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의 시절 '민주화' 중심… 국민들은 그의 입을 쳐다봤다

조선일보
  • 김한수 기자
    입력 2009.02.17 00:14 | 수정 2009.02.17 09:37

    ● 한국현대사를 꿰뚫은 그의 족적
    가난한 옹기장수 막내… 박정희 정권 독재 비판
    6·10땐 경찰진입 막아

    한국 천주교계의 큰 별,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이 졌다. 16일 선종(善終)한 김수환 추기경은 천주교의 울타리를 넘어서 우리 사회의 원로였다. 1970년대 이후 우리 국민은 천주교 신자 여부를 떠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버릇처럼 그의 입을 쳐다봤고, 그의 한마디는 사회적 파급효과를 냈다. 그의 사목 표어인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BOVIS ET PRO MULTIS)'가 곧 그의 삶이었다.

    김 추기경은 1922년 대구에서 가난한 옹기장수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1868년 무진박해 때 순교했다. 옹기장수나 숯장수는 주로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기 위해 택한 직업이었다. 사제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은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의 강권 덕분이었다.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에 진학한 그는 당시 교장이던 장면 박사의 추천으로 일본 상지대로 유학을 떠났지만 태평양전쟁에 학병으로 끌려가 전쟁터에서 광복을 맞았다.

    귀국 후 가톨릭대 신학부에서 학업을 마치고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사제로서 그의 일생은 어찌 보면 탄탄대로였다. 5년간 안동·김천본당의 주임사제, 교구장 비서로 일한 그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64년에는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에 임명됐다. 이어 1966년엔 주교로 수품돼 신설 마산교구장에 오르고, 2년 후엔 대주교로 승품돼 서울대교구장이 된다. 다시 1년 후인 1969년엔 만 47세의 나이로 한국 최초의 추기경에 서임된다. 그의 추기경 서임은 사제 수품 후 18년 만의 일이었다.

    성직자로서 평탄한 길을 걸어온 것처럼 보였지만 김 추기경은 지난 2005년 발간한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서 "나는 늘 도망갈 궁리를 하면서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1970년대 이후 그의 삶은 한국 사회에 '추기경'이란 어떤 자리이고,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또 오늘날 500만명 이상의 신자를 확보한 현대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닦았다.
    1970·80년대 군사정권 시절 김 추기경은 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다. 1971년 성탄절 자정미사에서 그는 "정부와 여당에 묻겠습니다.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라고 물었다. TV로 전국에 생방송되는 미사였다. 1972년 8월 9일엔 광복절을 앞두고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물론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중앙정보부에 끌려 갔을 때는 박 전 대통령과 면담, '풀어 달라'고 담판을 지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이 시절 그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대부(代父)'로도 불렀다.

    엄혹한 시절 종교 지도자로서 할 말을 하는 그의 모습은 천주교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도 상당 부분 기여했다는 게 천주교계 안팎의 평가다. 그러나 그는 "나는 젊은 신부들이 자꾸 시국기도회를 여는 것을 말리는 편이었다"면서 "그러나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은 나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1987년 6·10 항쟁 때 명동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려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고 버틴 것도 그였다. 그는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 "누가 나에게 '그때 최선을 다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럼 아무것도 안 했느냐'고 되물으면 '아니다. 나름대로 사태를 막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하고 싶다"고 솔직히 토로하기도 했다.
    16일 서울 명동성당에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유해가 안치된 가운데, 정진석 추기경(사진 맨 오른쪽 앞)과 신부들이 장례의식을 진행하고 있다.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김수환 추기경은 민주화가 이뤄진 이후 2000년대 들어 한때 자신이 지원했던 이른바 민주화 세력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지난 2005년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고문 함세웅 신부 등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분'이란 비판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너무 칭찬만 듣고 살아서 은근히 걱정이었는데, 그런 비판을 한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받아넘기기도 했다.

    군사정권 시절이건 민주화 이후 정권이건 권력자들은 김 추기경의 발언을 불편해했다. 시대 흐름에 따라 어제는 자신을 지지하던 쪽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지만 김 추기경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지난 2005년 동국대 특강에서 자신의 색깔을 설명해 달라는 질문에 '조금 보수 쪽'이라고 답했다. 그는 "우리 헌법에 통일은 자유민주주의를 기틀로 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으며 자유민주주의를 희생시키는 통일은 바른 일이 아니라고 본다"며 "어떤 방식으로라도 통일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보수"라고 말했다. 자신에게 쏠린 관심과 기대, 오해에 따른 부담 때문에 그는 "교구장 시절 이후 의사가 처방해준 약에 의지해 잠들 때가 많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세상 속의 교회'를 지향하면서 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종교인의 양심으로 바른 길을 제시해온 그는 1969년 추기경 서임 이후 40년 만에 드디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이다.
    한국 천주교계의 정신적 지주인 김수환(87) 추기경이 16일 오후 6시12분쯤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했다. /민봉기 기자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