) 통지서'가 첨부되어 있다. 흥사단원 이일은 미주지역 대표로, 대한인국민회 부회장 박용만은 하와이 대표로 이 선언의 발의자로 참여했다. 그럼에도 흥사단 설립자이며 대한인국민회 회장이었던 안창호는 9월까지 대회 참가를 결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대동단결의 선언'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고, 민족대표회의는 개최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선언문은 국내외 각지에 발송되었고, '신한민보' 등을 통해 보도되어 해외 독립운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써 임시정부 수립의 원칙과 방법 등에 대한 공론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국제사회에서의 독립외교 방안도 적극적으로 강구되기 시작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로 모여들었고, 4월 10일과 11일 개최된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어떻게 이렇게 단기간에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을까?

    1909년 미국에서 결성된 대한인국민회는 1911년부터 '무형 정부'를 자임하면서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했다. 1914년 노령에서는 대한광복군정부가, 1915년 중국에서는 신한혁명당이 망명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노력들이 결합하여 1917년 7월 '대동단결의 선언'이 나오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 수립의 원칙과 방향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임시정부의 산실인 임시의정원 회의는 '대동단결의 선언'의 주체였던 신규식·신석우·조소앙·한진교 등이 주도했다. 조소앙은 회의체를 임시의정원으로 하자고 제안했으며, 신규식은 의정원 부의장으로 회의 진행을 주도했다. 신석우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할 것을 제안했으며, 조소앙은 대동단결의 선언의 취지를 살려 최초의 민주주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기초했다.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표로 추인되어 '대동단결의 선언'에서 말한 '국민 외교'의 실천자가 되었다. 또 신규식과 박용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무총장과 외무총장으로 선임되는 등 '대동단결의 선언' 주체들은 임정의 초기 지도 인물로 활약했다.

    '대동단결의 선언'의 임시정부 수립 제안은 1919년 4월 선언 주체들의 주도적 노력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래서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는 '대동단결의 선언'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모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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