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고문

언론에는 성역(聖域)이 없어야 한다고 한다. 견제와 비판의 기능이 살아있으려면 그래야 한다. 그런데 언론에 성역이 있다. 그것은 성역이라기보다 터부(taboo)라고 해야 옳다. 성스러워서 감히 비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굳이 비판해서 득(得)될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다. 한국언론에는 세 가지 터부가 있다. 지역, 여성, 그리고 종교다. 누가 그렇게 규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으로, 또 한국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는 얘기다. 그것은 아마도 지역, 여성, 종교가 태생적이고 영(靈)적인 것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언론은 지역문제로 큰 곤욕을 치르곤 했다. 지역차별의 문제는 누구도 의연한 척하면서 누구도 비켜가지 못하는 민감한 문제다. 물론 우리는 지역차별주의는 가차 없이 공격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지역문제는 본질적인 지역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어찌 보면 지엽적인 것들이다. 예를 들어 특정지역 사람을 '○○바우'로 부른다거나 '잘 나가다가 ×××로 빠진다'는 등의 말을 기사 속에 썼다가 혼이 난 경우다. 오래 통용돼 온 말들이라 무심코 썼다가 신문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해당지역 사람들이 신문사로 대거 몰려와 항의하는 일들이 벌어졌었다. 우리가 그 지역을 비하(卑下)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역문제는 '잘해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보편적이다.

여성의 문제도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다. 여성문제를 불평등의 시각에서 다루거나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향상된 것을 부각시키는 것은 물론 환영받는 일이다. 그러나 여성사회를 비판적으로 다루거나 또는 비하하는 인상을 주는 기사를 쓰는 경우, 그 언론은 큰 욕을 보게 된다. 그 때문에 되도록 여성의 어두운 면, 그늘진 곳을 건드리지 않는 보신(保身)주의가 언론에 존재해 왔다.

언론의 터부 중에서도 으뜸가는 터부는 종교다. 그리고 비교적 충돌이 잦은 것도 종교다. 특히 불교, 기독교, 가톨릭 등 신도의 분포가 큰 종교보다는 신흥이거나 흔히 '사이비'로 불리는 준(準)종교 등의 비리나 문제점을 보도했을 때 언론기관은 편집국 난입 등 큰 봉변을 당하곤 했다. 아마도 신문이나 방송치고 이런 경우를 한두 번 당하지 않은 기관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 종교는 무슨 종교든 건드려서 이로울 것이 없다는, 나름대로의 경험칙이 생겼다고 봐야 한다.

이런 터부의 영역은 정치권이라고 해서 없지 않다. 어찌 보면 이명박 정권이 초반부터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이치를 터득하지 못한 데 있을 것이다. 이 대통령을 비난하는 말 가운데 '고·소·영'이 있다는 것은 자못 시사적이다. 그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 영남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그가 취임 초 여성부를 없애려고 했던 것들은 그가 지역, 여성, 종교 등의 문제에서 근본적 충돌요인을 안고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기에 이런 문제 해소에 어려움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많은 사람들은 이 대통령이 그런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그것을 보완하려는 노력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에 못지않게 불교계 역시 정치권력과 어떤 게임을 하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일부 사람들의 우려를 불식해 주기 바란다. 몇 천 년 역사를 가진 불교가 어느 집권자 한 사람의 '탄압'으로 위축될 리 없고 이 대통령도 그것을 모를 만큼 우둔하지 않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그것을 불교계에 설명하고 더 이상 이 '터부' 속에 오래 머물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자기들의 배타적 이익에 집착하며 우월적 지위를 요구하는 집단의 규모와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신문뿐 아니라 드라마 등 다중이 접하는 매체들은 특정 직업군의 어두운 그늘과 비리 등을 다루기가 어렵다. 그 직업군들이 자기들의 이미지를 훼손한다며 물리적 항의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그들의 긍정적 측면을 홍보하고 좋은 점을 부각시키는 기사에는 지나치리만치 적극적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닉하다.

사회에 터부가 늘어간다는 것은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다. 터부는 결국 권세 있는 사람들, 돈 많은 집단들, 집단의 규모가 큰 세력들에게 유리하게 설정되기 마련이다. 흔히 민주주의의 의미를 정치권력을 성역에서 끌어내고 터부에서 해방시키는 데 두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진정한 민주화는 정치권력뿐 아니라 재벌, 언론, 시민단체, 종교 등 유사권력의 성역을 인정하지 않는 데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