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金九에게 이런 모습이?

조선일보
  • 신정선 기자
    입력 2008.09.20 02:43

    '백범일지' 판본따라 달라지는 그의 말,말,말

    시인 고은이 "나는 1년에 한 번, 3년에 한 번 울기 위해 이 책을 읽는다"며 추천한 책이 백범김구(白凡 金九·1876~1949)의 '백범일지(白凡逸志)'다. 백범일지는 1929년과 1942년 각각 탈고한 친필본(本) 상·하권과 1947년 출간된 국사원본(本)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최근 역사문제연구소 배경식 연구원이 '올바르게 풀어 쓴 백범일지'(너머북스)라는 책을 냈다. 그 안에는 우리 국민, 특히 좌파 성향 인물들이 성웅(聖雄)처럼 떠받드는 김구의 알려지지 않은 모습들이 담겨있다.

    '역적의 후손' vs. '왕의 후예'

    '우리 선조는 안동 김씨로 김자점씨의 방계 후손이다.' 백범일지의 첫 문장이다. 김자점은 조선 효종 때 청나라 정벌 계획을 밀고해 역모죄로 처형된 대표적 간신이다. 백범은 자기 뿌리를 역적의 후손이라 밝혔으며 일지 '상놈 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 라는 표현도 나온다.

    / 조선일보DB
    그런데 국사원본에 등장하는 뿌리는 다르다.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 라는 전혀 다른 문장이 들어가 있다. 배씨는 "백범이 해방 후 경순왕을 두차례나 방문했고, '내 시조 경순왕릉'이라는 쓴 것으로 보아 백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해석했다. 그런데 경순왕은 경주 김씨다.

    살해한 일본인, 육군 중위 vs. 민간인

    백범이 일생의 공적으로 자랑스럽게 서술한 게 치하포사건이다. 1896년 2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인 한명을 죽인 후 '국모(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놈을 죽였다'고 썼다.

    백범은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던지 일지에 '쾌남아다운 행동' '국가의 큰 수치를 씻기 위해 행한 일' '이 한 몸 희생하여 만인을 교훈했다'고 썼다. 또 "(살해한) 왜놈 이름은 쓰치다 조료(土田讓亮)이고 직위는 육군 중위"라고 했다. 저자는 "지금까지 확인 가능한 어떤 자료에도 육군중위라는 기록은 없다"며 "일본 공사관의 보고서와 조선 관리의 보고서, 독립신문의 사건 보도는 한결같이 쓰치다를 '상인(商人)'으로 적고 있다"고 했다. 그뿐아니라 백범도 쓰치다가 육군 중위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배씨는 백범이 살해한 일본인이 육군 중위라고 한데 대해 "의도된 기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자기가 죽인 일본인이 명성황후 시해와 상관없는 민간인이라면 '복수'라는 명분이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또 "치하포사건을 혼자 일으킨 영웅적인 일로 서술하고 있으나 이 부분도 사실과 다른 것 같다"고 했다. 백범은 신문조서에서 '다른 세 사람과 함께 치하포에 왔으며 쓰치다를 살해할 때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광개토대왕비 몰랐던 백범

    백범은 1895년 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해 장군총 등 고구려 유적들이 도처에 산재한 고구려의 옛 수도 집안 일대를 여행했다. 그런데 일지에는 고구려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 왜 그랬을까. 조선 후기 유학사상인 화서학파의 가르침을 받은 백범은 고구려사를 높이 평가한 실학파 지식인들의 영향을 받지 못했을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해방 후 출간된 국사원본은 이러한 사실을 의식해서인지 '집안의 광개토왕비는 아직 몰랐던 때라 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라는 친필본에는 없는 문장이 들어가 있다. 배씨는 "이런 수정은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성과와 해방 후 광개토왕에 대한 관심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면서도 원전의 텍스트적 가치를 훼손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

    이승만, 동지 vs. 라이벌

    백범과 이승만은 대비되는 정치노선을 걸어간 라이벌로 인식된다. 이에 대해 배씨는 "백범일지의 이승만에 대한 서술은 그러한 선입견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평가가 아님을 잘 말해준다"고 주장했다.

    백범이 1911년 서대문감옥에 수감됐을 당시 일지에는 '예전에 이승만 박사가 옥중에 도서실을 설치하고 죄수들에게 나라를 부흥시키는 길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박사의 손때와 눈물자국이 반반한 서적을 볼 때에는 배알치 못한 이 박사의 얼굴을 보는 듯 반갑고 무한한 느낌이 들었다'고 기록돼있다.

    이 부분은 백범일지 상권을 집필하던 1928~1929년 무렵 백범의 이승만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배씨는 "임시정부 재정 수입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미주 동포사회에 강력한 지지 기반을 가진 이승만 추종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구절을 삽입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부분은 1947년 국사원본에서 삭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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