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플라스틱 공화국'

조선일보
  • 김윤덕 기자
    입력 2008.11.04 23:02 | 수정 2008.11.05 08:54

    '실용' 따지다 건강한 식탁문화 해친다
    1인당 플라스틱 소비량 일본의 1.5배
    미국은 절반 이상이 생활용품 보관용
    밑반찬·김치 등 장기간 저장식품 많고
    깨지지 않는 그릇 선호하는 식문화 탓

    한국 직장인들이 점심 때 즐겨먹는 백반집 상차림. 밥·국 그릇을 뺀 대부분의 식기가 플라스틱의 일종인 멜라민 수지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친환경주의 삶을 지향하는 문화평론가 조동섭(42)씨는 2년 전부터 '플라스틱 없이 살기'에 도전하고 있다. 플라스틱 밀폐용기는 다 버렸고 젓갈, 고추장이 담겼던 유리병을 재활용해 반찬통으로 쓴다. 주부 김미란(38)씨도 6년째 플라스틱 그릇을 쓰지 않는다. 환경모임 '다음을 지키는 사람들'에 가입, 플라스틱의 유해성을 알게 되면서는 주방에서 아예 퇴출시켰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플라스틱 없이 살기란 쉽지 않다. 주부 김씨의 설명. "유치원에서 플라스틱 도시락통을 나눠주길래 스테인리스 식판으로 바꾸자고 건의했더니 안 된대요. 식판 찾기도 하늘의 별따기였죠. 종묘상가 뒷골목에서 겨우 찾았어요." 도시락 물병은 아직 대안을 찾지 못했다.

    유리병을 들고 다니자니 무거운 데다 위험하고, 스테인리스 재질은 보온병 말고는 구하기 힘들다. "어딜 가나 플라스틱 일색이죠." 고급 기름인 올리브 오일 용기만 하더라도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수입하는 것들은 기름의 산패작용이 덜 일어난다는 유리병이 대다수인데 반해 국산 올리브 오일은 유기농 프리미엄 오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플라스틱 병이다. 생수의 경우도 해외산은 유리병과 플라스틱 등 다양하지만 국내산은 플라스틱이 압도적으로 많다.

    일본 직장인들이 즐겨 찾는 도쿄의 한 우동집. 국수 그릇은 물론 모 든 식기가 자기나 유리다. 조선일보DB

    도마, 식용유병, 아기 이유식 그릇까지 모두 플라스틱

    멜라민 파동이 던진 또 하나의 화두 '플라스틱(합성수지제)'. 우리만큼 플라스틱 용기를 많이 쓰는 나라가 있을까?

    통계청이 발표한 주요국가의 1인당 연간 플라스틱 소비량〈그래픽 참조〉을 보자. 2006년 기준, 한국의 1인당 플라스틱 소비량은 98.2㎏인 데 반해 영국 56.3㎏, 일본 66.9㎏, 프랑스 73㎏이다. 한국석유화학협회 김평중 본부장에 따르면, 플라스틱 전체 제품에서 용기가 차지하는 비율은 보통 7%대. 이를 환산하면 한국의 1인당 플라스틱 용기 소비량은 6.9㎏, 영국 3.9㎏, 일본 4.9㎏, 프랑스 5.1㎏이다. 미국의 경우 1인당 플라스틱 소비량 97.7㎏, 플라스틱 용기 소비량 6.8㎏으로 우리와 큰 차이는 없지만 플라스틱 용기의 절반 이상이 음식물이 아닌 생활용품 보관함으로 쓰인다. 우리는 플라스틱 용기의 80%가 음식물 담는 용도로 쓰인다.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플라스틱 용기의 양도 증가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식품 및 식품첨가물 생산실적'〈그래픽 참조〉에 따르면, 2006년 한 해 동안 생산된 플라스틱 용기는 104만3945t. 2002년 51만9929t, 2003년 47만7397t, 2004년 82만1263t, 2005년 141만1094t으로 증가 추세다. 반면 '유리·도자기·법랑' 용기의 생산량은 2002년 66만4993t, 2004년 40만3339t, 2005년 44만4780t으로 감소 추세다. 2007년 국내 가공식품 용기·포장재의 71.5%가 합성수지제였다.

    냉장고에 차곡차곡…반찬 저장엔 플라스틱이 최고?

    플라스틱에서 배출되는 환경호르몬의 유해성 논란〈별도기사 참조〉이 끊이지 않은데도 왜 우리 식탁엔 플라스틱이 많은 걸까. 이화여대 식품영양학과 조미숙 교수는 한국 특유의 음식문화와 관련 있다고 분석한다. "밑반찬, 김치류, 장아찌류 등 한끼에 소비하는 것보다 장기간 저장하고 먹는 것들이 많아 쌓아놓고 보관해야 하니 플라스틱처럼 가볍고 편리한 용기를 선호하게 된다"는 것. 서구의 경우 국물 반찬이 별로 없고 식사 후 남는 음식도 거의 없어 저장 용기가 크게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다. 레스토랑 컨설턴트 김아린씨는 "서울처럼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조차 집에서 밥을 해먹는 비율이 세계 다른 도시들에 비해 월등히 높아 가볍고 사용하기 편한 그릇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깨지지 않는 그릇'이 좋다? 지나친 실용은 후진 문화

    푸드 코디네이터 한화정씨는 "가방, 옷, 구두를 계절마다 바꾸는 관심과 정성에 비하면 우리 건강과 직결되는 그릇에 변화를 주는 데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고 지적한다. 식기에 변화를 주지 않는 건 '깨지지 않는 그릇'에 집착하는 한국인 특유의 성향과 관련 있다. 조미숙 교수는 "1960년대의 경기 침체, 그리고 빵과 라면이 등장하면서 서민 생활에 내구성 강한 스테인리스 스틸과 플라스틱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실용이 강조된 식기 문화가 그대로 정착됐다는 얘기. 하지만 실용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식문화 발달을 저해한다는 게 전문가들 생각이다. 한화정씨는 "외국에서는 플라스틱 접시에 음식을 담아 대접하면 큰 실례다. 교도소에서 쓰는 식기라는 인식이 있을 만큼 그릇 서열에서 마지막 랭킹에 속한다"고 말한다. "일본 부모들은 일부러 아이들에게 유리식기를 사용하게 해요. 조심해서 다루는 법도 하나의 교육이기 때문이죠."



    어린이용 도자그릇, 친환경 종이그릇 등 폭넓게 개발돼야

    다행히 우리 식문화에도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멜라민수지 식기의 안전성〈조선일보 9월24일자 A20면〉에 대한 논란이 불거진 뒤부터다. 한국도자기는 "멜라민 파동 이후 어린이용 도자기 식기 판매량이 5배나 급증했다"고 밝혔다. 락앤락이 개발한 도자기 밀폐용기(젠앤락)는 판매량이 3배나 늘었다. 한화정씨는 "서구에서는 리사이클링이 가능하면서도 몸에 해롭지 않은 종이 그릇이 다양한 디자인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면서 "이번 기회에 플라스틱 식기를 대체할 새로운 그릇들이 많이 개발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동섭씨는 요즘 주부들과 함께 캠페인을 구상 중이다. "밥솥 사면 서비스로 주는 플라스틱 주걱을 나무 주걱으로 바꿔달라고 제조업체에 건의하는 운동이죠." 조미숙 교수는 "우리 조상들은 음식의 온도를 잘 유지하기 위해 겨울에는 유기그릇, 여름에는 사기그릇을 사용했고, 각진 것보다는 원형의 그릇을 사용해 차거나 넘치지 않는 원만한 인성을 키워왔다"면서, "식기 문화는 자녀 교육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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