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chosun] 국민가수 이미자 50년 노래의 비결

입력 2009.01.23 09:22 | 수정 2009.01.25 14:53

<이 기사는 weekly chosun 2040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photo 조선일보 DB

국민가수 이미자가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화려한 외모의 가수도 아닌 그녀가 반세기 동안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아온 원동력은 무엇일까? 한때 그녀의 탁월한 가창력의 원천은 ‘돌출된 입 때문’이라는 황당한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는 단순히 노래 잘하는 가수이기 때문에 ‘영원한 동백아가씨’로 자리매김 되었을까? 과연 그럴까?

미국인들은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의 성대를 영구보존해 해부해 보고 싶어했고,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뇌를 해부해 특이한 구조를 발견하고 싶어했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목소리’로 극찬을 받았던 이미자도 오래 전 일본에서 ‘사후에 성대를 영구보존하여 해부학적으로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고 해 대중적 화두가 된 적이 있다. 1993년 실제로 검사가 이루어졌다. 대중적 호기심을 자극한 ‘이미자 성대의 비밀’을 풀어보고자 한 TV방송사가 이대부속병원 음성관리소에 이미자의 성대 분석을 의뢰했던 것. 당시 성대, 음폭, 발성, 공기 역학 부문으로 정밀 검사를 했다. “이미자의 성대는 점액질이 풍부하고 훈련이 아닌 천부적인 창법, 발성법을 체득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처럼 이미자의 매력적인 목소리는 일반인과 차별적인 성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사실로 판명되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목소리는 분명 신의 선물일 것이다. 단 한번 멜로디를 들으면 곧바로 소화해 내는 타고난 절대음감 또한 신의 축복일 것이다. 거기에다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 진지한 태도는 이미자를 국민가수로 지탱시켜온 원동력이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음역(音域)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가수들은 나이가 들면서 겉멋이 든 창법으로 듣는 이를 짜증나게 하지 않던가. 특히 연습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대에 올라 고역(高域) 처리에 부담을 느껴 습관적으로 객석에다 마이크를 들이대는 ‘나쁜 습관’을 보이는 가수들을 우리는 수도 없이 보아왔다.

칠순이 코앞이지만 한결같은 미성에 꾸밈없이 소박하고 진지한 이미자의 무대는 그래서 감동을 안겨준다. 이미자의 노래는 마치 ‘순박한 시골 누이’ 같다.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노래에서는 가식이나 기교를 찾을 수 없다. 꾸밈없는 그녀의 음색이야말로 이미자 노래의 최대 무기가 아닐까!

오랫동안 주류음악의 권좌를 차지해온 트로트는 동시에 ‘천박하다’는 장르적 멸시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이미자조차 트로트를 포기하고 팝가수로 변신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트로트에는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고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준 장르적 미덕이 있었기에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천편일률적인 멜로디와 천박한 가사로 일관된 요즘의 트로트는 장르의 미덕을 망각하고 있다. 오죽하면 이미자조차 자신을 트로트 가수가 아닌 전통가요 가수로 불러달라고 했을까!

물론 장윤정, 박현빈 등 젊은 가수들이 젊은 감각의 트로트로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지만 장르적 미덕을 회복한 정도는 아니다. 이미자의 편안하고 꾸밈없는 트로트 가락은 시대를 초월해 당대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준 친구 같은 존재였다. 그에게 ‘엘레지의 여왕’ ‘한국 대중가요의 대명사’ ‘국민가수’ 등 수많은 찬사가 따라다님은 당연한 일이다.

흔히 이미자는 끊고 맺음이 분명한 직설적인 성격에 사생활 공개를 꺼려 인터뷰하기 힘든 가수로 유명하다. 그녀의 자녀들도 집에서 엄마의 노래 연습을 본 적이 없다. 놀랍게도 45주년 기념공연이 처음 본 엄마의 무대였다고 한다. 이미자는 일과 가정의 구분이 정확한 사람이다. 일을 떠나서는 철저하게 주부이자 엄마의 역할에 충실한 삶을 견지해 왔다. 이처럼 분명한 자기 관리는 대중에게 확고한 신뢰감을 심어주었다. 여장부 같은 성격이지만 남편에게 순종하는 고전적 여성상 또한 놀라운 대목이다. 실제로 그녀는 남편에게 받은 모든 월급봉투를 보관하고 있다. “그 무엇보다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라고 단언하는 대목에선 인간적 친근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0살의 이미자는 부산 피란민 시절 국제시장 앞 동아극장에서 인기가수 백난아의 공연을 보면서 가수의 꿈을 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57년 KBS 라디오 노래자랑대회. 교복을 입고 갔다가 ‘학생 출전 불가’라는 이유로 퇴짜를 맡고 다음날 엄마 옷으로 갈아입고 출전을 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여고 졸업을 앞둔 1958년. 단발머리에 까만색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최초의 민영TV 방송 HLKZ의 ‘예능 로터리’에 출전해 최고상을 받으며 정식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초창기 그녀의 가수활동은 순탄하지 않았다. 싸구려 출연료를 받고 지방 무대를 돌아다니며 선배들 양말을 빨고 온갖 잔심부름을 도맡아 해야 했다. 여관방이 너무 추워 몰래 도망을 친 적도 있었다.

1960년대 초반 스카라극장 건너편 국제다방이나 모나미다방은 가수를 비롯한 음악관계자들의 집합소. 주목을 받는 가수였지만 경제사정이 곤궁했던 이미자도 이곳에서 일거리를 찾으며 레코드 회사를 기웃거려야 했다. 1964년 작곡가 백영호의 추천으로 ‘동백아가씨’를 취입할 기회를 맞이하며 음악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마련했다. 당시 35주 동안 인기차트 1위를 점령했던 동백아가씨의 대박 행진은 가요계 판도를 뒤바꾸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 해 겨울, 대학생들이 주고객층인 충무로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는 진귀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트로트를 천시했던 그곳의 젊은이들이 ‘동백아가씨’를 합창으로 불렀던 것. 장르를 넘어 그녀의 노래가 지닌 마력을 증명해주는 대목이다. 1965년 말 동백아가씨는 라이벌 레코드사들의 시기와 질투 속에 방송금지 처분이 내려졌지만 후속곡 ‘흑산도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등 무려 4곡이 연말 결산 톱 10곡에 선정되며 인기 퍼레이드는 거침없는 행진을 계속했다.

그녀는 파월장병이 손꼽는 초청 1순위 인기가수였다. 1965년 첫 베트남 파병 부대 위문 공연단에 뽑힌 이후 5년 동안 장병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녀의 애절한 노래 가락은 장병들의 눈물샘을 여지없이 자극했다. 이때의 공로로 1973년 방한한 베트남 티우 대통령은 그녀에게 최고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최초로 외국의 문화훈장을 수여받은 가수로 기록된 이미자는 이후 국내외에서 3번이나 훈장을 받은 가수로 등극했다.

이미자는 상복도 많았다. 1964년부터 1970년까지 MBC 10대 가수상의 단골 수상자였고 그중 3번은 가수왕에 등극했다. 당시 여자가수 지망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미자의 창법을 모델로 삼았다. 2002년 국내 가수로는 처음으로 남북 동시 생중계된 그녀의 ‘평양 특별공연’은 한민족 모두의 심금마저 울렸다.

그녀의 노래가 온 민족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타고난 실력에다 꾸준한 연습, 진지한 음악적 태도, 건실한 생활이 합체되었기 때문이다. “음악을 정식으로 배우지도 않았건만 신곡취입 때 작곡가가 피아노로 들려주는 곡을 처음 한번 들어보고 그 다음엔 스스로 불러보면 끝이었다. 그리곤 감정까지 적절하게 표현하며 바로 취입할 수 있는 유일한 가수”라는 작곡가 고봉산의 극찬은 데뷔 50주년을 맞은 그녀에게 어울리는 헌사일 것 같다.


/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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