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씨가 최근 아들, 딸과 함께 찍은 사진. 김씨 남편이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 에게 편지와 함께 전달했다.

1987년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의 범인인 김현희씨가 지난 2003년부터 현재까지 가족들과 함께 도피생활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김현희씨는 노태우 정부 시절 안기부 제1특보였던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에게 지난달 전달한 편지에서 "노무현 정부 당시 국정원이 방송 3사를 동원해 KAL기 사건 조작 의혹을 부풀리는 기발한 기획 공작을 꾸몄다"며 "방송과 인터뷰를 하라는 국정원의 지시를 거부한 뒤 살던 곳에서 추방당해 5년째 도피생활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25일 본지가 입수한 편지에 따르면, 김씨는 "5년 전 친북성향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KAL기 사건의 조작설과 음모론이 제기됐고, 국정원 관계자들은 사건 조작 의혹을 다루는 방송과 인터뷰를 하라고 줄기차게 요구했다"며 "이는 참여정부가 KAL기 사건을 과거 정부와 다른 시각에서 각색해 심도있게 이용하려 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적 비애를 느낀다"

이동복 대표는 지난달 말 안기부 직원 출신인 김씨의 남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김현희가 쓴 편지를 갖고 있다.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그날 저녁 이 대표는 한 식당에서 김씨의 남편을 만나 김씨가 직접 쓴 편지를 전달받았다. 편지 서두에는 이 대표가 1972년 남북조절위 사절단으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씨가 화동(花童)으로 나와 꽃다발을 안겨준 인연이 짧게 언급돼 있었다.

이 대표는 "진술번복을 강요받았던 김씨가 나에게 어려움을 호소해 보수단체 쪽에 일종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김씨의 남편에게 연락처를 가르쳐달라고 했지만 '안전에 대한 위협 때문에 전화를 쓰지 못한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했다.

73쪽에 달하는 편지에는 김씨가 지난 정권 국정원으로부터 지속적인 압력을 받은 내용이 기록돼 있다. 김씨는 "2003년 11월쯤 국정원측으로부터 'MBC PD수첩에 출연해달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받았으나 거절했다"며 "그때쯤 방송 3사 기자들이 일제히 집 주변을 취재하기 시작했고, 결국 방송에 거주지가 노출돼 어느 날 새벽 아이들을 업고 피신해야 했다"고 썼다.

이후 MBC 'PD수첩'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KBS '일요스페셜' 등은 사건 16주기를 맞아 대한항공 폭파사건에 의문을 제기하는 프로그램을 잇달아 내보냈다. 김씨는 한 국정원 관계자로부터 "사건 16주년을 맞아 방송사들에 특집방송 지원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김씨는 "국정원이 지원했다는 프로그램을 보니 하나같이 '안기부 수사는 엉터리였다. 김현희는 거짓말을 했다'고 성토하는 내용이었다"며 "방송사들이 안기부의 수사 의혹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국정원이 이를 계속해서 지원했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고 했다.

김씨는 당시 방송 3사가 제기한 의혹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우선 의혹을 풀기 위해선 당시 안기부 수사 책임자들을 취재하는 것이 기본인데, 방송사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예 취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김씨가 KAL기 폭파 임무를 부여받은 뒤 낭독한 맹세문에 북한에서 쓰이지 않는 단어가 들어있다는 점을 들어 방송은 의혹을 제기했지만, 이는 공작원으로서 남한 철자법 등에 대해 철저히 교육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국정원은 KAL기 폭파 사건을 참회하며 조용히 살고 있는 나를 사건 발생 16년 만에 집에서 내쫓았다. 인간적인 비애를 느낀다"면서 "국가기관과 공영방송 기관들이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악용한 데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발전위가 4심, 화해위가 5심… 인민재판"

김씨는 국정원 과거사 발전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국정원이 2005년 과거사발전위를 조직해 김씨에게 조사받을 것을 십여 차례 요구했고, 이를 거부하자 지난해 진실화해위를 통해 또다시 조사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편지에서 "2007년 국정원 관계자들이 남편을 찾아와 '발전위원회의 면담 조사에 응해달라'고 요구했다"고 썼다. 그러나 김씨는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사실을 왜곡시키거나 강압적 진술을 해야만 하는 불행한 사태를 염려해 응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씨는 이어 "이미 사법부가 3심한 것을 발전위가 4심을 하고, 화해위가 5심을 하는 행위는 인민재판이나 다름없다"면서 "사건의 실체가 명백한 사건을 국가 공권력으로 계속해서 재조사하는 것은 일종의 음모로 간주된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지난 정부에서 출간된 고교 근·현대사 교과서에는 KAL기 사건에 대해 '남북한 정부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고만 기술돼있을 뿐, '북한에 의한 테러'라는 사실과, 이 사건으로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됐다는 사실은 빠져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