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문갑식의 하드보일드] "70까지 칼잡이로 살겁니다"

조선일보
  • 문갑식
    입력 2009.01.10 03:19 | 수정 2009.01.10 15:21

    '肝이식 최고 권위' 서울아산병원 이승규 교수

    1953년 겨울 부산역 앞에서 큰불이 났다. 그 불로 일대 상가(商街) 수십 채가 잿더미가 됐다. 네 살 난 소년 이승규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점포도 그 안에 있었다. 소년의 가족은 졸지에 정부가 마련해준 텐트촌(村)으로 나앉게 됐다. 화(禍)는 홀로 오지 않는다는 말은 이럴 때 꼭 들어맞는다.

    이듬해 소년의 얼굴이 갑자기 붓기 시작했다. 복수(腹水)가 차올라 배가 맹꽁이처럼 부풀어올랐다. 심장을 싸고 있는 심낭(心囊)이 쭈그러들면서 심장 박동을 방해하는'협착성 심낭염'이라는 질병이었다. 의사는 "아이 목숨을 살리려면 미국이나 일본의 큰 병원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승규 교수가 간 이식 수술을 직접 집도하고 있다. 수술을 하기 앞서 이 교수는 수술복을 입고 눈에 3.5배 확대경 을 쓴다. 마스크는 내쉬는 숨에 안경알이 뿌옇게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윗부분을 조인다. /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소년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을 때 그의 삼촌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파친코업을 하던 삼촌이 "일본 도쿄대(東京大)병원으로 오라"며 은혜를 갚은 것이다. 1955년 소년은 이름 모르는 한 일본인 아저씨와 함께 1주일 간격으로 수술대에 올랐다.

    "저보다 1주일 먼저 수술한 그 분은 결국 사망했어요. 무등도 태워주고 했었는데…. 제가 일본에서 협착성 심낭염 수술에 성공한 첫 환자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지요. 중환자실에서 한 달, 입원실에서 6개월, 다시 5개월 동안을 통원하다 1년 만에 귀국했습니다."

    그 소년이 지금 세계 최고의 간 이식 수술 전문가가 된 이승규(李承奎·60) 서울아산병원 외과 교수다. 1992년 처음 간 이식 수술을 한 그는 99년 연간 간 이식 수술 100건을 돌파했고 2004년 200건을 넘겼다. 작년에 그는 326차례나 간 이식 수술을 해 자기 기록(320건·2007년)을 스스로 깨버렸다.

    세계 최고가 된 지금도 그는 집보다 병원에 더 머물며 세계의 간 이식 수술사(史)를 고쳐 쓰고 있다. 지난 크리스마스도, 12월31일 밤에도 그는 수술실에 있었다. 그런 그를 보기 위해 세계의 내로라하는 외과의들이 1년 내내 서울아산병원으로 몰려들고 있다.

    ―지금까지 몇 회나 간 이식 수술을 한 겁니까.

    "작년 말까지 2175회 했습니다. 처음에는 많지 않았어요. 92년 3건, 93년 4건, 95년 5건 정도였어요. 99년 100회를 넘었지요. 그 해 한 번도 앓지 않던 몸살이 나 포도당 주사를 처음 맞아봤습니다. 연간 200회를 넘긴 건 2004년입니다. 300회는 2007년에 넘겼고요. 지금보다는 처음에 많이 힘들었지요. 어디 앉기만 하면 쓰러져 잠들기 일쑤였어요."

    ―1992년만 해도 간 이식 수술이 잘 알려지지 않았지요?

    "1986년 초 미국 하버드대로 1년간 연수를 갔습니다. 스승인 민병철(閔丙哲·전 서울아산병원장) 선생님이 소개해준 의사에게 갔는데 간·담도 암 수술 장면을 보고 실망했어요. 생각했던 것보다 수준이 낮았거든요. '1년을 어떻게 보내나' 하고 고민하다 간·담도보다 혈관수술을 주로 구경했는데 그 미국 교수가 눈치를 챘는지 다른 병원으로 보내줬어요. 기분이 나빴을 법도 한데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보스턴에 하버드대 부속 병원이 여러 곳 있는데 그 중 한 곳에서 간 이식 수술을 봤지요."

    ―86년에 처음 간 이식 수술을 보고 5년 뒤에야 본격적으로 간 이식 수술을 공부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87년 11월에 귀국해 89년 2월까지 민 선생님을 따라 고대 구로병원에서 근무했어요. 89년 3월 민 선생님이 아산병원으로 옮길 때 따라왔지요. 그 과정에서 전공이 몇 번 바뀌었지요. 처음에는 대장항문 쪽을 주로 하다 90년 여름에 미국 신시내티로 1주일 동안 출장 가 복강경 수술 장면을 처음 보고 돌아와서 민 선생님께 '홈런감입니다'라고 보고했어요. 그 후 복강경 수술을 많이 했는데 민 선생님이 90년 말에 간 이식 수술을 공부해 보라고 권유하더군요."

    ―세계 최고의 간 이식 수술 전문가가 된 이면에 개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991년부터 1년 동안 매주 토요일 오후마다 동물실험실에서 실습을 했어요. 1년에 개 100마리가량을 썼지요. 당시 개값이 꽤 비싸서 한 번 실습할 때마다 200만원가량이 들었습니다."

    ―왜 개를 씁니까.

    "개가 터프해 보이지만 인간보다 훨씬 약합니다. 혈압이 조금만 바뀌어도 금세 심장마비가 오지요. 개보다 사람이 훨씬 강해요. 그래서 개를 살리면 사람은 100% 살릴 수 있다는 말이 있지요. 돼지도 괜찮지만 사육하기가 힘들어요. 두 번쯤 하다 그만뒀습니다."

    ―개들의 생존율은 어느 정도였나요.

    "처음 두세 달은 100% 다 죽었습니다. 그 이후 생존율이 70%로 올라갔습니다."

    ―간 이식 수술은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지요.

    "건강한 사람에게서 간을 떼 환자에게 이식하는 거니까요. 신장은 2시간 반에서 3시간, 심장은 길어야 5시간 걸리지요. 간 이식 수술은 평균 12시간 정도 걸립니다. 1대1 간 이식은 아침 8시 반에 시작해 오후 7~8시에 끝나고 2대1 간 이식은 오전 8시 반에 시작해 다음날 새벽 5시까지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랜 시간을 버티려면 집중력이 대단해야겠군요.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경우도 있고 팝송을 틀어놓기도 하지요. 수술의 하이라이트는 전체 시간의 4분의 1에서 3분의 1 정도입니다. 수술도 중요하지만 수술 전에 CT나 MRI를 보고 어떻게 수술 플랜을 짜느냐도 중요합니다. 수술 전에 회의를 자주 합니다."

    ―숙달된 전문가라도 수술 도중 깜빡 할 때가 있지 않나요.

    "저는 그런 정도는 아니지만, 수술할 때 팀원들에게 자주 물어봐야지요. '내가 잘못한 거 없느냐' '안 한 거 없느냐' 하는 식으로 체크합니다. 수술실 곳곳에 표어도 붙여놓습니다. 핵심적인 것들이지요. 아무래도 생명을 다루는 일이니까요."

    ―하루 종일 서있는 게 힘들지 않습니까.

    "피가 아래로 몰려서 다리에 무리가 많이 갑니다. 정체성 피부염 증상도 있어요. 식당에서도 좌식(坐式) 식탁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을 버티려면 평소 운동을 많이 해야 해요. 힘 빠지고 체력이 떨어지면 머릿속에 든 게 아무리 많아도 소용 없어요. 1주일에 4회 정도 조깅도 하고 근력운동도 하지요. 한 번에 100회 정도 팔굽혀펴기도 하고요."

    ―먹는 것도 잘 먹어야겠지요.

    "1주일에 4회 정도 삼겹살이나 닭고기를 먹지요. 개고기도 먹었는데, 어느 날 개고기를 먹고 들어갔는데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제게서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기겁을 하고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끊었습니다."

    ―17년째 거의 매일 간을 봤으니 간 천엽이나 간전은 보기도 싫겠네요.

    "다 잘 먹는데요?"

    미국 ABC방송이 지난달 23일 이승규 교수의 수술 팀에 대한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그들은 그 프로그램에서 95%의 수술성공률을 자랑하는 아산병원 간 이식 수술팀을 '한국의 드림팀'이라 부르며 "그들은 가족처럼 끈끈하고 헌신적인 팀워크를 가졌다"고 보도했다.

    이승규 교수의 간 이식 수술팀은 이 교수와 겸임교수 4명, 병원 임상교수 4명, 전공의를 마치고 교수가 되는 중간 단계인 '펠로' 6명과 간호사들로 구성돼 있다. 그 중 황신 교수는 84년부터, 안철수 교수는 86년부터 그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가 배출한 제자들이 울산, 대구, 부산, 인천, 광주, 익산에서 간 이식 수술을 하고 있다. 한국의 간 이식 수술은 '이승규 사단(師團)'이 다 한다는 말은 이래서 생긴 것이다. 이 교수는 제자들이 정착할 때까지 필요하다는 말만 들으면 총알택시를 타고 가 수술을 해주기도 한다.

    ―의사 사회는 위계질서가 남다른 것 같습니다.

    "그런 편이지요. 저도 민병철 선생님이 설립한 종로구 관철동 신영(新英)병원에 따라 갔다가 고대 구로병원, 서울아산병원까지 왔으니까요."

    ―TV 드라마나 소설에서 보면 기합도 단단히 주는 것처럼 묘사돼있는데 사실입니까.

    "서울대 의대 출신들은 욕을 하고 고함은 지르지만 때리지는 않아요. 제가 레지던트 때 세브란스 병원에 교환학생으로 간 적이 있는데 세브란스는 '조인트'를 까더군요. 처음 보고 놀란 기억이 납니다."

    ―왜 욕을 하고 고함을 지릅니까.

    "욕을 하고 고함을 치면 잠시 긴장하잖아요. 수술할 때 긴장을 유지하는 데는 최고지요. 한번 거기 맛을 들이면 끊을 수가 없습니다."

    ―민병철 선생께 배울 때도 욕을 많이 먹었습니까.

    "많이 먹었지요. 주로 '너처럼 수술 못하는 놈은 처음 봤다' '왜 그렇게 머리가 나쁘냐' 이런 식이지요. 그걸 듣고 우는 동료들도 있지만 저는 둔해서 그런지 운 적은 없어요. 지내놓고 보니 못된 시어머니 밑에 있던 며느리가 나중에 더 못된 시어머니가 된다는 말 그대로가 됐습니다."

    ―장시간 수술을 하면 집에 못 들어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겠지요. 젊은 의사부부들 간에 가정 트러블은 없나요.

    "제가 1년에 한 번은 꼭 아이들을 포함해 전 가족을 호텔로 불러요. 넓은 방을 잡아놓고 뷔페 식으로 식사한 뒤 장기자랑하고 선물을 나눠주는 모임인데요, 몇 년 전에 부인들에게 '이야기할 거 있으면 해보라'고 했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어요."

    ―뭐라고 하던가요.

    "남편들이 병원에서 잠을 자기 일쑤고 2, 3일에 한 번 집에 들어갈까 말까 하니까 '제 남편을 돌려주세요' '너무해요'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누군가 먼저 그런 말을 하니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와 무척 당황스러웠어요. 그 다음부터는 부인들에게 발언 기회를 안 주지요."

    ―이 교수의 부인(장유순·58)은 투정을 부린 적이 없나요.

    "집에 들어가자마자 쓰러져 자는데 옆에서 울고 있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럴 때는 다음 번에 빨리 들어오겠다고 할 수밖에 없잖아요. 지금은 오히려 젊은 의사들 부인들을 잘 설득하고 다독거리는 역할을 집사람이 합니다. 여러 조언도 해주고요."

    ―천생연분인 모양입니다.

    "아산병원 정신과 이철 교수 부인과 제 집사람이 친구예요. 이 교수는 저와 고교, 대학 동기인데 어느 날 작정하고 절 불러내 미팅을 시킨 겁니다. 만난 지 2주 만에 프러포즈했지요.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대학에 있게 된 게 다 아내 덕분입니다."

    ―그건 무슨 이야기입니까.

    "민 선생님 따라서 고대로 가면서 서울대 교수가 되겠다는 꿈이 사라졌지요. 그때 개업을 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돈 많이 버는 걸 좋아할 텐데 집사람은 '당신은 병원 하면 망할 스타일이니 학교에 남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지금은 집사람이 '그때 내 말 잘 듣지 않았느냐'고 큰소리를 쳐요. 그런 조언을 해준 게 고맙지요."

    ―이 교수의 수술팀이 오랜 세월 고되게 일하면서도 조직력을 유지하는 걸 보면 외과의들에게는 특유의 자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외과의를 부를 때 두 가지 별명이 있지요. 하나가 '이발사', 하나가 '칼잡이'라는 겁니다. 이발사는 옛날에는 외과수술을 할 때 이발사가 했기 때문에 생긴 별명인데 들으면 기분 나쁘고요, 칼잡이라는 별명은 명예스러운 겁니다. 최고의 전문가라는 뜻이지요."

    ―요즘 젊은 의대생들은 힘들이지 않고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과(科)를 택하는 게 유행이 되지 않았습니까.

    "외과는 드라마틱하지요. 혼수상태에 빠져 호흡도 곤란하고 소변도 못 보고 배에 복수가 차, 폐까지 잠기던 사람이 의식을 되찾고 살아나는 겁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중에는 40세까지 열심히 돈 벌어놓고 나머지는 취미생활을 하겠다는 사람이 많은데 외과의는 본인이 하고 싶은 것에 흥미와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직업입니다. 저희는 의사뿐 아니라 간호사들도 자부심이 대단해요. 그래서인지 성격도, 인상도 전부 비슷비슷합니다."

    ―아직도 개업의 꿈이 남아있지 않나요?

    "개업했으면 망했을 겁니다."

    서울대 의대 출신들에게 서울대병원은 고향 같은 존재라고 한다. 이 교수도 그 꿈이 무산된 것을 아쉬워하는 듯했다. 스승 민병철 선생님이 "언젠가 서울대로 보내주겠다"고 한 약속을 어긴 것이나 서울대 소아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회한 같은 게 남아있는 듯했다. 공교롭게도 서울대의 대표적인 의사 2명이 그에게 암 수술을 받으면서 서울대 의대와의 관계가 묘하게 됐다. 서울대 의대의 특강(特講)에 아직까지 그가 초청받지 못한 것을 두고 의료계에서는 "서울대 의대가 그때의 감정을 아직 풀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병원장을 지낸 한만청 교수가 서울대가 아닌 이 교수에게 간암 수술을 맡겼죠?

    "한 선생님이 간암 3기 후반쯤 됐어요.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어느 날 '면회 좀 오라'고 해요. 갔더니 '네게 수술을 맡기겠다'는 겁니다. 11년 전의 일입니다."

    ―그 분은 완치됐습니까.

    "지금도 잘 계시죠."

    ―한만청 교수 한 분 때문에 서울대에서 펄펄 뛰는 겁니까.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 주치의를 맡았던 고창순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분은 더 심각했어요. 간암 4기였으니까요. 왼쪽 부신(副腎)까지 암이 전이가 됐는데 13년 전 추석 때 '급하니 와달라'는 거예요. 의사들이 수술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는데 제가 수술을 했지요."

    ―그런 환자가 오면 겁이 나지 않나요.

    "민병철 선생과 고창순 선생님이 사돈 관계입니다. 민 선생은 얼마나 부담이 됐겠어요. 제게 '미국이나 일본으로 가시라고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서 제가 '자신 있습니다'라고 했어요. 그 분도 완치됐지요."
    이승규 교수는“나이가 오십이 넘으면 수술을 하지 않는 우리나라 외과의 나쁜 전통이 있다”며“나는 은퇴 직전까지 수술 을 하겠다”고 말했다. /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이 교수도 서울대 의대 출신인데 서울대병원에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섭섭하지는 않습니까.

    "저는 환자에게 의사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봅니다. 어떤 환자가 저를 믿지 못하면 미국이나 일본의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권유합니다. 믿지 못하는 데 어떻게 생명을 맡기겠습니까."

    ―항상 그렇게 환자들에게 단호합니까.

    "환자는 의사의 말 한마디에 좌우됩니다. 확신을 가지고 '당신의 상태로 봐서 이 수술이 제일 적합하다'고 권유해야지요. 이런저런 수술법이 있는데 어떤 걸 택하겠느냐는 의사도 있는데 그건 의사 자격이 없는 겁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과 물건 파는 건 다르잖아요."

    ―간 이식 수술의 대가가 된 것도 서울대로 못 간 것과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사실 제가 간 이식 수술을 본격적으로 배운 게 서울대 의대로 가겠다는 꿈이 좌절되면서부터입니다. 고대 의대에 있을 때 '무엇을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한 적이 있어요. 의사로서 평생을 버티려면 남들이 하지 못하는 걸 해야 하잖아요. 민 선생님의 권유도 있었지만 간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제가 1974년부터 78년까지 서울대에서 레지던트 할 때 간암 수술을 딱 한 번밖에 못 봤거든요."

    ―아직도 서울대 의대로 못 간 게 후회가 됩니까.

    "제가 서울대 의대로 갔으면 안주하고 말았을 겁니다. 고대로 가면서 도전하려는 열정 같은 게 생겼지요."

    ―칼잡이라는 별명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데 혹시 집에서 고기 같은 것 자를 때 솜씨를 발휘합니까.

    "어느 일식집에 갔는데 저를 초대한 분이 주방장에게 '이 분이 한국 최고의 칼잡이'라고 하니, 그 주방장이 생선 써는 시범을 보이더군요. 의사는 칼을 그렇게 쓰는 게 아니라 정교하게 수술하는 겁니다. 메스는 개복할 때 한 번 쓰는 정도입니다. 고기 써는 것과는 다르지요."

    ―간 이식 수술은 수술도 중요하지만 기증자를 찾는 일도 그에 못지 않다고 들었습니다만.

    "기증받고 환자가 잘 퇴원하면 가족 간의 유대감이 말할 수 없이 끈끈해집니다. 흉터는 남지만 기증자들이 그렇게 만족해할 수가 없어요. 내가 우리 부모를 살렸다, 내 아내를 살렸다, 내 자식을 살렸다는 만족감이지요."

    ―황당한 사례도 있겠지요.

    "남편이 간 이식 수술을 받는데 그 간을 아내의 옛 남자친구가 기증한 적이 있었어요. 간을 기증하려면 가족의 동의가 있어야 되니 두 부부가 이상하게 만난 셈이죠. 네 사람 얼굴이 전부 착하게 생겼더군요. 선(善)하다는 게 바로 저런 사람들을 가리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과 딸 중에 누가 더 간을 잘 기증합니까.

    "아들은 기증하려 해도 아내가 반대하면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반대로 딸은 남편이 반대해도 기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술에 기증자 찾기에, 스트레스가 대단할 텐데 어떻게 풉니까.

    "담배는 안 피우고 술은 젊었을 때부터 어울려보려고 소주도 반 병씩 마셔봤지만 몸에 안 맞더군요. 제가 성격이 순해서 운동하며 땀 흘리고 한숨 자고 나면 그냥 잘 넘어가져요."

    인터뷰 도중 이승규 교수는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 기자와 사진기자도 옷을 모두 갈아입고 수술실로 따라 들어갔다. 그곳에는 배 윗부분 근육을 모두 위로 까뒤집은 환자가 마취상태로 간 이식 수술을 받고 있었다. 흥건히 배어 나온 피를 닦아낸 거즈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이 교수는 손을 씻고 수술가운으로 갈아입은 뒤 3.5배 확대경을 쓰고 수술대 위에 섰다. 그 모습이 사이보그 전사(戰士)같아 보였지만 그는 자기 자리로 다시 돌아온 듯 편안한 표정으로 수술을 진행했다. 1시간 동안 본 이 교수팀은 정교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척척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언제까지 수술을 할 겁니까.

    "우리나라 외과에는 나쁜 전통이 있어요. 나이가 오십만 넘으면 수술을 하지 않는 거지요. 제가 미국에서 나이 칠십이 넘어 머리가 허연 영감이 수술하는 장면을 보고 감명을 받았어요. 수술은 경험이 중요합니다. 일본에서도 의사들은 은퇴하기 직전까지 메스를 놓지 않지요. 저는 70세까지는 이 일을 할 겁니다."

    ―외과 수술 예찬론자 같은 말씀입니다.

    "저희가 하는 수술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답답할 정도로 진도가 느려 보이지만 전문가가 보기에는 정말 섬세하고 멋있는 수술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 겁니다. 그만큼 굉장한 자부심을 의사도 간호사들도 느끼지요."

    ―자제(1남1녀)들에게 이 교수의 길을 잇게 할 겁니까.

    "아들은 회사에 다니고요, 딸이 이화여대 의대에 다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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