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소설 안중근' 불멸] [42]

조선일보
입력 2009.02.21 02:40

제4장 기다리는 사람, 떠나는 사람

명근이 한바탕 분란을 겪고 서울로 나간 뒤 두어 달이 지났다. 청계동에 머물러 있는 중근도 자신의 길을 열심히 가고 있었다. 중근에게도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무렵부터 이따금씩 신천이나 해주 일대로 출입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근방 어디에 쓸만한 인물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스스로 찾아가 벗을 삼는 일인데, 전에 없던 일이지만 그렇다고 전혀 낯선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 안태훈이 일생 즐겨 하던 일로써, 어떤 면에서는 아직도 충실하게 안태훈을 따라 걷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어느 날 중근이 또 그런 벗을 찾아 재령으로 나갔다가 하루를 묵고 일찍 돌아오는 길에 김창수(훗날의 김구)를 만났다. 청계동을 막 벗어난 큰길 가였다.
일러스트 김지혁

김창수는 웬 봇짐장수와 함께 가고 있었는데, 역시 작은 괴나리봇짐을 멘 게 먼 길을 가는 행색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봇짐장수도 누군지 알 듯했다. 김씨 성을 쓰는 전주 사람이었는데, 품은 뜻이 있어 참빗장수로 전국을 떠돌다가 안태훈의 이름을 듣고 청계동을 찾아왔다던 삼십대 중반이었다. 이틀 전에 큰 사랑에서 보았는데 이제 떠나는 모양이었다.

청계동 안 같으면 공손히 목례나 하고 지나쳤겠지만, 청계동을 이십리나 벗어난 데다 김창수의 차림 또한 먼 길을 가는 듯하여 그리 할 수 없었다.

"어디를 가시는 길이온지요?"

그러자 김창수가 무엇 때문인지 움찔했다. 그리고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더니 이내 쾌활하게 대답했다.

"청계동에 죽치고 앉아 남의 식객 노릇 하기에도 지쳐 잠시 세상을 돌아보려 합니다."

"세상을 돌아본다면 어디를……?"

중근이 갑작스럽다는 생각에 그렇게 묻자 김창수는 평소 큰 사랑에서 그러듯 시원스레 대답했다.

"북쪽으로 올라가 형편이 되면 청나라까지 둘러보고 올 생각이외다."

"갑자기 청나라는 무슨 일로……."

"나라 꼴은 글렀지만 그냥 뒷짐 지고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왜놈들이 못된 짓을 하면 결국 우리가 기댈 곳은 청나라밖에 없을 터, 그래서 여기 이 김형진 형과 함께 미리 한번 둘러보아두려는 것입니다. 평양에 들어가 나도 봇짐을 하나 꾸리고 행상(行商)을 돌면 큰 여비를 들이지 않고도 청나라를 돌아볼 수 있겠지요. 청나라도 언젠가는 갑오전쟁(甲午戰爭:중국은 청일전쟁을 갑오전쟁이라고 한다)에 진 원수를 갚으려 들 것이니, 그전에 미리 그쪽 인물들과 손을 잡아두는 것도 뜻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늘 그렇듯 중근에게는 허풍스럽게만 들리는 말투였다. 그게 마음에 거슬려 중근은 그쯤에서 아는 체를 끝내고 돌아서려 했다. 그때 김창수가 잠시 멋쩍은 표정을 짓더니 실토하듯 말했다.

"실은 춘부장께 하직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나왔소. 공연히 요란스러울까 봐 그런 것이니 돌아가시거든 형이 대신 말씀드려 주시오. 부모님이 청계동에 계시니 길어도 일년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오."

그 말에 중근은 슬며시 속이 뒤틀렸다. 오갈 데 없는 사람을 식구대로 데려다가 다섯달이나 거두어 주었는데 인사도 않고 떠난다니 뭔가 심상찮은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 안 진사가 귀하게 대접하는 손님이라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해 드리지요."

그렇게 대답하고 가벼운 목례와 함께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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