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뜨거운 상징을 찾으며\1)

“수사는 역겨움을 불러일으키고, 구호는 시들게 마련이지만 뜨거운 상징은 비슷한 정황이 되풀이될 때마다 새로운 반응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반응은 한결같은 것이 아니고 거의 매번 다릅니다. 저는 바로 그것이 문학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2)

한국의 문학 비평을 읽는 희귀종들에게, 김현의 부재/존재는 ‘뜨거운 상징’의 형태로 현존하고 있다. 그를 추억하는 동료, 제자 문인들이 그의 텍스트 아래에 바친 무수한 언어적 헌화들의 더미에서 채취되는 더운 열기는, 그의 존재/부재가 불러일으켰던 뜨거운 반응의 도수를 증언한다. 그러면서도 김현의 비평은, 후속 세대의 의식을 무겁게 짓누르기보다는, 세대를 되풀이하여 획일화되지 않은 새로운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상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는 죽었으나 그의 죽음은 상징이 되어 여러 형태의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는 뜻에서, 김현은 “부재하는 현존이며, 현존하는 부재”\3)의 방식으로 지금도 존속한다.

김현의 부재/존재가 뜨거운 상징으로서 여전히 현재성을 지닐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많은 이들이 말하는 바처럼, 그의 비평 세계가 아우르고 있는 지식의 영토가 넓고, 각각의 평문이 보이고 있는 분석이 정확하고 밀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평에 담겨 있는 정보량과 분석의 정확성이 김현의 비평을 ‘뜨거운 상징’으로 전환시키는 충분조건이라고 하기에는 모종의 석연찮음이 게워지지 않는다. 박학다식함은 새로운 지식이 업데이트 되는 과정 속에서 그 강렬도(intesnsit s)가 옅어지기 마련이며, 분석 능력 그 자체는 분석 대상의 문학적·사회적 유통기한이 다할 때 신선도를 잃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김현 비평이 뒤집어쓰고 있는 지적 외투의 다채로움이나 비평 대상이 머금고 있는 아우라가 김현 비평의 생명력을 유지시켜주는 산소 호흡기는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 김현의 비평이 지금도 일부 독자를 충격하고 있다면, 그것은 김현 비평의 몸체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어떤 매혹 때문일 것이다. “비평을 그것 자체로 읽을 수 있는 위상에 올려놓은 처음이자 유일한 비평가”라는 한 시인의 추회(追懷)는 그 과장적 어사에도 불구하고 김현 비평의 몸체에 대해 비교적 적확한 지적을 담고 있는 셈이다. 이론적 지식이나 문학 작품이 아닌 ‘비평 그 자체’에 대한 자기-의식. 이는 김현 스스로가 “문학비평은 문학 비평이 문학 비평으로 남을 수 있게 싸워야 한다. 문학 비평이란 무엇일 수 있을까”\4)라고 발화하는 시점(時點)에 움트고 있었다.

그렇다면 김현 비평의 몸체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한 평론가는 이에 대해 “김현 문학의 순수 질량은 활동”\5)이라고 분석한 바 있는데, 이는 개별성으로서의 김현 비평의 몸체를 파악하는 데 유용한 실마리를 던져준다. 김현 비평의 질량이 활동이라는 것. 그것은 김현 비평의 몸체를 바탕하고 있는 형상(eidos)이 고정된 형태를 거부하는 끊임없는 움직임, 혹은 운동성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무슨 의미인가? 가령 김현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 변화의 씨앗 역시 옛 글들에 다 간직되어 있었다.\6)

이는 김현 비평이 초기와 후기 사이에서 점진적으로 변화의 곡선을 타고 변이해 나갔다는 의미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다르다. 물론 그의 비평들은 김현 자신이 고백한 것처럼 변화의 시계열(時系列)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변화는 늘 “변화의 씨앗”, 즉 잠재태(dynamis)로서 그의 초기 비평에서부터 이미 생리가 되어있었다. 변화는 외적인 충격으로부터 발생하는 급격한 단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허물고 갱신하는 내부적 파열에 의해 추동되었던 것이다. 그 잠재태의 자세한 윤곽은 이후 김현이 「비평의 유형학을 위하여」에서, 스스로의 사조를 ‘분석적 해체주의’라고 명명하고 차별화함으로써 더욱 오롯하게 드러난다.\7)

분석적 해체주의란 문학이 우리가 익히 아는 경험적 현실의 구조 뒤에 숨어 있는, 안 보이는 현실의 구조를 밝히는 자리이다라고 믿는 세계관을 뜻한다. (중략) 같은 분석이지만, 문화적 초월주의에 있어서는 분석은 가치 판단이며, 민중적 전망주의에 있어서는 실천 행위이며, 분석적 해체주의에 있어서는 해체- 구축이다.\8)

그렇다면 독자는 김현의 비평을 ‘해체-구축’이라는 분석적 행위를 통해 문학으로 하여금 안 보이는 현실의 구조를 밝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법하다. 우리는 이 ‘해체-구축’이 김현 비평의 생리적 운동성, 즉 그의 문학적 몸체를 조직하는 중요한 운동 양태이자 김현 비평의 예외성을 표지하는 독특한 양상이라고 짐작해 본다. 물론 그 양상의 실태를 규명하는 작업은 여러 갈래에서부터 이루어질 수 있다. 이 글은 김현의 ‘문학론’으로부터 그 구체적 양상의 모태로 거슬러 올라가려 한다. 그 중 그의 데뷔작「나르시스 시론」과 『한국문학의 위상』에 씌어진 문학론을 중심으로 그 모태를 세찰할 것이다. “모든 비평은 비평가의 문학관의 개진이다”\9)라는 그의 말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김현의 문학관에 이미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해체-구축’, 혹은 ‘구축-해체’의 흐름이 잉태되고 있을 것이며, 이것의 현실화(actualization)가 곧 그의 실제 비평들로의 응결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2. 나르시스, 분열과 자살의 시학

정녕 진정한 시인은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다.\10)

김현의 ‘해체-구축’적 움직임의 초기 형태는 그의 데뷔작인 「나르시스 시론」(이후 「시론」)에서부터 발견된다. 그의 말처럼 변화의 씨앗은 옛글에 다 내재해 있던 것이다. 김현이 약관의 나이에 발표한 「시론」은 ‘시란 무엇인가?’ 혹은 ‘시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 제출된 답안이었다. 김현은 이 글을 통해 주체의 자기동일성에 대한 상징으로 읽혀온 나르시스 신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해 낸다. 그에게 나르시스는 의식의 자기 동일성을 새삼 확인하는 상상적 주체라기보다, 분열된 자기-의식을 감당하지 못하는 주체의 자화상을 상징한다.

나르시스는 자기의 얼굴을 질시하기 시작한다. 그는 동일성에 대한 질시를 시작한 것이다. 같은 얼굴이 두 개의 얼굴로 나르시스에게는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11)

김현에 따르면 이때 수면 위에 현상되는 낯선 얼굴은 이제껏 주관이 상상적으로 인지하고 있던 자아상과는 묘하게 다른, 뒤틀린 존재이다. 그 이미지는 평소 주체가 자신의 모습이라고 당연시 여기던 ‘상상의 얼굴’이 아닌, ‘현실의 얼굴’인 것이다. 그 다른 얼굴은 바로 “마음속에 존재하던 고뇌의 그림자 곧 욕망의 그림자”로부터 발현하는 것이며, 이 “욕망의 그림자”는 “악에의 요구”에 상주한다. 그리고 이 “악에의 요구”가 형상화된 형태가 우물 위에 비친 얼굴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주체는, 급기야 자기 자신에 대해 “수치를 느끼기 시작한다.” 매끈한 평면 같던 주체의 동일하고 균질적 삶에 “내부의 이름 모르는 욕망”이 검은 구멍을 뚫어놓으면서 균열과 주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상상의 얼굴”과 “현실에의 요구”의 기저에 놓여있는 이 같은 간극이 결국 주체를 봉합할 수 없는 절망과 고뇌 속으로 몰아간다.

나르시스에 대한 이 같은 독창적 해석이 신화학적으로 얼마나 수용가능한지는 여기서 중요치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김현이 분열에 대한 자기 인식을 시인의 근원적 존재 양태로 읽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시인은 악이 자기 존재의 초석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존재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모두 이 악의 구덩이에 걸터앉아 있는 존재이며, 반면 시인은 욕망에 의해 발생하는 이러한 간극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상상과 현실 사이의 심연에서 일종의 찢겨진 형태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하여 불화와 분열은 시적인 것이 태어나기 위한 초기 조건인데, 물론 불화와 분열 자체가 ‘시적인 것’은 아니다. 파열에 대항하는 다음 단계가 뒤따라야 한다. 이때 ‘상상적인 나’와 ‘현실적인 나’ 사이의 거리를 통감한 주체의 자기의식은, 자아의 이러한 비화해적 양태를 통합시키려는 또 다른 욕망에 의해 거듭난다. 김현에 따르면 분열된 주체가 걸을 수 있는 길은 두 갈래이다. “우물에서 눈을 돌리는 것, 또는 자살을 택하는 것.”

우물에서 눈을 돌릴 때, 주체는 더 이상 분열된 자기를 인식하지 않는다. 분열된 형상을 의식하지 못하니, 그 분열을 낳는 욕망을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인간은 김현이 그토록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던 ‘아무런 반성 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현대인’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렇다면 시인의 존재태는 자살을 택하는 행동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왜 하필이면 자살인가?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이 분열된 자아상을 통합시키려는 시인의 욕망이 불가능한 수준에 위치한다는 자각에서 기인한다. 김현에게 불가능성은 그의 세계관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원형적인 전제이며, 이후 그의 비평세계가 뻗어나가는 데 단단한 기층구조를 이룬다.\12) 더욱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자살이 시로 하여금 시로서 현실에 존재하도록 만드는 존재론적 방법이기 때문이다. 김현의 말처럼 시가 분열을 통합한 초월적 단계에 이르면, 그 스스로가 현실에서 사라진다. “실재와 비실재의 교접을 완전히 달성한 자는 진정한 시- 백지를 내놓게"\13) 되기 때문이다. 말라르메의 영향이 엿보이는 위와 같은 구절은 이후 김현의 문학론을 이루는 중요한 이론적 구심점으로 작용하며, 아울러 독자에게는 김현 문학의 몸체가 활동이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참조점이 될 것이다.

이 대목에서 독자는 김현의 시론이 일종의 역설적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즉 김현에게 시는 진정한 시에 이르지 못한 결과로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나르시스의 자살은 분열된 자아를 통합시키지 못한 주체의 좌절과 관련된 행동이며, 이 절망의 제스처가 잉태하는 것이 수선화, 곧 시이다. 말라르메의 말대로 진정한 시가 백지라면 어떤 가시적 대상으로 시가 지면 위에 존재할 때, 그것은 초월적 욕망에 대한 주체의 실패를, 그리고 시는 이 실패의 흔적으로 나타나는 잔여적 형태임을 뜻한다. 요컨대 김현의 시론은 ‘실패의 시론’인 셈이다.

물론 그 실패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 짧은 평론에 기술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독자는「시론」에서의 이 같은 논리적 골개가 김현의 문학적 세계를 지탱하게 될 핵심 요소들의 초기적 맹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은 이후 김현이 ‘시’의 실패를 ‘문학 일반’의 실패로 확장시키는 과정 속에서, 그리고 그 계기(繼起)를 통해 비평적 세계가 하나의 문학론으로 굳어진다는 사실에서 자세히 드러날 것이다. 나르시스의 자살이 수선화를 꽃피웠던 것처럼 문학은 분열로 인해 고뇌하던 주체가 초월의 실패를 통해 스스로를 삶에 기입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재 방식을 우리는 ‘실패의 존재론’이라 명명하려 한다. 이는 아래에서 보다 상세하게 논의될 것이다.

3. 김현 문학론의 세 단계 딜레마

나는 나의 말을 말하고, 나는 나의 말에 깨진다. 선포자로서 나는 사멸한다.\14)

-니체-

앞에서 우리는 김현의 시론을 ‘실패의 시론’이라 명명했으며, 그것이 곧 문학 일반론으로 확장될 것이라고 예시(豫示)하였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실패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무엇이 문학의 실패를 유도하며, 그 실패의 효과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문학이 달성 불가능한 욕망에 대한 실패의 흔적이라면, 독자는 문학의 존재 당위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김현의 답은 이후, 『한국문학의 위상』에서 다음과 같은 더욱 정교한 형태의 명제로 제출되었다.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15)

위 명제를 심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선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라는 첫 번째 문장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다.”라는 김현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써먹지 못한다는 것은 문학이 도구성에 들려 있지 않다는 뜻이며, 문학이 도구성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문학의 사회·경제적 무용성 때문이다. 김현에게 유용성의 세계는 곧 억압의 세계이다. 유용성은 결핍의 그림자로 인간의 발밑에 구멍을 뚫어 놓는다. 그러나 김현이 보기에 문학은 이러한 유용성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을 압박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역설적이게도 압박하지 않음(써먹지 못함)은 그 압박하지 않음을 통해, 써먹는 세계의 압박을 환기시킴으로써(써먹음으로써) 유용성을 얻는다.

김현의 유명한 위 명제는 보통 문학의 순수성을 옹호하려는 입장의 비평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읽혀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위 명제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수사적 활기에 감염되어 그 명제에 내재되어 있는 묘한 균열지점들을 지나쳐버린다면, 그것이 지니고 있는 내적 긴장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김현의 말을 조금 변용하자면 “그곳(그 명제)에서 엘리트주의(낭만주의)의 냄새만을 맡고 현실 파괴의 부정성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감정적인 사람이지 지적 분석력을 갖춘 사람이 아니다.”\16) 왜냐하면 위 문장은 정황상 크게 세 단계의 모순에 처해 있으며, 이 모순이 발생시키는 논리적, 존재론적, 그리고 윤리적 긴장을 해명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1) 첫째는 축어적 수준에서의 형식 논리상의 모순. 우선 축어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위 명제는 형식논리상으로 양립 불가능한 두 개의 하위 명제로 구성되어 있다. 문학은 써먹을 수 없다는, 문학의 무용성에 대한 첫 번째 명제와 이 무용성이 역설적으로 유용성을 띤다는 두 번째 명제로 말이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문학은 이 무용성으로 인해 유용성을 지니게 되는 꼴이 되며, 첫 번째 명제의 승인이 도리어 자기 자신을 배반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 물론 이러한 형식논리상의 모순은 약간의 수정을 통해 비교적 간단하게 해결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바로 첫 번째 현실에의 유용성과 문학의 무용성으로부터 발생하는 두 번째 유용성을 다른 차원에 좌표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또 다른 전제설정인 한에 있어서 실제 이들의 유용성이 다른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완전히 새로운 명제이며, 이는 경험적 층위에서 보다 꼼꼼히 따져보아야 할 문제로 남는다. 그렇지 않다면, 김현이 주장하고자 하는 문학의 존재 당위성은 괴사(壞死) 상태에 직면하고 말 것이다.

2) 둘째는, 문학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배반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딜레마. 이는 앞서 말했던 문학의 유용성이 현실 세계에서의 일반적 유용성과 다른 의미망을 구축해야 한다는 새로운 명제를 점검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사태이다. 즉 억압하지 않아야 하는 문학의 이상향과 그것의 현실태가 실제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인식에서 파열하는 정황적 배반인 것이다. 이 배반적 상황은 경험적인 층위에서 확인될 수 있는데, 김현은 유용성의 세계에 대한 무용성의 항의가 그리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현대 문학은 인간이나 삶의 부조리하고 억압적인 면을 날것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억압을 최소한도로 줄여야 한다는 당위성에 오히려 억압당하고 있다. (중략) 사회의 모순을 과감하게 드러내려는 사람이 그 사회에 의해 인정받기를 바라는 희한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그 사회의 억압을 드러냄으로써, 그 사회 속에 건전하게 자리 잡는다는 그 역설! 현대 문학은 바로 그 역설 속에 갇혀 있다.\17)

위와 같은 자각은 우선 김현이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억압하지 않는 문학이 실제 현실 속에서 오히려 억압으로 전환되었던 것을 목격했기에 나타날 수 있는 반응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현상은 그가 그토록 경계하던, 소위 참여문학론으로 대변되는 현실 참여 지향적 문학에서 쉽게 발견된다. 문학을 현실 변혁을 위한 실제적 무기로 사용하는 순간 문학은 세계를 변혁하기에 앞서 변혁이라는 당위의 그물에 포박된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비단 참여문학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이는 여전히 경험적 수준에서 발견되는 반례들이자, 문학의 이상적 형태에서 멀어진 이상값(outlier)들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김현에 따르면 이 같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참여문학론자들의 소리 높은 구투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한 역설의 블랙홀은 모든 문학 자체를 빨아들이는 구멍이기에, 참여 문학이냐 순수 문학이냐를 편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딜레마는 단순히 정도의 문제 혹은 선택의 문제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인 수준에서 결정된 존재론적 모순 속에 배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훼손된 사회에서는, 훼손되지 않은 것이 없다라는 말까지 사실은 어느 정도 훼손되어 있는 법,”\18) 이다. 왜 그런가?

3) 이제 명제는 세 번째 단계의 딜레마로 나아간다. 이 지점에서 문학이 직면한 딜레마는 경험적 수준에서 선험적 수준으로 고양된다. 이러한 존재론적 딜레마는 우선 문학의 생성 기원의 차원에서 발견된다. 김현은 황석영의『장길산』을 분석한 글에서 “그렇다면 나쁜 폭력을 낳는 욕망이 바로 초월 세계를 낳는 욕망이 아닌가.\19)”라는 물음을 던지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나는 그렇다라고 대답하고 싶다.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무서워라, 그 욕망이 바로 초월 세계를 낳는 욕망이다.\20)

김현에게 세계를 억압하는 욕망과 그것으로부터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의 근원적 뿌리는 같다. 즉 나쁜 욕망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문학의 초월적 욕망은 태생적 수준에서부터 나쁜 욕망과 이란성 쌍둥이의 혈연관계를 맺고 있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부정적 욕망의 발생 기원을 삭제하게 될 때, 그것을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마저 사라진다. “훼손된 사회에서는, 훼손되지 않은 것이 없다라는 말까지 사실은 어느 정도 훼손되어 있는 법”이라는 그의 발언은 그와 같은 피할 수 없는 태생적 덫을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위의 것이 생성의 기층(基層)에서 발생하는 딜레마라면, 생성의 표층(表層)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문학은 세계에 대한 부정적 상상력으로 지탱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세계로부터 억압받고 싶지 않다는 욕망에서 문학은 씌어진다. 그러나 역으로 억압하는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회의 억압성을 드러내는 문학은 현실에서 더 이상 의미망을 구축하지 못한다. 즉, 문학이라는 존재는 역설적으로 그가 그토록 파괴하고자 하는 현실로부터 부정적 승인을 받아야만 존재 가능하다.\21) 그리하여 문학은 사회의 억압이 궁극적으로 사라지기를 꿈꾸지만, 이는 도리어 문학의 소멸을 앞당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학의 욕망은 역설적으로 문학의 욕망이 소멸하기를 겨냥하는 딜레마에 처하는 것이다.

4. 방법으로서의 실패

이상 살펴본 세 단계의 딜레마는 각기 김현이 발성한 명제 자체를 매우 불안정한 지반으로 끌고간다. 그것은 우선 언어적 수준(첫 번째 모순)에서 형식 논리적 결함을 상기시킨 후, 경험적 수준(두 번째 모순)에서의 점검을 통해 명제의 언어적 역설이 현실의 모순에 대응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다음, 선험적 층위(세 번째 모순)의 딜레마로 고양되면서 이러한 모순들이 사실상 예정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모순이 문학의 존재론적 정당성마저 궤주(潰走) 상태로 몰아갈 수 있을 만큼의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독자가 김현의 문학론을 수용하면서도 의구심의 찌꺼기를 걸러낼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역설적 상황에 대한 무의식적 의식 때문이었으리라. 그렇다면, 김현이 앞서 제출한 문학에 대한 명제는 근본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판정될 수밖에 없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독자는 김현의 초기 시론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우리는 그 독특한 시론을 실패의 존재론이라 이름지었다. 물론 그 명명 과정에서 그것의 자세한 국면은 드러나지 않았다. 김현의 글 자체에 그 구체적 양태가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후의 작업에서 구체적 방법론을 형상화하는 작업이 뒤따랐으리라 기대할 법하다. 실패를 한다고 그것이 다 시가 되고 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별한 실패의 존재태, 혹은 실패의 방법론을 독자는 요구한다.

이 구체적 방법론의 단초가 위의 3단계 과정 속에 적시(摘示)되고 있다. 우선 각 단계의 모순이 끊임없이 김현이 말하고자 하는 명제의 실패를 현시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는 충분히 이해한다. 김현 스스로도 “훼손된 사회에서는, 훼손되지 않은 것이 없다라는 말까지 사실은 어느 정도 훼손되어 있는 법”이라고 인정함으로써 이 명제가 결국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훼손되지 않는 사태는 끊임없이 지연될 것임을 은연중에 의식하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현은 이어서 쓰고 있다.

훼손된 사회에서는, 훼손되지 않은 것이 없다라는 말까지 사실은 어느 정도 훼손되어 있는 법이므로, 훼손된 사회의 진실은 그 훼손된 상태는 개조되어야 한다는 주장보다도, 훼손된 상태의 있는 그대로의 드러냄에 있었다.\22)

앞 문장(훼손되지 않은 것이 없다라는 말까지 어느 정도 훼손되어 있는 법)은 실패의 원인을 가리키지만, 뒤의 문장은(훼손된 상태의 있는 그대로의 드러냄) 실패의 특별한 양태를 가리킨다. 즉, 전자가 문학이 필연적으로 들려있을 수밖에 없는 선험적 제약조건을 뜻한다면, 후자는 그 질곡 속에서도 문학이 스스로의 존재론적 정당성의 최대값을 얻기 위한 방법론을 일컫는다. 그것이 김현에게 있어 실패의 구체적인 방법론적 골격을 이룬다. 어떻게?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면 파괴 그 자체가 되는 행위”를 통해서. 그렇다면 어떻게 파괴 그 자체가 되는가? 그것은 “우상을 파괴해야 한다는 주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문학이 그 파괴의 징후가 됨으로써 이루어진다.”\23) 그렇다면 다음처럼 정리할 수 있다. 문학은 “우상을 파괴해야 한다는 주장”과 같은 대상 파괴적 움직임이 아니라, 스스로를 파괴의 징후로 변모시키는 자기 현시적 태도를 통해 훼손된 상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타자를 파괴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모순을 외재화시킴으로써 이쪽 편에 있는 것들을 은연중에 균열 없는 매끈한 평면으로 은닉한다. 반면 문학은 자신의 내부에 훼손의 흔적을 배태함으로써, “내가 훼손된 존재이다”라고 그 자신을 드러내면서 자신과 세계의 훼손됨을 동시에 환기시킨다. “나는 있다, 그러니까 세계는 바뀌어져야 한다.”\24)라는 실존적 선언이 표명될 수 있는 이유가 그와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학이 훼손의 블랙홀로부터 궁극적으로 탈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때 발생하는 문학의 훼손(실패)은 현실의 훼손과는 분명 다른 맥락에 위치한다. 그것은 실패라는 존재론적 질곡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며, 그 결과 문학은 실패를 선험적 조건으로 받아들일 때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론적 지층을 점유한다. 이 과정에서 문학이 점유하고 있는 장소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문제는 욕망의 욕망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데 있다. 그것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있어야 되는, 아니 차라리, 꿈으로 있는 세계의 간극으로 이해하는 긍정적 힘이 될 수 있다. 욕망의 욕망을 인정할 때, 있는 세계는, 꿈으로 있는 세계로 유입해 들어가며, 꿈으로 있는 세계는, 있는 세계로 밀려 나온다. 있는 세계는 욕망을 억압한다. 있는 세계는 억압이라는 말까지를 억압한다. 꿈으로 있는 세계는 욕망을 풀어 놓는다. 꿈으로 있는 세계는 욕망이라는 말까지를 욕망한다. 내가 사는 세계는 그 세계의 중간, 가운데이여 한다. 이어야 한다라는 당위는 올바르지 않다. 사람은 흔히 그 두 세계 중의 하나에 머물러 있다. 젊은 시인들의 시는 그 두 세계의 가운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25) (강조는 인용자)

두 세계의 가운데에 위치하는 행위는, 문학이 적극적으로 억압적 요소를 안고 현실적 억압 내부에서 살아가는 동시에 스스로를 이 억압 바깥에 위치시키고자 하는 싸움을 통해 지속된다. 문학은 현실에도 유토피아에도 거주하지 않는다. 그것이 머물러야 하는 처소는, 따라서 세계들의 중간이다. 이 사이 공간은 문학의 실패가, 더 정확히 말하면 실패의 존재론이 열어놓은 공간이다. 문학이 훼손 그 자체가 될 때, 즉 진정한 문학이 되는 데에 실패하는 순간 이 공간은 열린다. 이러한 양상의 다른 이름이 해체-구축이다.

그러나 끝이 아니다. 김현이 이성복의 시를 해설하면서 말했던 것처럼 해체-구축은 다시금 구축-해체의 운동으로 이어진다. 엄밀히 말해 그 사이 공간은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틈은 문학이 순간적으로 열어놓은 틈새일 뿐이지, 지속적으로 사물의 연장(延長)이 놓여 있는 곳은 아니다. 사이 공간이 장소화될 때, 문학의 공간은 현실을 옥죄는 억압의 기제로 재등장하기 때문이다. 문학이 너무 오랫동안 동일한 위치에서 그 틈을 유지시키고 있을 때, 자신이 일종의 억압의 주체가 되어버린 것을 나중에서야 깨닫는다. 그럴 때, 문학은 자신을 파괴적 칼날의 과녁으로 삼아버린다. 그리하여 김현에 따르면 문학은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이 장소로 구축되기 이전에 서둘러 자신을 이동시킨다. 그것이 해체-구축에 이은 구축-해체이다.

세계는 고통스러운 곳이다. 그 속에는 그러나 꽃이 있다라는 화해로운 인식이 이뤄지는 대신, 아니 그 인식이 계속 유예되면서 검은 마술의 세계가 갑작스레 제시되는 이 시는, 그것 때문에 오히려 시적 긴장을 획득한다. 왜냐하면 화해로운 인식이 이뤄지는 순간에, 말이나 말로 이뤄지는 시의 세계는 이미 거추장스러운 거리적거림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계속 시를 쓰기 위해서는 그 인식이 계속 유예되어야 한다. 해소는 유예되고 그 해소에 대한 그리움만이 남아야 시를 쓸 수 있다.\26)(강조는 인용자)

김지하의「무화과」를 해석한「속꽃 핀 열매의 꿈」에서 김현은 ‘해체- 구축’, ‘구축-해체’의 지속적 운동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예증한다. 그 방법은 화해의 욕망이 끊임없이 비화해적 결과들을 도출시키는 것이다. “화해로운 인식”이 유예되고 이 유예가 새로운 “해소에 대한 그리움”을 추동시킬 때 시적인 것은 미학적·윤리적 긴장을 획득하며, 시는 활기를 띤다. 요컨대 문학은 실패하기 때문에, 성공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실패를 통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환기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성공은 시간성이라는 이름의 괴물에 의해 다시금 실패로 전락할 운명을 산다. 그리하여 구축의 단꿈은 시공간의 저편으로 연장되고, 주체는 다시 해체의 움직임에 자신을 떠맡긴다. 이 실패와 성공 사이의 부단한 움직임, 그것이 바로 해체-구축, 그리고 구축-해체의 세계이다.

5. 주체의 실패에서 실패의 주체화(subjectivization)로

여기서 우리는 “문학은 억압하지 않는다.”라는 김현의 명제를 달리 읽을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 다른 독법은 거듭 반복하는 것이지만, 실패의 기획 혹은 실패의 적극적 껴안음을 통해 비로소 가능하다.

그것 자체로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문학의 완성은 말라르메의 말처럼 백지 상태로 제출되는 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은 억압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오스틴(J. Austin)의 구분법을 따르자면, 진술적(constative) 명제라기보다는 수행적(performative) 발화로 읽혀야 한다. 물론 이는 억압 없는 문학을 건설해야 한다라는 규범적(normative) 꼬리표를 달자는 말과는 다르다. 이 수행문이 발휘하는 효과는 “문학은 억압하지 않는다”라는 언명을 실천하려고 할 때, 다시 말해 문학이 훼손된 존재로 그저 있으려고 할 때 발생하는 실패/모순의 긴장이다.

규범적 명제와 수행적 명제의 차이는 김현이 ‘문화적 초월주의’에 속한다고 분류했던 일군의 비평가들, 그 중 유종호와 김우창을 각각 비교선상에 올려놓았을 때 더욱 선명해진다. “문화적 초월주의에 있어서는 분석은 가치 판단”이라는 말처럼 이들에게 문학의 좋고 나쁨을 가르는 기준은 초월 세계에 있다. 이 초월 세계는 그들이 따라야 할 규범적 가치 및 규정의 확고부동한 상태로 제각각 설정되어 있다. 둘의 차이점은 유종호에게 이 기준이 이데아적인 외부 세계에 상존(常存)하고 있다면, 김우창에게는 ‘심미적 이성’이라는 주관의 내부 영역에 거주한다는 것이다. 공통점이라면 문학은 이 무한한 초월적 대상을 향해 점근선적으로 가까워지려는 비상의 몸짓이라는 데에 있다. 그러나 김현에 따르면 이들의 문학이 이상적 규범에 당도하지 못하는 것은 선험적으로 예정된, 불가피한 실패이다.

김현에게 문학은 단순히 규범적인 이상향으로의 도약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그에게도 초월 세계는 운동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는 푯대로 존재한다. 그러나 김현 문학은 비상에 대한 욕망뿐만 아니라 동시에 추락에 대한 욕망을 함축한다. 즉 실패까지도 욕망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체가 실패라는 선험적 구조의 운명을 능동적으로 선택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예정되어 있는 운명을 선택한다는 행위는 분명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그 모순이 없는 한 문학은 활기를 띨 수 없다.”\27) 그 모순에 의해 발생하는 활기가 문학으로 하여금 실패라는 운명의 주체가 되도록 만든다. 어느 라캉주의 정신분석가의 발언을 그대로 옮기면, “주체로서 우리는 모든 열정을 통해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이 차이화의 과정에 참가한다. 또는 정확히 진술하자면, 우리는 정확히 열정으로서 이 과정의 주체들이다.”\28) 다시 말해 이 모순에 의해 발생하는 자기-차이화를 능동적으로 끌어안음으로써 문학은 비로소 활기, 즉 열정을 얻는다. 이 활기의 개개 양태가 주체화(subjectivization)된 텍스트이며, 이 개별적 활기들의 끝없는 덧붙임의 시간이 문학사로 축적된다.

결국 김현에게 ‘문학’은 실패로부터 소외된 것이 아니라, 실패 자체를 자신의 존재태에 기입시키는 행위인 셈이다. 바꿔 말해 문화적 초월주의자에게 실패가 불가피한 선험적 조건이라면, 분석적 해체주의자에게 실패는 주체화를 위한 필수적 조건이다. 우리는 이러한 존재 양태를 헤겔에 대한 지젝의 탁월한 해석을 참조함으로써 논리화할 수 있다.

헤겔식으로 말하면, 기표는 단순히 대상을 놓친 게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이미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어긋나”있으며, 대상은 이런 실패에 의해 열린 공백 안에 자신을 기입한다.\29)

김현 식으로 말하면, 문학은 단순히 억압하지 않는 세계를 놓친 게 아니다. 문학은 언제나 이미 자기 자신의 이상적 상태, 즉 ‘억압하지 않는 것’이라는 문학의 이념형과의 관계에서 “어긋나”있으며, 문학은 이런 “실패에 의해 열린 공백에 자신을 기입한다.” 또는 다음처럼 말할 수 있다.

실정적으로 주어진 모든 대상은 오직 불가능성을 배경으로해서만 가능하다. 즉, 출현한다. 그것은 결코 완전하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 즉, 그것은 완전하게 자신의 잠재성 내지 자기 동일성을 실현할 수 없다. 헤겔의 진리개념-대상과 개념의 일치-을 받아들이는 한, 우리는 어떠한 대상도 영원히 “진실”하지도 않고, 영원히 “실제로 그러한 바가 될” 수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불일치는 대상의 존재론적 일관성의 긍정적 조건이다. 개념이 경험적 대상으로는 획득되지 않는 관념이라서가 아니라, 개념 자체가 변증법적 운동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렇다. 대상이 자신의 개념에 너무 가깝게 다가가는 순간 이 근접성은 개념 자체를 변화, 전치시킨다.\30) (강조는 인용자)

“문학은 동시에 불가능성에 대한 싸움이다.”\31)라는 김현의 발언은 고로 “문학은 동시에 진정한 문학의 존재 불가능성에 대한 싸움이다.”로도 읽힐 수 있다. 그 불가능성과의 투쟁을 배경으로 문학의 존재 가능성은 얻어진다. “문학은 억압하지 않는다”라는 선언이 경험적으로 획득되지 않는 명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명제 자체가 변증법적 운동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해체-구축-해체의 운동 속에서 스스로의 명제를 충격하고 변화/전치시킨다. 그리하여 문학은 쉼 없이 “세계를 향해 마음 구조를 열어놓”\32)고 “닫힌 소설의 미학을 뛰어넘”\33)으면서 스스로를 열린 세계의 창천 속으로 밀어 올린다. 그리고 이 열림을 통해서 문학은 끝없이 새로운 문학사의 시간 줄기를 만들어 낸다.

6. 열림의 지속을 위하여

인간에게 있어서 위대함에 대한 정식은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그것은 필연적인 것을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은폐하지 않으며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34)

-니체-

지금까지 독자는 김현 비평의 몸체를 이루는 형상(eidos)이 실패로부터 발생하는 운동성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며, 비로소 ‘김현 문학의 순수 질량은 활동’이라는 명제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35) 이에 따르면 모든 문학은 어떤 불가능한 자유의 도래를 꿈꾸기 때문에 (들뢰즈의 용어를 빌리자면) 항상 되기(devenir)의 도정에 놓일 수밖에 없으며 문학의 현실태(energeia)는 도래할 무엇인가로 늘 연기될지도 모른다. 이때 문학은 문학사를 확장시키는 시간선 위에서 끊임없이 대상과 자신을 파괴하는 갱신의 활동체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그 활동체의 반복적 쌓임을 보고 허무주의라 비판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오히려 어려운 것은,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반복과 갱신의 운명 속에서 ‘실패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는 일이다. 니체의 말처럼 이 사랑은 실패를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단순히 실패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허무주의와 구분된다. 동시에 실패에 대한 사랑은 그것을 은폐하려는 강대한 자기기만적 주체의 정립을 뜻하지도 않는다. 그 사랑은 실패의 우발성을 긍정하고 실패를 필연적인 속성으로 내장함으로써, 주체와 세계의 경화(硬化)된 구조를 허물어뜨리고 타자를 향한 다음과 같은 선언을 가능케 한다.

나는 있다, 그러니까 세계는 바뀌어져야 한다. 나는 타자다, 그러니까, 세계는 바뀌어져야 한다.\36) (강조는 인용자)

“나는 타자다”라는 발성이 가능한 것은 주체와 타자 사이의 닫힌 경계가 일순간 열렸기/열리려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적인 해방으로 나와 타자는 서로를 충격하고 쇄신한다. 이것이 김현이 말하는 문학의 반성 행위이다. 물론 “텍스트는 열려 있지만 닫혀지려 하고, 혹은 닫혀 있지만 열려지려 하”기 때문에, 그 둘의 행복한 융합 과정은 실패로 연기될 것이다. 그러나 실패를 사랑하는 문학의 전위는 오늘도 “숨을 잘 쉬는 것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는가”라고 되뇌며, 쉼 없이 “이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라는 의문과 번민으로 세계를, 그리고 자신을 가격하는 것이다. 이처럼 끊임없는 좌절의 지난함 속에서도 갱신되는/되려하는 잔여적인 존재(문학)의 삶에 대한 지속적인 사랑을 독려하기 위한 이름이 ‘실패의 존재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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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 제목은 김현의 『전체에 대한 통찰』에 서문 격으로 수록된 팔봉 비평상 수상소감문의 제목을 차용하였다.

2)김현, 『전체에 대한 통찰』, 나남, 1990, 8면.

3)위의 책, 401면.

4)위의 책, 214면.

5)정과리, 「못다 쓴 해설」,『전체에 대한 통찰』, 470면.

6)김현, 『분석과 해석/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역사 전망』, 문학과지성사, 1992 14면.

7)물론 여기서 드러났다는 것은 자기-의식으로 현시되었다는 것일 뿐, 그 씨앗은 그의 말처럼 옛 글들에 다 간직되어 있다.

8)위의 책, 234면.

9)위의 책, 233면.

10)김현, 『존재와 언어/현대 프랑스 문학을 찾아서』,문학과지성사 , 1992, 21면.

11)위의 책, 14면.

12)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13)위의 책, 21면.

14)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책세상, 2003, 360면.

15)김현, 『한국문학의 위상/문학사회학』, 문학과지성사, 1991, 50면.

16)김현, 『분석과 해석/보이는 심연과 안보이는 역사 전망』,156면.

17)김현, 『한국문학의 위상/문학사회학』,55면.

18)김현, 『전체에 대한 통찰』, 213면.

19)김현, 『분석과 해석/보이는 심연과 안보이는 역사 전망』, 210면.

20)위의 책, 211면.

21)이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근대문학의 제도화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발생했던 실제 사태이다. 문학은 자신을 낳은 근대 자체에 대해 반대해 왔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근대성의 구축 없이 문학은 존재할 수 없다는 역설적 사정 또한 상기시킨다.

22)위의 책, 213면.

23)김현, 『한국문학의 위상/문학사회학』, 58면.

24)김현, 『전체에 대한 통찰』, 218면.

25)위의 책, 217면.

26)김현, 『분석과 해석/보이는 심연과 안보이는 역사 전망』, 67면.

27)위의 책, 24면.

28)알렌카 주파치치, 『정오의 그림자』, 조창호 옮김, 도서출판b, 2005, 63면.

29)슬라보예 지젝,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박정수 옮김, 인간사랑, 2004. 261면.

30)위의 책, 237면.

31)김현, 『한국문학의 위상/문학사회학』, 52면

32)김현, 『분석과 해석/보이는 심연과 안보이는 역사 전망』, 217면.

33)위의 책, 172면.

34)니체, 같은 책, 271면.

35)이 글은 지금껏 몸체의 형상을 이야기했지 질료(hyle)를 분석하지는 않았다. 이 질료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은 그의 문학에 대한 선언이 실제 비평에 얼마나 잘 녹아들었는지를 꼼꼼히 따져 보는 일에 비견될 것이다.

36)김현, 『전체에 대한 통찰』, 21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