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아닌 척했지만 난 알 수 있었어! 분명히 그건 너의 목소리였거든. 나는 정확히 기억해. 오후 다섯 시가 넘었을 때였지. 나와 동생은 퇴근하고 돌아오실 부모님을 기다리던 중이었어.
동생은 놀이터에 버려진 장난감 자동차를 주워와 거실에서 놀고 있었고 나는 배가 고파 하나 남아 있던 라면을 끓이던 중이었어. 물이 팔팔 끓어오르자 수프를 넣었어. 그리고 면을 막 넣은 그때 우리 집 초인종이 울렸지! 그러더니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외치더군.
"경찰서에서 왔습니다."
그때 내 동생은 깜짝 놀라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바닥에 떨어뜨렸어.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난 거실에 있던 화분이 깨진 줄 알았지 뭐야. 물론 나도 경찰서에서 왔다는 말에 너무 놀랐어! 심장이 두근대는 소리가 라면 끓는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릴 정도였으니까.
겨우 가슴을 진정시키고 현관문 앞으로 갔어. 슬며시 문을 열고 조심스레 내다보는데 노랑 꽁지머리를 한 남자아이가 아파트 복도 계단을 막 뛰어 내려가지 뭐야. 순간 난 알았지. 그것이 너의 벨 장난이었던 것을.
경찰이 우리 집에 오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난 너의 모습을 봤다고 동생에게 말해 주었어. 동생은 씩씩대며 매우 분해했지. 넌 평소에도 우리를 괴롭히던 애였으니까.
항상 네가 집에 있는 시간을 알 정도로 넌 집에만 오면 쿵쿵대며 온 집안을 뛰어다녔어. 네가 현관에 들어서서 안방으로 가는지, 베란다로 가는지 아니면 화장실에 가는지조차 알 정도였거든.
소리도 엄청 질렀지. 무슨 시를 외우는지 동화책을 읽는지. 게다가 밤늦게 노래까지 부르더군. 네 엉망진창인 노랫소리가 다 들렸어.
밤늦게 피곤해 들어오신 엄마, 아빠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지. 너는 밤 10시가 넘도록 잠을 자지 않았어. 어젯밤에도 그랬지. 계속 들려오는 너의 뜀박질 소리에 우리 엄마는 너의 집으로 인터폰을 하셨어.
"죄송하지만 아이 좀 뛰지 않게 해 주시겠어요. 좀 참아보려고 했지만 위에서 계속 쿵쿵대니까 머리가 아파서 잠을 자지 못하겠어요."
내방에서 그 소리를 듣고 난 너무 통쾌했어. 엄마와 우리 가족 모두 참을 만큼 참았던 거였거든. 너는 아마 그 꽁지머리가 바짝 설 정도로 너의 엄마에게 혼났겠지.
그런데 어제의 복수를 이런 식으로 하는 거니? 치사하게 남의 집 벨을 누르고 도망가기야? 그것도 경찰서라고 거짓말을 해 가면서?
난 너를 찾아 혼내주기로 마음먹었어. 동생은 이미 주워온 장난감을 장롱 위로 넘겨버렸고 난 하나 남았던 라면을 우동처럼 불려버렸으니까 말이야. 사실 너 땜에 입맛도 다 떨어졌다구.
내가 널 찾아 혼내준다고 하자 동생도 따라나섰어. 동생은 총알도 들어 있지 않은 장난감 총을 가방에 챙겼지. 우리들은 손을 잡고 급히 집을 나섰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까 하다가 계단으로 내려갔어. 네가 혹시 어디 숨어서 낄낄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층마다 복도를 끝까지 뒤지며 모두 샅샅이 찾아봤어. 10층부터 내려가는 일이 쉽지는 않더군. 너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어. 우린 쉼터를 지나 우선 작은 놀이터로 향했지. 그곳은 네가 자주 놀던 곳이잖아.
아파트 모퉁이를 돌아서니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는 여자아이들이 보였어. 그래서 우리는 그 아이들에게 너를 보았냐고 물었지.
"너희들 혹시 노랑 꽁지머리를 한 여덟 살 남자아이를 보지 못했니?"
"언니, 우리는 그네만 탔어요."
안타깝게도 그 아이들은 그네를 빼앗길까 봐 타는 데 열중하느라 너를 보지 못했다고 하더군. 사실 아파트 계단에서 시간을 너무 지체했어. 네가 도망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으니까. 결국 우리는 다시 큰 놀이터로 향했지.
그래 맞아! 내 생각이 맞았어. 큰 놀이터로 들어서려는데 너의 자전거가 보였던 거야. 어떻게 너의 자전거를 아느냐고? 내가 왜 모르겠니. 기어 자전거 샀다고 내 동생 앞에서 으스대던 너의 모습을 봤었는데.
하지만 자전거 옆에 있어야 할 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 나는 동생과 자전거를 붙들고 너를 찾았어. 동생은 벨 장난의 범인을 잡은 듯 우쭐해했지. 가방에서 총을 꺼내 몇 번 겨눠보고는 '탕, 탕'하고 소리를 쳤어.
"뭐야! 왜 내 자전거를 괴롭히는데?"
때마침 네가 나타났어. 역시 범인은 결정적일 때 나타나는 법이거든. 그런데 네 손에는 투명한 음료수 병이 쥐어져 있었고 그 음료수 병에는 나방 같은 것이 들어 있었어.
"네가 우리 집 벨 누르고 도망갔지?"
난 아주 당당하게 이야기했어. 동생은 너에게로 장난감 총의 총부리를 향했지.
"아니거든, 난 지금까지 이거 잡으러 다녔거든."
넌 내 말에 주눅 들지 않고 대답했어.
"내가 너 벨 누르고 도망가는 거 봤어."
"내가 누나네 집 벨을 눌렀다는 증거 있어?"
"증거?"
나는 갑자기 당황했지.
"너 같은 꽁지머리를 한 아이가 이 아파트에 또 있니? 내가 너 도망가는 거 봤다니까!"
"그건 누나가 잘못 본거야. 나라면 왜 그 자리서 잡지 그랬어?"
다부진 표정으로 넌 당당하게 내 말을 받아쳤어. 게다가 옆에 있던 동생도 도움이 되지 않았지.
"형, 거기 잡은 거 뭐야?"
동생은 벨 장난 범인보다 네 손에 든 것을 더 궁금해했어.
"나비야?"
"아니, 중국 매미야. 이게 우리나라 나무를 괴롭힌대."
동생은 너의 음료수병에 든 빨간 날개를 가진 중국 매미를 아예 쭈그리고 앉아 쳐다보았지.
"야, 지금 뭐 하는 거야? 빨리 일어나."
"왜, 이것 좀 보게."
난 얼른 동생을 일으켜 세웠어.
"어쨌든 넌 다음부터 우리 집 벨 누르고 도망가다 걸리면 경비 아저씨한테 이를 줄 알아."
너에게 소리는 쳤지만 왠지 범인을 잡고도 그냥 놓아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어. 내가 생각했던 건 이게 아닌데. 너한테 또 한번 당했다는 생각이 들더군.
더군다나 당황스럽게도 동생은 너랑 놀고 들어오겠다고 어깃장을 부리는 거야. 그런 동생을 집에서 나갈 때와는 다르게 질질 끌고 돌아와야 했지.
그렇게 집에 와보니 더욱 화가 났어. 배는 고픈데 라면은 먹지 못해 다 버려야 했고 동생은 장난감 자동차를 찾겠다며 서랍장 위로 올려 달라고 떼를 부렸어.
그것도 손잡이가 빠져 버린 잠자리채를 들고서 말이야. 난 동생의 엉덩이를 몇 대 때려 주었어. 그리고 소리를 쳤지.
"엄마 오면 찾아달라고 해!"
이 모든 사건의 책임은 다 너 때문이야. 알겠니? 너의 장난으로 라면도 못 먹었고 장난감을 잃어버린 동생도 때렸어.
"너희들 왜 싸우니? 동생 우는 소리가 엘리베이터까지 들린다."
때마침 엄마가 퇴근하고 집 안으로 들어오셨어. 그러시더니 뭔가를 내미셨지.
"이거 누구 꺼니? 집 앞에 떨어져 있던데?"
그래, 그게 뭐였는지 알겠니? 그건 말이지. 바로, 그건! 나무젓가락으로 만들어진 너의 고무줄 총이었어. 네 삼촌이 만들어 줬다고 자랑하던 그 총 말이야. 우리가 정신이 없어 집 앞에 떨어져 있던 고무줄 총을 보지 못했다니.
너는 매미를 잡기 위해 고무줄 총을 들고 나왔었던 거야. 그리고는 우리 집 벨을 누르고선 경찰서에서 왔다며 소리를 쳤지. 넌 그렇게 장난을 하고는 급히 도망쳤어. 그러다 고무줄 총을 우리 집 앞에 놓고 간 거야. 이만하면 어때! 증거가 충분해졌겠지.
난 고무줄 총의 주인을 찾아주겠다며 엄마에게 말하고는 우리 집을 나왔어. 복도를 돌아 11층으로 계단을 올라갔지. 그리고는 너의 집을 향해 가는데 네 자전거가 보이더군.
네가 집에 돌아온 걸 확인한 거지. 그런데 생각 외로 네 목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조용하더라. 자전거만 놓고 나갔나 싶었어. 그래도 혹시나 해서 너의 집 벨을 막 누르려고 하는데 저쪽에서 땡 하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어. 난 잠시 주춤해서 물러났지.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가 나왔는지 알아? 바로 너의 엄마와 아빠였어! 그런데 너의 아빠는 너의 엄마의 어깨를 부축하며 걸어오셨어.
그러고 보니 너의 엄마의 표정이 종이인형처럼 창백한 거야. 기운도 하나 없어 보이고. 뭔가 슬픔이 가득한 얼굴이었어.
그때 난 동네 아줌마들이 했던 말이 생각났어. 아줌마들은 너의 엄마에게 우울증이란 병이 있다고 했었어.
그런데 우울증이 그렇게 슬픔이 가득한 병이니? 걸음을 못 걸을 정도로? 너의 엄마는 항상 누워만 있든지 잠을 잔다고 했어.
잠시 후 너의 부모님이 초인종을 누르자 네가 뛰어나와 엄마를 반겨 집으로 들어가더군. 그때도 너의 엄마는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어. 표정도 변하지 않았고. 모두들 내가 그 복도에 서 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어.
잠시 후 문이 닫혀 버리자 조용하던 너의 집은 다시 소란스러워졌지. 너는 다시 뛰어다니고 노래도 부르고 소리도 질렀어. 복도에서 한동안 혼자 서 있던 나는 너의 집 앞에 고무줄 총을 조용히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왔어.
집에 돌아오니 우리 엄마가 말씀하셨지.
"또 시끄러워졌네. 그래도 당분간만 참자. 집에 오다 경비 아저씨한테 들으니 윗집 아줌마가 또 베란다로 뛰어내리려고 했대. 그래서 곧 일층 집으로 이사 간다더라!"
음, 잠시 머리가 아파 왔어. 네가 이사 가더라도 말이지……. 그래도, 그렇더라도 이번만이야. 이번에만 너를 그냥 용서해 줄게! 다음에 또 우리 집 벨을 누르고 도망가면 그때는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