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복 동상 철거하고, 교과서에서 빼고… 17년간 활개친 광기(狂氣)들

조선일보
  • 손진석 기자
    입력 2009.02.13 02:54

    ● 사법부 '이승복 기사 조작설'에 마침표
    형사·민사재판 모두 "조작설은 허위" 판결
    本紙 특종보도 인정

    이승복 사건을 보도한 1968년 12월 11일자 조선일보 기사. /조선일보 DB
    대법원이 "이승복 기사는 허위"라고 주장한 김주언(55) 전 신문발전위 사무총장에게 지난 2006년 형사재판에서 징역형을 확정한 데 이어, 12일 민사재판 최종심에서 손해배상 책임도 묻는 판결을 내림에 따라 17년 동안 '이승복 기사 조작설'을 제기해온 세력들에게 사법부가 쐐기를 박았다.

    이에 따라 1968년 12월 당시 이승복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한 후, 북한 무장공비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한 현장을 조선일보 기자가 직접 취재해 특종 보도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됐다.

    허위 주장에 진실을 확정하기까지 17년 걸려

    진실이 확정되기까지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1992년 김종배(43) 전 미디어오늘 편집장이 '저널리즘'이란 잡지에 "기자가 현장에 가지도 않았고 현장 생존자를 만나지도 않고서 소설을 썼다"는 기사를 쓰고, 김주언씨가 같은 내용으로 1998년 가을 서울과 부산에서 오보 전시회를 열자, 조선일보는 두 김씨에 대해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지법은 2002년 9월 김주언씨에게 징역 6월, 김종배씨에게 징역 10월의 실형을 각각 선고했다. 2004년 10월 2심 재판부도 김주언씨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1·2심 재판부는 "이승복군이 '공산당이 싫다'는 말을 한 것은 사실로 판단되고 조선일보 기자들이 현장에 없었다는 주장은 허위사실의 적시"라고 판시했다. 2006년 11월 대법원은 2심 판결을 확정했다. 다만 김종배씨에 대해 대법원은 "(허위기사였다고) 믿을 만했던 사정이 있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김주언씨는 대법원 선고가 나자, 신문발전위원회 사무총장(2급)직에서 면직(免職)됐다.

    민사 재판에서도 치열한 법정공방이 이어졌다. 2004년 6월 서울지법에서 열린 1심에서 "조선일보에 배상할 책임이 없다"고 원고패소로 판결이 내려졌다. 1심 재판부는 "이승복이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한 사실은 진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조선일보의 기자들이 현장에서 취재한 것도 사실로 인정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두 김씨들이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상 '있을 수 있는' 의혹 제기를 한 것"이라며 손해배상 책임을 묻지 않았다.

    하지만 김주언씨가 형사재판 최종심이 내려진 이후인 2007년 9월 열린 2심 선고공판에서는 재판부가 "김씨가 조선일보에 500만원을 배상하라"며 민사책임도 인정했다.

    당시 재판부는 "오보 전시회가 일반인들에게 이승복이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조선일보가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잘못된) 인식을 하게 만들었다"며 "이런 설명은 진실에 반(反)하고 김씨가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도 없으니 위법하다"고 선고했다.

    재판부는 "김주언씨는 그 자신이 기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오보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확인 취재를 하지 않은 채 단정적인 표현으로 허위라고 주장했다"고 지적했다.
    이승복 사건의 진실을 밝혀준 사진. 당시 조선일보 노형옥 기자가 이승복군 집에서 촬영한 것이다. 왼쪽에 카메라를 멘 사람이 경향신문 기자임이 밝혀지면서‘조선일보의 현장취재’가 입증됐다. /조선일보 DB

    교과서에서 빠지고 동상 철거되고… 피해 막심

    1990년대 '이승복 기사 조작설'이 유포되자, 전국 초등학교에 있는 이승복군 동상이 대거 철거되고 교과서에서도 사라지는 등 엄연한 역사적 진실이 흔들리면서 사회적 피해도 막심했다. 1969년 이후 이승복군 이야기는 초등학교 도덕교과서에 실려, 남북대치상황에서 반공(反共)의 상징이 됐다. 제4차 교육과정(1984년)까지는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교과서에서 당시 무장공비의 만행이 상세히 기술되는 등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1988년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을 발표한 이후인 제5차 교육과정(1990년)에서 간략하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바뀌더니, '조작설'이 유포된 지 5년 후인 1997년부터 교과서에서 자취를 감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75년 지어진 이승복기념관도 쇠락의 길을 걸었다. 1980년대 연 70만명가량이던 관람객이 조작설 유포 이후 감소해 2000년 이후에는 연간 30만명을 밑돌았다. 2007년 25만여명이, 지난해에는 사상 최저치인 24만여명이 방문했다.

    2004년에는 강원도교육청이 통일교육이 강조되는 시대정신과 맞지 않는 비능률적인 기관이라는 이유로 이승복기념관 문을 닫을 뻔했다. 논란 끝에 관할이 강원도교육청에서 평창군교육청으로 바뀌었고, 관장 직급도 교장급인 장학관에서 일반직 교육행정관으로 낮아졌다. 강원도 내 대부분의 초등학교에 세워졌던 이승복군 동상도 80% 이상 철거됐다.


    ● 이승복 사건은
    1968년 강원도 무장공비… 일가족 4명 무참히 살해


    1968년 12월 9일 저녁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 계방산 중턱의 이석우(당시 35세)씨 집에 무장공비 5명이 침입했다. 이들은 그해 10월 말 울진·삼척지역에 침투했다가 우리 군의 추격을 받고 도주하던 공비 120명 중 일부였다.

    당시 집주인 이씨는 집을 비웠고, 부인 주대하(당시 33세)씨와 승권(호적명 이학관·15세), 승복(9세)·승수(7세)·승자(여·4세) 등 4남매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공비들은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승복군에게 "너는 북한이 좋으냐, 남한이 좋으냐"고 물었고, 승복군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대답했다. 이에 공비들은 승복군의 멱살을 잡아 입을 벌린 후 대검으로 입을 찢어 살해했다. 공비들은 승수와 승자도 벽에 내동댕이쳐 살해했고, 주씨는 대검에 수차례 찔려 숨졌다. 유일한 생존자인 장남 승권씨는 공비들에게 가슴을 관통당하는 등 36군데를 찔렸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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