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소설 안중근' 불멸] [17]

조선일보
입력 2009.01.20 03:11

제2장 첫 출진(出陣)

안태훈은 원래 중근이 책 읽기를 게을리 하고 무사(武事)에 빠져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작년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을 만난 뒤부터 겨우 마음을 바꾸었다.

박은식은 안태훈과 함께 해서(海西)의 양대 신동(神童)으로 불릴 만큼 글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는데, 그만큼 둘 사이의 교분도 두터웠다. 아직은 위정척사파의 선비로서 그 무렵 향시(鄕試)를 거쳐 능참봉(陵參奉) 노릇을 하고 있던 박은식은 청계동으로 오랜 벗인 안태훈을 찾아와 쌓인 회포를 풀면서 한편으로는 개화파로의 전향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때 담소를 나누는 중에 안태훈이 문득 맏아들 중근을 걱정하자 박은식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정계(定溪: 안태훈의 호)와 생각이 다르네. 맏이의 상무(尙武) 기풍은 북돋아 줄지언정 걱정할 일이 아니네."

"백암은 어찌 그렇게 생각하는가?"
일러스트 김지혁

"작금의 세계는 나라와 나라가 맞서고 종족이 저마다 따로 떨쳐 일어나니, 반드시 서로 다투고 겨루게 될 것인바, 그 승패와 존망은 나라와 종족의 강약에 따라 갈릴 것이네. 그 백성이 무강(武强)하고 용감 건투하면 패주(覇主)가 되고 사자나 범 노릇을 하게 될 것이며, 그 백성이 문약(文弱)하고 겁이 많아 죽음을 두려워하면 노예가 되고 양이나 돼지 신세가 되어 잡아먹힐 것이네. 인도가 2억의 무리를 거느리고도 작은 섬나라 영국에게 노예로 부림을 당하고 매일 채찍에 맞는 고초를 겪게 된 것은 그 백성이 문약하기 때문이네. 그러나 새이유아(塞耳維亞: 세르비아)가 겨우 백만의 인구로 능히 강대한 돌궐(突厥: 터키)을 쳐부수고 독립의 기치를 휘날린 것은 그 백성이 무강하기 때문이네.

우리나라 역사로 보면 옛날 고구려가 졸본(卒本)의 한 부락에서 궐기하여 여러 곳을 정복한 뒤에 동쪽을 응시하여 패업을 빛내고 7백년을 이어간 것은 바로 상무의 효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조선조에 이르러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낮추었기 때문에 조정의 높은 벼슬아치들은 말도 제대로 탈 줄 몰랐고, 군사에 관한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도 않았네. 무반을 업신여겨 사대부(士大夫)로 쳐주지도 않았고, 날마다 태평세월이라고 속여 군주에게 아첨하였으며, 제 권세만 키워 백성들을 학대할 뿐이었네. 백성들의 본보기가 될 만한 자들도 모두 송학(宋學: 주자학)의 찌꺼기에 취해 언론을 독단하며, 일하여 이룩한 공(事功)은 속된 학술로 몰아붙이고 무예는 천한 기술이라 배척하여 상무의 기풍을 헐뜯고 억눌렀네. 백성들의 기운을 쇠약하게 만들었으며, 나라 문을 닫아걸고 졸면서 스스로 교만하여 편안하다 여겼네.

이렇게 하고 망하지 않을 나라와 종족이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온 세상에서 약육강식의 참극이 속출되는 대변동의 시대라 열강(列强)들이 호시탐탐 날마다 약소국을 침략하고 약한 종족을 박멸하는 짓을 마땅히 해야 할 책무로 여기며 앞 다투는 오늘임에랴! 다시 말하네만, 맏이의 일은 북돋아 줄지언정 걱정할 일은 결코 아니네. 앞으로 이 나라 이 백성 사이에서 몸을 일으켜 큰일을 이뤄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상무의 지사(志士)일 것이네."

그런 박은식의 목소리에는 오래 위정척사의 고집에 갇혀 있다가 이제 막 개화파의 걸음마를 시작한 유생(儒生)의 결기까지 서려 있었다. 그로부터 몇 해 안 돼 박은식은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먼저 애국 계몽운동에 몸을 던지는데, 뒷날에는 이승만에 이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고, 한때는 창해노방실(滄海老舫室)이란 필명으로 몸소 중근의 전기를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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