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경제계에서 부각되지 않은 화제 중 하나는 국민연금의 변신이다. 돌연 목소리가 커지고 위세마저 당당해졌다.
요사이 국민연금의 힘을 가장 실감하는 곳은 대우해양조선 매각 판이다. 7조원 이상 9조짜리가 될 수 있다는 초대형 입찰 전쟁에서 국민연금은 당첨자를 결정하는 카드를 쥔 것처럼 으스대고 있다.
인수전에 뛰어든 포스코, GS, 한화, 현대중공업을 상대로 1조5000억원의 자금을 보태주는 대신 원금 보장과 담보는 물론, 이자까지 톡톡히 챙기려고 한다. 이들이 국민연금과 손잡으려고 경쟁하다 보니 보장해주겠다는 이자율이 11%로 치솟았다고 들린다. 은행 정기예금보다 두 배 넘는 수준이다.
이를 국민의 노후 복지를 위해 국민연금이 한 푼이라도 더 챙기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라고 좋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그런 높은 이자를 감당하려면 누가 인수하든 대우조선이 보유 중인 잉여금 3조원을 빼내 빚 갚는 데 쓰거나, 무리한 영업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국민연금이 과당 경쟁을 부추긴 나머지 우량기업이 멍들어 쓰러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걱정이다.
국민연금의 사냥감은 대우조선뿐만 아니다. 박해춘 신임 국민연금관리공단 이사장은 우리은행, 산업은행 민영화에도 뛰어들겠다고 말했다. 누구도 말릴 명분이 뚜렷하지 않고, 오히려 우량 주식에 더 투자해 수익을 챙기라고 권유해야 옳을 일이다.
그러나 경제계가 입맛 다시는 이유는 국민연금이 자금력을 앞세워 줄 세우기를 시도하려는 위압적인 태도 때문이다.
인수하려는 쪽에는 "큰 자금 쓰려면 여기로 찾아와!"라고 사인 보내고, 팔려가는 쪽에는 "당신네 새 주인을 결정하는 건 우리야!"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국민연금은 230조원의 운용자금을 갖고 있다. 국내 대형 은행들과 맞먹고, 전 세계 국가 펀드 중 3위의 파워다.
강한 자금력 덕분에 어느 장관보다 많은 금융계 거물들을 한자리에 소집할 힘까지 갖고 있다. 예를 들어 금융인 모임에서 국민연금 운용 책임자가 등장할 때야말로 리셉션 행사 중 가장 웅성거리고 악수 경쟁하느라 소란스러워지는 광경이 벌써 몇 년 전부터 목격되어 왔다.
그저 여윳돈만 많은 게 아니다. 국민연금은 100여 개 기업에서 5% 이상의 지분을 가진 대주주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한솔제지나 LG상사 등 16개 기업의 지분율은 10%가 훌쩍 넘는다. 이 때문에 경영권 분쟁이 발생할라 치면 '내 편에 서주세요'라며 서둘러 찾아가 읍소해야 할 곳이 바로 국민연금이다. 몇몇 대기업은 경영권 방어를 위해 국민연금에 지분율을 늘려달라고 통사정하며 로비해왔다.
이대로 가면 국민연금은 머지않아 재벌 그룹과 대형 은행들 위에 군림하는 '수퍼 재벌'로 등장하고, 대한민국의 간판급 우량기업에서 경영권을 행사하는 '수퍼 주주(株主)'로 떠오를 것이다.
"웬만한 회사는 앞으로 그룹 총수에게 보고하기 전에 먼저 국민연금 이사장에게 설명해야 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말하는 전문가도 있다. 결코 억측이 아니다. 국민연금 운용자금은 35년 후에는 무려 2465조원에 달할 전망이기 때문이다. 대형 은행 10개를 합해 거의 중앙은행에 버금가는 '수퍼 뱅크'의 힘을 가질 기세다.
이런 엄청난 위세를 걱정한 나머지 역대 정권은 연금을 징수하고 지급하는 행정 부문과 자금운용 부문을 분리하려고 애썼다. 막강한 자금 운용 파트가 정치 세력과 결탁하거나 불순한 기업 찬탈극에 개입하지 못하게 독립적으로 움직이도록 해왔다. 내년에는 아예 자금 운용 부문을 별도 조직(公社)으로 출범시킬 계획이다.
그렇건만 새 이사장이 등장한 후 돌연 기류가 바뀌었다. 그는 연금 운용 수익률을 몇% 포인트 더 높이겠다는 계획을 청와대 최고위층에 직접 보고했다고 말하는가 하면, 권력층 핵심과 교감한다는 점을 감추지 않는다고 내부 직원들은 증언한다.
이어 삼성에서 함께 일했던 인물을 자금운용 책임자로 골랐고, 독립성 확보를 위해 다른 빌딩에 나가 있는 자금운용본부에 전용 책상과 좌석까지 마련했다.
가입자를 위한 서비스 개선보다는 큰손 파워를 맘껏 휘두르겠다는 야심을 엿볼 수 있는 행동이다. 국민의 노후(老後)가 걸린 연금을 혼탁한 정치권과 연결시키는 위태위태한 도박을 즐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