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소설 안중근' 불멸] [19]

      입력 : 2009.01.22 03:21

      제2장 첫 출진(出陣)

      "따라오너라."

      중근이 나서자 안태훈이 앞장서며 말했다. 안태훈은 중근을 장정 대여섯 명이 돌아가며 파수를 보고 있는 큰사랑으로 데려갔다. 평소 중군막처럼 쓰여 참모격인 백숙부들과 막빈들이 나와 있었으나 그때는 밤이 늦어서인지 방이 비어 있었다. 안태훈은 그 방 한구석에 놓여 있는 큰 느티나무 궤짝에서 길쭉한 상자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어 보이며 말했다.

      "이왕 선봉에 설 것이라면 이 장총을 가져가거라. 해주 뱃길로 청국과 거래하는 송상(松商: 개성상인)을 시켜 천금을 주고 구한 양총(洋銃)이다. 영길리(英吉利: 영국)에서 만든 것이라 탄환이 많지 않은 것이 흠이나, 한 번 탄환을 재면 여덟 발까지 잇따라 쏠 수 있다고 하니 네 화승총에 비할 바 아닐 것이다."

      중근이 받아보니 길고 맵시 있게 빠진 총열(銃列)과 갈색으로 번들거리는 개머리판이 눈에 익은 것이었다. 언젠가 사냥을 나갔다 만난 적이 있는 양대인(洋大人: 서양 선교사)들 가운데 하나가 가지고 있던 총이었다. 한번도 쏘아본 적은 없지만 그 총으로라면 백발백중도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중근이 가슴 두근거리며 그 총을 받아 살피고 있는데 안태훈이 다시 손잡이가 달린 작은 상자 하나를 중근에게 밀어놓으며 말했다.
      "백이십 발들이 탄통이다. 이번 싸움에 쓸 수 있는 것은 이 한 통뿐이니 탄띠에 꿰어 한 발 한 발 아껴 쓰도록 해라."

      그리고 잠시 무언가를 망설이다가 다시 느티나무 궤짝 안에서 작고 납작한 상자 하나를 더 꺼내놓았다.

      "이것도 가져가거라. 미리견(美利堅: 미국)에서 근래 육혈포(六穴砲)를 개량해 내놓은 단총(短銃)이다. 작지만 열두 방까지 연발할 수 있다 하니 또한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안태훈의 목소리에 비로소 아비로서 아들을 걱정하는 자정(慈情)이 스며 있었다.
      일러스트=김지혁
      중근도 단총까지 받자 비로소 자신이 앞두고 있는 싸움의 치열성과 엄혹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후 그 단총은 중근이 이 땅을 떠날 때까지 언제나 몸 가까이 지니고 다니는 무기가 되었다.

      노제석을 영수로 삼은 포군 마흔 명은 삼경에 새벽밥을 지어먹고 닭이 울자 청계동을 나섰다. 말이 포군 마흔이지 실제로는 백 명이 넘는 부대였다. 여벌의 화승총에 화약과 탄환을 재워 주고 다가든 적의 보군(步軍)을 단병(短兵)으로 막아줄 부포(副砲)라고 불리는 장정 마흔이 그 포군들을 뒤따랐고, 거기에 여벌의 사제(私製) 화승총 마흔 자루와 화약 탄환 같은 군수품을 나누어진 짐꾼 스물이 덧붙었다. 그 짐꾼들은 모두 보부상이나 오랜 몰이꾼 노릇에 단련된 이들로, 이백 근을 지고도 산길을 평지처럼 걷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노제석과 함께 앞장서 그들 포군들을 이끌고 의려소를 떠나던 중근은 열려 있는 대문을 통해 집안을 흘깃 살펴보았다. 마당 건너 안채는 어둠 속에 잠들어 있었으나 자신이 신혼 방으로 쓰고 있는 건넌방에는 아직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려(亞麗)가 아직 깨어 있구나….'

      그런 짐작이 가자 중근은 다시 가슴이 축축하게 젖어오는 듯했다. 얼마 전 포군들에게 새벽밥을 지어 먹일 때 큰 부엌으로 나와 어머니를 거들어 드리면서 먼빛으로라도 한번 더 볼 수도 있었건만, 아려는 끝내 그쪽으로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저물 무렵 붉은 옷으로 갈아입고 출전 채비를 할 때 나눈 몇 마디로 마지막 작별을 대신하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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