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chosun]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의 특별기고] 동방무례지국(東方無禮之國)

  • 김대중 고문
    입력 2009.01.02 17:22 | 수정 2009.01.06 09:56

    <이 기사는 weekly chosun 2038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김대중 고문

    중국 공자(孔子)의 7대손인 공빈(孔斌)이 약 2300년 전에 쓴 동이열전(東夷列傳)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먼 옛날부터 동쪽에 동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에 단군이라는 훌륭한 임금이 태어나니 아홉 개 부족이 그를 받들어 임금으로 모셨다. 일찍이 그 나라에 자부선인(紫府仙人)이라는 도통한 학자가 있었는데 중국의 황제(黃帝·중국의 시조)가 (그에게서) 글을 배우고 내황문(內皇文)을 받아 가지고 돌아와 염제(炎帝) 대신 임금이 되어 백성들에게 생활방법을 가르쳤다. 그 나라 사람인 순(舜)이 중국에 와서 요(堯)임금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어 백성들에게 윤리와 도덕을 가르쳤다.(중략)

    그 나라는 비록 크지만 남의 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그 나라의 군대는 비록 강했지만 남의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풍속이 순후(純厚)해서 길을 가던 이들이 서로 양보하고, 음식을 먹는 이들이 먹을 것을 서로 미루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 섞이지 않으니 이 나라야말로 동쪽에 있는 예의 바른 군자의 나라(東方禮義之國)가 아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나의 선부자(先府子·할아버지) 공자께서 “그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시면서 “누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를 가리켜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일컬은 말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백성에게 생활방법과 윤리·도덕을 가르친 사람이 모두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길을 양보하고 먹을 것을 나누며 남녀가 유별한, 이른바 깨친 민족이라는 지적에 뿌듯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 같으면 태초에 우리 민족에게 생활과 윤리·도덕의 지혜를 가르친 사람이 외국인이었다는 것을 거리낌없이 지적할 수 있었을까 하는 자괴감도 든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지금 그런 ‘예의를 아는 사람들’의 후손인가 하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주변에서 겪는 상황에 비추어 보면 공빈의 글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쓴 황당한 칭찬이거나 사실을 잘못 알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훌륭했던 우리 조상의 덕목이 역사의 세파에 씻기면서 예의가 부족한 ‘다른 민족’을 만들어낸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예의(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생활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고사하고 무례와 뻔뻔함과 폭력과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경우를 너무도 자주 겪고 있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가 보면 길을 ‘양보’하기는커녕 서로 먼저 가려고 어깨가 부딪치고 신발이 밟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점심시간 좁은 길에서 팔짱을 끼고 걷는 서너 명의 직장여성들 때문에 마주 오는 사람은 옆으로 비켜설 수밖에 없다. 단체로 움직이는 학생들과 마주치면 그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다른 행인들은 기다려야 한다. 그들은 다른 행인에 조그만큼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 무례인지조차 모르는 것 같다.

    건물을 드나들 때 문을 열면서 뒷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드물다. 무심코 앞사람을 쫓아가다가는 닫히는 육중한 문에 코를 다치기 십상이다. 내가 문을 열었을 때 살짝 끼어들어 먼저 새치기하듯 들어서는 젊은이도 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안에 있는 사람이 내리기도 전에 올라타는 사람도 있다. 자기가 먼저 타려고 엘리베이터 문을 가로막다시피 서있는 것은 예사다. 전철역에서 문이 열릴 때도 마찬가지다. 내린 다음에 타도 늦지 않는데 먼저 타려고 밀고 들어오는 젊은이들, 아줌마들을 매일 보지 않는가.

    식당예절은 이제 누구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워지고 있다. 차례를 기다리고 목소리를 낮추는 사람은 병신 되기 일쑤다. 식탁 사이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양말 벗고 앉는 사람들, 의자에 신발 벗고 올라앉는 사람들, 소리소리 지르며 떠드는 사람들, 옆 테이블 사람의 등을 마구 건드리며 나다니는 사람들 등등 다른 손님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음식이 늦거나 잘못 조리돼 항의하면 “바쁜 시간이니 이해해달라”는 주인의 대답에 어이가 없다. 누가 식당주인 이해하려고 음식점에 가나?

    자동차 예절은 예절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쑥스러울 정도로 난장판이다. 끼어들기, 마구 추월하기, 좌회전 차선에서 직진하기, 사소한 접촉사고를 놓고 복잡한 출퇴근거리에서 차 세워놓고 언쟁하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치명적인 중앙선 넘기, 신호 무시하기, 건널목 그냥 지나치기, 음주운전 등 남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불법행위도 이제는 경찰조차 별로 개의치 않는 일상사가 되고 있다. (카메라만 설치해서 벌금 벌면 다인가?)

    인도에 세워놓은 차들은 ‘예의’를 모른다. 보행자가 간신히라도 피해 다닐 수 있는 대로변 인도는 좀 나은 형편이다. 좁은 골목길에 세워놓는 차들은 ‘예의’의 범주를 떠나 화재, 119 등 ‘비상시’를 가로막고 있다. 그나마 ‘연락처 쪽지’를 붙인 차들은 가뭄에 콩나기다. 결혼청첩장도 심부름시켜 돌리는 세상이다. 공사중의 경고 표지판 내용도 명령형이다. ‘줄서기’라는 것이 언제 우리에게 있기는 있었나? 미국 여행 때 10여분 줄 서서 겨우 표를 샀는데 잠깐 물어볼 것이 있어 뒤돌아섰더니 줄 서 있던 사람들이 맨 뒤로 다시 가라고 해 머쓱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무엇보다 예의없음을 통탄해 마지않을 것은 욕설과 폭력이다. 인터넷과 국회가 그 대표적 집결지(?)다. 인터넷 댓글에 들어가보면 “아 그런 욕도 있었나”하고 배울 정도로 온갖 욕설과 상소리가 넘나든다. 욕 중에도 자기가 안 보인다고 해서 지껄이는 욕이 가장 저질이다. 요즘의 우리 국회는 욕설과 폭력이 합동으로, 입체적으로 난무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반예의지소(反禮義之所)다. 그들이 ‘선량(選良)’이라니, 그래서 그들의 무례는 더욱 돋보인다.

    이런 사회적 무례의 범람과 공동체로서의 무질서는 우리가 아무리 잘 먹고 잘 산다 해도 우리의 삶의 질을 저질로 만든다. 나 아닌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이 이 땅에 발을 딛고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를 배려하고 양보하며 내가 아프면 다른 사람도 아플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고맙다’ ‘미안하다’ 하는 마음가짐을 늘 지니도록 하는 교육이 절실하다. 핵심은 교육이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예의를 가르치고 예의를 그르쳤을 때 그에 상응하는 불이익을 받도록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이웃들로부터 냉대 당할 것이며 마침내는 소외 당할 것이다. 정치지도자, 사회 각계의 지도층, 교육자, 시민단체가 모두 나서서 ‘예의 되찾기 운동’을 촉구하고 나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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