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chosun] 숨겨놓은 진실 찾기인가… 음모론 자체가 음모인가

    입력 : 2009.02.27 16:11 | 수정 : 2009.03.01 13:46

    <이 기사는 weekly chosun 2045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최근 ‘군포 연쇄살인 사건의 수사 내용을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바란다’는 내용의 청와대 이메일을 놓고 야당과 정권 사이에 ‘음모론’ 공방이 벌어졌다.

    야권은 “전대미문의 청와대발 여론조작 시도”라며 국정조사와 특검 도입을 촉구했다. 반면 청와대는 “개인적 차원의 편지였지만 청와대 근무자로서 부적절한 행위였다”며 메일을 보낸 홍보기획관실 산하 국민소통비서관실의 행정관이 제출한 사직서를 수리했다. 그리고는 “행정관의 편지는 개인 차원의 돌출행동이었음이 밝혀진 만큼 계속 문제 삼으려는 것은 정치공세”라고 했다.

    요컨대 별 것도 아닌 일을 음모론적으로 침소봉대해 여론을 호도, 정권의 이미지에 상처를 내려는 시도라는 주장이다.

    이상하게도 우리 사회에서 불거진 사건들은 상당수가 음모론으로 연결된다. 1987년에 있었던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 사건도 마찬가지다. 폭파범 김현희(47)는 최근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정부 때 국정원이 나를 MBC에 출연시켜 바보로 만들려 했다”고 주장했다. 노 정권이 자신을 음모론의 주체로 삼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선 여전히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은 조작된 것이고, 김현희는 가짜”라고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근래의 혹은 현대의 국제적으로 굵직한 사건들 역시 상당수가 음모론에 시달리고 있다. 과연 진실은 따로 있나, 아니면 음모라는 주장 자체가 음모인 것인가. 먼저 음모론이란 무엇일까.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저자 칼 포퍼는 “어떤 강력한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고통이나 재난이 발생한다고 설명하는 방식”이라고 정의한다. 음모론의 특질은‘대중이 무기력한 원인을 가진 자의 탓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에 음모론은 대중을 쉽게 호도할 수 있는 성격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되기도 한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는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정보의 투명성”이라며 “우리는 정보 유통이 투명하지 않았던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경험으로 인해 음모론에 취약한 경향을 보인다”고 했다. 주간조선은 국내외의 굵직한 사건들 가운데 음모론이 수반된 대표적 사안들을 추려보았다. 음모론이 더 그럴 듯한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물론 여러분의 몫이다

    아시아 금융위기는 기획된 것인가

    정 설 / 1997년 태국·인도네시아 등 화폐 가치 폭락… 한국은 위기 극복했지만 구조조정 후유증

    IMF는 2000년 6월 “1990~1995년 동아시아로 약 3200억달러에 달하는 해외자본이 유입됐으며 이는 1980년대 전체 순유입액의 두 배 이상”이라고 발표했다. 이 같은 대규모 자본유입이 동아시아 경제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초과했다는 것이다.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은 해외채무 규모가 GDP의 28~57%에 달했다. 주목되는 것은 해외부채에서 차지하는 단기부채의 비중이었다. 한국은 1996년 말 기준, 단기부채 비중이 50%를 넘어섰고 태국이 41%, 인도네시아 25%, 말레이시아는 28%를 차지하고 있었다.

    과도한 부채 때문에 동아시아 국가들은 환율정책을 자유롭게 펼 수 없었다. 자국 화폐의 평가절하는 기업이나 은행의 외채상환에 부담을 줬고, 외자도입에 부정적 영향을 끼쳐 경제성장을 둔화시켰으며 수지 악화로 기업의 도산을 초래했다. 기업 부실은 금융기관 부실로 이어졌다. 부실 채권이 쌓이면서 자산 부실화가 초래됐고 금융시스템의 불안정성이 높아졌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국제 금융기관들은 동아시아의 은행과 기업에 대한 신규 대출을 꺼리게 됐다. 그러자 해외 차입금리가 상승했다. 해외 단기채무 규모가 외환보유고 이상으로 증가했지만 이에 대한 각 정부 대책의 실효성이 의심을 받으면서 불신은 더욱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1997년 7월, 태국 바트화 가치가 폭락했다. 아시아 외환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외환 유동성 부족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아시아 전역으로 급속하게 확산됐다. 한국에선 대기업이 연쇄 부도를 맞았고, 은행 및 종금사의 부실채권이 증가했으며, 경상수지 적자가 크게 늘어났다. 한국은 결국 1997년 12월,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긴급 구제금융을 받아 유동성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산가치 폭락, 구조조정, 노숙자 양산 등의 숱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음모론적 주장
    “서방 투기자본의 아시아경제 장악 음모…고금리·저환율로 거액 챙겨갔다”

    “1997년의 아시아 외환위기는 서방세계의 음모”라는 주장이다. 이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투기자본 세력이 세계무역기구(WTO)를 앞세워 다른 나라의 자본시장을 개방하도록 압력을 행사한 뒤 외채가 누적돼 외환 유동성이 부족하게 되면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게 해 구조조정을 유발하고 이 과정에서 대상국의 자본시장을 전면 개방하도록 강요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를 뒷받침해주는 사례로 1997년 11월 우리가 일본에 정부 차원의 지원을 요청했을 때 미국이 일본에 ‘한국이 IMF에 가지 않으면 지원하지 말라’며 압력을 행사했다는 점과, 자본시장의 무리한 개방으로 외환위기가 발생했는데도 IMF가 구조조정의 하나로 한국자본시장의 과감한 추가개방을 요구했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

    대표적 인물로 ‘빈곤의 세계화’란 저술로 유명한 캐나다 오타와대학 미셸 초스도프스키 교수를 꼽을 수 있다. 그는 2005년 한국을 방문해 “국제 투기자본이 통일 뒤의 한반도를 재식민화 하기 위해 1997년 한국의 금융위기를 치밀하게 추진했다”고 주장했다. “IMF 구제금융을 통해 외국 투기자본들이 한국의 기업을 장악하면서 막대한 이윤을 챙겼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견해에 동조한 대표적 정치자가 마하티르 모하메드 당시 말레이시아 총리다. 그는 아시아 각국의 통화 가치가 한꺼번에 급락한 데 대해 여러 차례 ‘미국 배후설’과 ‘유대자본 농간설’을 제기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현재와 같은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20~40년간 일했지만 외국 투기자본의 음모로 2000억달러 이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비난했다.

    또한 그는 1999년 5월 ‘아시아를 위한 뉴딜정책’이란 책을 통해 “아시아인들은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또 무엇이 게임의 법칙인지 헷갈리게 됐다”고 했다. 마하티르는 “고금리 긴축정책을 펴라”는 IMF 권유를 따르지 않고 고정환율제를 실시한 뒤 외화 유출을 통제했다. 당시 IMF는 “말레이시아 경제는 파국을 맞을 것”이라 경고했지만 성공적으로 금융위기를 극복했다.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 사건

    정 설/ 22년 전 115명 탄 KAL기 폭파 테러… 범인 김현희 ‘북한 공작’ 입증해 사면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오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해역에서 공중 폭파됐다. 기내에는 한국인 승객 93명과 승무원 등 115명이 탑승해 있었다. 승객은 대부분 중동에서 귀국하던 근로자들이었다. 사건 15일 만에 양곤 동남쪽 해상에서 파손된 KAL기 부유물 7점이 발견됐다. ‘비행 중 폭발에 의한 추락’임을 보여준다. 수사 결과 이 여객기는 ‘북한의 대남공작원 김승일(하치야 신이치라는 일본인으로 위장)과 김현희(하치야 마유미로 위장)가 술로 위장한 액체 폭발물(PLX)과 시한폭탄을 기내에 두고 내렸으며 이로 인해 폭파됐음이 밝혀졌다. 이들은 김정일의 친필 지령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살아남은 유일한 증인이자 범인인 김현희는 사형이 확정됐다. 하지만 사건이 북한에 의해 자행된 국가적 범죄였음을 입증한 공로로 한참 뒤 특별사면을 받았다. 김현희는 특수공작원 훈련을 받던 중 만난 납북 일본 여성(다구치 야에코=리은혜)의 존재를 밝혀, 납북 일본인 문제를 일본과 북한 간의 새로운 외교 현안으로 부상시키기도 했다.

    음모론적 주장
    “탑승자 유해·유품, 블랙박스 등 전무…대선 전날 김현희 압송해온 것도 수상”

    안기부는 1990년 “안다만 해역에서 비행기 잔해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안기부는 “잔해에 남은 88올림픽 표지와 태극마크로 미뤄 폭파된 KAL기가 틀림없다”면서도 “115명 탑승자의 유해나 유품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당시 안기부는 김현희가 북한 테러리스트임을 입증하는 사진 3장을 발표했다. 첫째는 1972년 11월 평양을 방문한 남북조절위원회의 남측 대표 장기영씨에게 꽃다발을 선물한 평양 화동 김현희, 둘째는 일본 하기와라 기자가 1972년 평양주재 당시 찍은 화동 김현희, 셋째는 평양서 꽃다발을 증정하려고 대기하는 화동 김현희의 사진이다. 김현희는 이 세 장의 사진에 대해 ‘내 것이 맞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음모론 주장자들은 몇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먼저 사진에 나온 화동의 귀는 동그란데, 김현희의 귀는 세모꼴이란 주장이다. 그들은 “귀는 지문과 마찬가지여서 레슬링 같은 과격한 운동이나 성형에 의하지 않고는 변하지 않는 다”는 성형외과 전문의 견해를 들어 사진의 진실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둘째로 그들은 “정희선이란 북한 여인이 ‘사진 속 화동은 나’라고 밝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희선이란 여인이 1988년 3월 외신기자회견을 한 장소가 북한이었음이 드러나면서 거꾸로 북한이 음모론을 조작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야기시켰다.

    우리 정부는 기체의 결정적 부위나 탑승객 유품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고 10일 만에 현지조사단을 철수, 수색을 중단했다. 가장 중요한 증거품이 될 수 있는 블랙박스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블랙박스를 찾으려면 발신음 추적을 위한 ‘수중공명위치탐지기’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음모론자들은 정부가 보잉사에 이 기계를 요청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며 이 역시 간과하기 힘든 대목이라고 주장한다.

    김현희는 대선 하루 전날 서울로 압송됐다. 정부는 “바레인 측 사정에 의해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중앙일보는 10년 뒤인 1996년 4월 선거철마다 불거진 북풍(北風) 변수를 전하면서 “1987년 박수길 당시 외무부 차관보가 바레인 당국에 거의 떼를 쓰다시피 해 압송 타이밍을 맞췄다고 한다”고 전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특정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공작 차원에서 이 사건이 활용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한편 이 같은 일련의 음모론에 대해 김현희 본인은 최근 월간조선을 통해 “노무현 정부의 국정원이 나를 MBC에 출연시켜 바보로 만들려고 했으며 국정원 간부로부터 이민 권유를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참여정부로부터 ‘KAL기 폭파 사건은 남한에 의해 조작됐다’는 진술을 하도록 강요받았다”며 “방송 제작진이 내 집을 기습 촬영해 사생활을 노출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또 “KAL기 사건은 북한 소행임이 명백한데도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이중적 태도를 견지했다”며 “이로 인해 5년간 주부로서 평범한 생활이 어려워져 도피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김씨는 또 KAL기 사건과 관련된 과거사위의 활동도 음모라고 주장했다. 그는 “검찰과 사법부에 국정원의 위법 사실을 알렸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고 했다. 요컨대 김현희 주장의 핵심은 “북한은 존립을 위해 대남 테러사건을 일으켰고, 남한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조작설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정 설/ 1974년 8·15 행사장서 총 맞아 사망… 범인 문세광은 현장서 체포돼 사형

    유신체제가 절정에 이르던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저격사건이 발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총탄을 피할 수 있었지만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두부 관통상을 입고 운명했다. 경축식은 TV로 생방송되고 있었기에 국민적 충격은 더욱 컸다.

    범인 문세광(당시 22세)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수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문은 자신이 북한과 조총련의 지시를 받고 치밀한 계획에 따라 범행했다고 자백했다. 사건 발생 127일, 대법원 확정 판결 사흘 만에 문세광은 전격 사형에 처해졌다.

    음모론적 주장
    “문세광 권총엔 5발 들었는데 현장에서 발사된 총알은 7발”

    문세광이 그날 준비한 권총 탄환은 5개. 첫 발은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실수로 자기 다리를 쏘았고, 박정희 대통령을 노리고 발사한 두 번째 탄환은 연단에 맞은 것으로 발표됐다. 세 번째 탄환은 불발. 네 번째 탄환에 육영수 여사가 쓰러졌으며, 문세광이 누군가의 발에 걸려 넘어지면서 마지막 탄환은 천장에 맞았다고 수사기록은 전한다.

    그런데 문이 경호원들에게 제압되는 가운데 현장에서 총성이 한 번 더 울린 것으로 파악됐다. 조사 결과 총소리가 실제로는 총 7번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4번째와 6번째 총성은 문의 총성과 파장이 달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음모론자들은 이 같은 정황들을 토대로 ‘문이 총을 쐈을 때 다른 누군가가 거의 동시에 총을 쏜 것 아니냐. 그렇다면 그게 누구냐. 고의로 육 여사를 맞힌 것 아니냐’는 등의 꼬리를 문 의혹이 제기돼 왔다. 요컨대 당시 권부가 정권 유지를 위한 ‘극약 처방’으로 육 여사까지 희생양으로 삼은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9·11은 조작인가

    정 설/ 세계무역센터에 항공기 충돌 대참사… 서방의 아프간 공격과 이라크전 계기 돼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상징물이던 세계무역센터(WTC)와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펜타곤)에 항공기를 이용한 테러가 발생했다. 이날 오전 8시45분 아메리칸항공 소속 AA11기가 무역센터 북쪽 건물에 충돌했으며 9시3분엔 유나이티드항공 소속 UA175편이 남쪽 건물을 들이받았다.

    이어 37분 뒤 AA77기가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을 들이받았다.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은 9시55분, 10시30분엔 북쪽 건물이 붕괴됐다. 부속건물인 7호 빌딩도 그 여파로 오후 5시20분 무너졌다. 범인은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로 알려졌으며 이들이 민간항공기를 납치해 공격한 것으로 파악됐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충돌 직후인 이날 9시31분 “미국에 대한 명백한 테러”라고 사건을 규정하고 전국 주요 건물을 폐쇄했다. 그는 9월 15일 오사마 빈 라덴이 숨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지상군 투입을 결정, 10월 7일 공격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빈 라덴을 검거하지 못했다. 미국은 2003년 3월 20일 이라크 공격을 감행, 20일 만에 함락시켰다.

    음모론적 주장
    “빈 라덴의 형, 부시家와 친분… 사고 당일 아버지 부시 만나…현장에서 고성능 폭탄 흔적 발견된 것도 의문”

    음모론은 부시 집안과 빈 라덴 집안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9·11 이전부터 관계를 맺어온 사이”라는 것이다. LA경찰 출신 마이클 루퍼트는 “오사마 빈 라덴의 형인 살림 빈 라덴이 1976년 빈 라덴 가문이 미국에 투자했던 자금을 처리한 적이 있는데, 당시 이 일을 맡았던 사람이 텍사스 출신의 짐 배스였다”며 “그런데 그는 조지 W 부시의 절친한 친구”라고 주장했다. 1998년의 상황에 대한 ‘증언’도 있다.

    다큐멘터리 ‘화씨 911’을 제작한 마이클 무어 감독은 “군산(軍産)복합 사모펀드인 칼라일그룹은 1998년과 2000년 두 차례 사우디를 방문해 빈 라덴 가문을 만났다”며 “당시 칼라일그룹을 대표한 사람이 바로 아버지 부시였다”며 방문 사진을 2004년 공개했다. 사고 당일에 대한 얘기도 있다. “9월 11일 이른 아침, 칼라일그룹 사무실에서 오사마 빈 라덴의 형인 샤피그 빈 라덴과 아버지 부시가 만났다”는 것이다.

    의혹은 북미항공우주방위군(NORAD)으로 이어진다. 1958년 상공 감시를 위해 이 기관을 세운 미국은 1989년부터 미국과 캐나다의 방공 식별권에 들어오는 모든 항공기를 탐지·확인·추적할 수 있게 됐다. 1992년부터는 멕시코 국경까지 감시 범위를 확대했다. USA투데이는 “북미항공우주방위군은 9·11 직전 2년간 항공기 및 미사일 테러 대비 훈련을 해왔다”고 보도했다. 이 기관은 2000년 한 해만 67건의 항공기 납치 진압작전을 수행, 성공률 100%를 기록했다고 한다. 음모론자들의 의문은 그런데 왜 9·11 당일만 예외냐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테러 징후를 전혀 알지 못했다”고 했다.

    의문은 또 있다. 국방부를 공격한 항공기의 잔해가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미국 정부는 “충격과 고열에 녹아 잔해가 증발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 항공기는 티타늄 합금 엔진을 장착하고 있다. 엔진 2개의 무게는 12톤. 음모론자들은 일부 학자의 입을 빌려 “12톤 티타늄 합금 엔진이 제트연료 폭발로 녹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미 국방부에 충돌 장면을 찍은 CCTV 필름을 공개하라고 요구했지만 당국은 거부했다고 한다.

    자금 지원 여부도 의문이다. 파키스탄정보국(ISI)의 마호메드 아메드 국장은 테러 지휘자인 모하메드 아타에게 10만달러를 송금했다. 전달자인 오마르 셰이크가 자신의 역할을 시인했다. 하지만 ISI가 왜 테러범에게 10만달러를 지원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9·11 공식 보고서는 “자금 지원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짧게 언급했다.

    무역센터 부속건물인 7호 빌딩은 항공기와 직접 부딪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붕괴됐을까. 음모론자들은 “폭탄을 사용해 의도적으로 무너뜨렸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브리검영 대학 물리학과의 스티븐 존스 박사는 “전자현미경 분석 결과 현장에서 고성능 폭탄에 쓰이는 테르마이트(Thermite) 흔적이 발견됐다”고 했다. 한편 빌딩 설계자인 레스 로버트슨은 “무역센터는 훨씬 큰 여객기가 충돌해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됐다”고 주장했다. 음모론자들의 최종적 추론은 “9·11은 미국이 새로운 제국주의 정책 추진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작전이었다”는 것이다.

    다이애나는 살해됐나

    정 설/ 영국 왕세자비 다이애나 교통사고… 동행하던 아랍 애인과 함께 숨져

    다이애나 스펜서는 1981년 영국 황태자 찰스와 결혼했다. 하지만 끊이지 않는 불화설 끝에 1996년 결국 이혼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아랍 출신의 영국 거부 도디 알 파예드와 교제를 시작했다. 도디의 아버지는 영국 최고의 백화점인 ‘해로즈’의 오너다.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와 도디는 파리의 리츠칼튼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한 뒤 벤츠600을 타고 호텔을 나섰다. 파파라치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추적하자 벤츠는 알마교 밑 터널을 지나면서 속도를 높였다. 호텔 출발 4분 뒤였다. 벤츠는 터널 안 13번 기둥을 들이받았고 도디는 즉사했다. 다이애나는 4시간 뒤 세상을 떠났다.

    다음날 프랑스 경찰은 운전사 앙리 폴을 상대로 음주 및 약물검사를 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프랑스법상 음주 한계를 3배나 초과한 알코올이 검출됐으며 그가 사고 전 석 달간 항우울제와 알코올중독 치료제를 복용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운전자 과실로 일단락됐다. 많은 음모론이 제기됐지만 의회는 사고 13년이 지난 2008년 단순 운전부주의로 재확정했다.

    음모론적 주장
    “기사가 만취 운전했다는 것은 거짓말…섬광 터뜨려 한순간 시력 마비시켰다”

    먼저 “운전기사 폴이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는 주장이다. 폴이 정상적으로 걸으며 대화하는 모습이 녹화된 리츠칼튼호텔 폐쇄회로 TV필름이 간접적 증빙자료다. 음모론자들은 “다이애나 고의 살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시체 공시소에서 폴의 혈액을 바꿔치기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프랑스 경찰은 2차 부검 및 DNA검사를 실시해 그 혈액이 폴의 것임을 재확인했다.

    과속 여부도 논란이 됐다. 사고 장소의 제한속도는 30 마일(약 48㎞). BBC는 “프랑스 법의학자들과 충돌전문가들의 조사 결과 다이애나의 벤츠는 74~90마일(약 118~140㎞)로 달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터널 폐쇄회로 화면엔 다이애나 승용차가 찍히지 않았다. 음모론자들은 “그날 밤 다이애나의 승용차를 찍은 다른 폐쇄회로 TV필름이 존재하며 그 차는 아주 느리게 주행했다”고 주장했다. 일부는 ‘폐쇄회로 화면’이라며 BBC로 사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 호텔 출발 전에 호텔 뒤쪽에서 파파라치가 찍은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스 경찰은 사고 2주 뒤 “다이애나의 승용차가 충돌 전에 또 다른 차와 충돌했다”며 “부딪친 차는 1983~1987년식 흰색 피아트”라고 했다. 하지만 이 차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음모론자들은 “그 차가 고의로 다이애나의 벤츠와 충돌해 사고를 야기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목격자의 입을 빌려 “충돌 직전 터널 안에서 엄청난 섬광이 있었다”고 주장해 왔다. “섬광 때문에 기사가 일시적으로 시력 장애를 겪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목격자라고 주장하는 프랑수아 레비스트르는 “그 불빛에 시력장애가 생겨 다이애나의 차가 제어력을 잃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이애나가 도디의 아기를 임신했기 때문에 살해됐다는 주장도 있다. 이들은 ‘다이애나의 사체가 부검 전 몇 시간 동안 방부 처리된 점’에 주목한다. 방부 처리에 사용된 포름알데히드가 임신 진단을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부검 시신에 대한 방부 처리는 불법이다. 영국 인디펜던트지는 프랑스 경찰과의 인터뷰를 통해 “다이애나는 사망 당시 임신 중이었으며 이 사실이 외부에 공개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다이애나 사망 열흘 전 그녀의 생리통 치료를 맡았던 의사는 “임신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경찰은 “방부 처리는 가족들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 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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