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대왕의 1년 복상은 그가 차남이었다는 뜻입니까?"

조선일보
  • 박남일 자유기고가. '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 저자
    입력 2009.02.05 03:37

    [역사가 꿈틀 논술이 술술] 2차 예송논쟁과 남인의 승리

    효종이 승하하고 15년이 지난 1674년 2월, 효종의 비(妃) 인선왕후가 세상을 떴다. 아들과 며느리까지 앞세워 저 세상에 보낸 대왕대비 조씨의 복상 기간이 또 문제가 됐다. 예조에서는 조대비의 복상을 1년으로 정했다. 하지만 송시열, 김수항 등 서인세력은 복상 기간을 1년이 아니라 9개월로 해야 한다며 벌떼같이 주장했다. 이에 피곤해진 현종은 "경들 뜻대로 하라!"며 손을 털었다. 결국 대왕대비 조씨는 9개월 복을 입기로 했다. 하지만 남인 측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남인의 영수 허목은 제자들을 이끌고 궐문 앞에서 다시 상소를 올렸다.

    "지난 효종대왕의 국상에서는 장자 차자를 가리지 않고 1년 복으로 한다는 국제에 따랐사온데, 지금은 국제를 벗어났으니 어찌해서 그 전후가 다르옵니까? 큰며느리에 대한 복은 1년이고, 9개월 복은 작은 며느리에 대한 상복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효종대왕 국상 때 1년 복은 결국 차자 복이었다는 뜻이 아니옵니까?"

    2차 예송논쟁이 시작됐다. '경국대전'에 큰며느리 복상은 1년이고 나머지 며느리 상은 9개월로 명확히 규정돼 있는 것이 문제였다. 9개월 복을 택하면 당연히 효종을 차남으로 인정하는 꼴이 될 터였다. 1차 예송 때 얼렁뚱땅 넘겼던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됐다. 효종이 장남이냐, 차남이냐 하는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이다.

    상소를 내려놓는 현종의 얼굴은 심각했다. 15년 전, 선왕 효종의 1년 복상이 가진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현종은 분개했다. 그리고 김수홍과 송시열을 차례로 유배형에 처했다. 그로써 왕과 일반사대부 간의 평등한 예법 적용을 강조했던 송시열 등 서인은 몰락했다. 더불어 허목이 우의정으로 등용되고,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됐다. 이후 허목은 종법과 왕통을 어지럽힌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허목의 강경론은 남인 내에서도 반대에 부딪힌다. 오히려 송시열은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왕의 부름을 받지만 낙향해 후진양성에 주력했다.

    하찮게도 옷 입는 문제 때문에 목숨을 걸고 논쟁을 벌인 허목과 송시열. 그들은 성리학의 이상이 현실사회에 구현된 것이 바로 예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예를 바로 잡는 것이 세상을 바로 잡는 첫 단추였다. 특히 왕실에서 보여주는 상례는 전체 국가 운영에 매우 상징적인 작용을 하며, 자신들의 학문적 근거와 원칙에 영향을 준다고 봤다. 그런 이유로 조선 사대부들은 그토록 예에 집착했던 것이다.

    17세기 후반. 조선 사회는 병자호란 후유증으로 극심한 침체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황폐한 민생과 나라 기강을 되살리는 것이 통치자들의 당면과제였다. 예론은 바로 그 실천방안이었다. 예치확립,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요구였고, 서인과 남인이 당색을 떠나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정책이었다. 다만 당시 서인과 남인이 학문적 기반을 서로 달리 하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송시열은 조광조와 율곡 이이의 학풍을 계승한 김장생의 제자였다. 그러므로 송시열은 기호학파의 학풍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따라서 사전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에 더 역점을 뒀으며, 정통 주자 성리학의 입장에서 통치자의 덕성 확립을 강조했다. 더구나 예는 유교정치에 있어서 교화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정치의 명분을 밝히는 것이므로 왕과 일반 사대부를 막론하고 평등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반면 허목은 퇴계 이황의 학문을 이어 받아 영남학파의 학풍을 계승했다. 더불어 그는 도가와 장자사상까지 섭렵해 송시열과는 다른 학문적 체계를 세웠다. 허목은 이러한 자신의 도덕적 이념을 왕권강화를 통해 실현하려고 했다. 따라서 예를 적용하는 것도 왕과 일반 사대부를 구별하였다. 즉 예로써 왕권을 강화시켜 요순시대와 같은 성군정치를 실현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허목은 송시열과 같은 예치의 이념을 가졌지만, 그 방법을 다르게 본 것이다.

    흔히 두 차례의 예송논쟁을 조선시대에 대표적인 당쟁으로 본다. 하지만 우암 송시열과 미수 허목이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전개했던 예송논쟁이 당리당략에 휘둘린 당파싸움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학문적 이념과 원칙을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의 차이에 대한 논쟁이었다. 사실 당쟁이란 용어 자체가 조선시대에는 쓰이지 않았던 말이다. 조선왕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칠하기 위하여 일제가 만들어낸 용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당쟁과 논쟁을 냉정하게 구별해 볼 줄 알아야 한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