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751년 탈라스(Talas) 전투를 통해 서방으로 전파된 제지(製紙) 기술이 '고구려 기술'일 가능성이 있다는 흥미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고구려 유민 고선지(高仙芝·?~755)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사라센 군대 사이에 벌어진 탈라스 전투는 세계 문화 교류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된 사건이다.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당나라 제지공(製紙工)에 의해 동아시아의 제지술이 서방으로 전파됐기 때문이다.
조법종(趙法鍾·사진) 우석대 사회교육과 교수(한국고대사 전공)는 1일 경북 경주 드림센터에서 열린 경주시 제2회 신라학 국제학술대회 '실크로드와 신라문화'에서 발표문 〈고선지와 고구려 종이 '만지'에 대한 검토〉를 통해 "이때 전파된 제지술이 '고구려 기술'이었고, 종이 역시 '고구려 종이'인 만지(蠻紙)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조 교수는 당시 사라센 측의 포로가 됐던 두환(杜環)의 기록인 《경행기(經行記)》를 주목했다. 두환은 포로가 된 중국 여러 장인들에 대해서 적었지만 제지공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당나라 포로에 의한 제지술 전파'는 아랍 측 문헌에만 등장한다. 그렇다면 제지공은 두환과 언어가 소통하지 않았던 사람들, 즉 한인(漢人)이 아닌 포로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고선지의 활동 무대는 지금의 신장(新疆) 위구르자치구와 간쑤(甘肅)성에 해당하는 안서도호부와 농우(�右)였으나, 이곳은 당나라 때 종이를 생산하던 지역이 아니었다. 고구려 멸망 13년 뒤인 681년 고구려 유민들 중 상당수가 농우 지역으로 이주됐고, 이들의 후손 중 일부는 훗날 고선지 부대에 배속돼 활동했다. 따라서 탈라스 전투 당시 포로가 됐던 당나라 군사 2만명 중 상당수는 고구려 유민으로 봐야 한다고 조 교수는 말했다.
고구려의 제지술은 매우 뛰어났다. 당나라 초기 중국인들이 '만지'라 불렀던 고구려 종이가 당나라에 대량으로 수입됐던 사실은 《부훤잡록(負暄雜錄)》《설부(說�)》 등의 문헌에서도 확인된다. 고구려 종이는 삼을 원료로 한 마지(麻紙)였는데, 탈라스 전투 이후 사마르칸트에서 생산된 종이 역시 마지였다. 결국 고선지 부대에 편제된 고구려 유민들 중 제지공이었던 포로에 의해 '고구려 제지술'이 아랍에 전파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학술대회의 토론자인 주보돈 경북대 교수는 "충분히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아직 정황 증거말고는 당대의 실물자료 등 물증이 없기 때문에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