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붓을 놓지 않을테요

조선일보
  • 김수혜 기자
    입력 2008.12.30 03:30

    추사 김정희가 가장 사랑한 '문인화의 대가' 소치 허련展
    화가로 최고 경지 올랐지만 외로운 말년, 모란 그려 팔아
    '그림으로 돈 벌지 않는다' 문인화가 불문율 과감히 깨

    1839년, 전남 진도에서 상경한 만 31세의 무명 화가가 지금 서울 통의동에 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저택 대문을 두드렸다. 청년의 이름은 소치(小癡) 허련(許鍊·1808~ 1893). 체계적인 미술 교육도 받은 적 없고, 고향 바깥 넓은 세상에 자신의 존재와 필력을 알린 적도 없는 시골뜨기였다. 추사가 실력 하나 보고 소치를 문하에 거두면서, 붓 하나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천재 소치의 경력이 시작됐다.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내년 2월 1일까지 《소치 이백 년, 운림 이만 리》전(展)이 열리고 있다. 소치는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과 더불어 19세기 후반 조선 회화의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이번 전시에는 소치의 묵화(墨畵) 70여 점이 걸린다. 소치가 세운 화실인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이어간 허씨 집안 여섯 후손의 작품 40여 점도 함께다. 허형(許瀅)·허백련(許百鍊)·허건(許楗)·허림(許林)·허문(許文)·허진(許鎭) 등이다.
    이동국 서울서예박물관 학예사는 "소치는 추사가 가장 사랑한 제자이자, 문인화로 최고의 경지에 오른 화가"라고 했다. 추사는 "난을 치는 법은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은 다음에야 될 수 있다"고 했다. 추사는 정치적 부침을 함께 한 엘리트 제자들을 제치고 시골에서 올라온 소치에게 사랑을 쏟았다. 소치 면전에서는 "자네는 천리 길에 ㄴ겨우 세 걸음만 옮겨 놓은 것과 같네" 하고 엄격한 얼굴을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압록강 동쪽엔 소치만한 화가가 없다"고 극찬했다.

    소치는 추사의 후의에 온몸으로 답했다. 추사가 제주도에 귀양갈 때 따라가서 집중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추사의 귀양살이가 끝난 뒤에는 추사의 날개 밑에 깃들어궁에 출입하며 헌종(재위 1834~1849)의 귀여움을 받았다.

    그러나 헌종도 죽고, 추사도 죽고, 소치가 자신의 뒤를 이을 것으로 기대했던 장남마저 요절했다. 외로운 늙은이가 된 소치는 일흔이 넘도록 전국을 떠돌며 부유한 중인들의 주문을 받아 부귀의 상징인 모란을 숱하게 그렸다. 별명이 '허모란(許牡丹)'이었다고 한다. '미술은 어디까지나 여기(餘技)이며 그림을 팔아 돈을 벌지 않는다'는 문인화가들의 불문율을 뒤로 한 셈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소치의 작품 〈산수〉, 〈일속산방도〉, 〈모란〉이 그의 복잡한 정체성을 보여준다. 〈산수〉는 선비들의 관념적인 이상향을 그린 전형적인 문인화이고, 〈일속산방도〉는 다산 정약용의 제자가 살던 집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린 실경(實景) 산수화이며, 〈모란〉은 더 설명할 필요 없이, 붓 자국마다 감칠맛이 도는 꽃 그림이다.

    현대의 미술사가들은 "말년으로 갈수록 태작이 많다"고 소치를 마땅찮게 평가하기도 한다. 그래도 관람객 눈앞에 활짝 피어 오른 모란은 탐스럽기 그지없다. 월요일은 휴관, 어른 5000원. (02)580-1284
    소치 허련의〈모란〉. 그는 외딴 시골에서 나고 자랐으나 추사에게 발탁돼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화가가 됐다. 스승이 숨지고 스승의 세력마저 스러진 뒤 소치는 전국을 방랑하며 숱하게 모란을 그렸다. 부유한 중인들이 그의 모란꽃 그림을 다투어 샀다(왼쪽), 소치 허련의〈산수〉. 조선조 문인화가들의 마음에 깃든 관념적인 이상향을 그린 그림이다(오른쪽). /서울서예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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