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엽서-대한민국 60년] <35> 양공주

조선일보
  • 표정훈·출판평론가
    입력 2008.08.23 03:27

    궁핍이 낳은 에레나… 그들은 우리의 '순이'

    "같이 잔 남자가 아침에 우리말 들려주기는 당신이 처음이에요. 안녕히 가세요. 다시는 오시지 마세요."

    선우휘 원작 영화 '깃발 없는 기수'에서 신문기자 허윤(배우 하명중)이 하룻밤을 보낸 양공주에게 듣는 말이다. 양공주 가명으로 제법 흔했던 에레나는 개인의 가명이 아니라 집단적 기억이자 표상이다. 가수 한정무가 부른 노래를 안다성이 리메이크해 큰 인기를 모은 '에레나가 된 순이.'

    그 순이는 "석유 불 등잔 밑에 밤을 새면서 실패 감던 다홍치마 순이", "시집갈 열아홉 살 꿈을 꾸면서 노래하던 순이"였지만 이제는 "그날 밤 극장 앞에서 그 역전 캬바레에서 보았다는 그 소문이 들리는 순이"가 되어 "이름조차 에레나로 달라져 오늘 밤도 파티에서 춤을 춘다." 등잔, 실패, 다홍치마가 캬바레, 에레나, 파티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시대의 우울을 노래한다.
    일러스트레이션=박광수

    양공주, 양색시, 양갈보, 유엔마담 등으로 불리며 미군에게 술과 웃음과 몸을 팔았던 우리의 순이들. 염색한 머리와 높은 만큼 어색한 하이힐에 짙은 화장을 한 에레나가 되어 손가락질과 멸시와 천대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우리의 순이들. 이범선 소설 '오발탄'에서 주인공 철호의 여동생 명숙이 보여주듯, 그들 중 많은 이가 가족을 위해 희생하지만 자괴감에 시달리며 가족들과 사실상 유대를 끊고 폐쇄적이며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아침마다 치옥이를 부르러 가면 그때까지도 침대 속에 머리칼을 흩뜨리고 누워 있는 매기 언니와 화장대의 의자에 거북스럽게 몸을 구부리고 앉아 조그만 은빛 가위로 콧수염을 가다듬는 비대한 검둥이를 만났다."

    오정희 소설 '중국인 거리'에서 어린 소녀 '나'의 친구 치옥의 언니 매기는 흑인 병사와 살며 아이까지 낳았다. 치옥은 "봄이 되면 매기 언니는 미국에 가게 될 꺼야. 검둥이가 국제결혼을 해 준대"라 말했지만, 매기 언니는 미군 지프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 반듯이 누워있었다. 술 취한 흑인 병사에 의해 죽임 당한 매기 언니.

    6·25 전쟁과 분단 그리고 전후의 궁핍이 낳은 에레나들을 우리는 아직까지도 순이로 받아들이지 않는 듯하다. 할 수만 있다면 기억에서 싹 지워버리고 싶은 아픈 상흔으로 여겨도 그나마 다행 아닌 다행이라 할까. 아픈 상흔이란 그래도 고통으로 인정한다는 뜻일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작가 오영수의 '안나의 유서'(1963)가 우리에게 묻는다. "전쟁으로 해서 나는 고아가 됐다. 배가 고팠다. 철든 계집애가 살을 가릴 옷이 없었다. 이것이 내 죄가 될까? 그래서 나는 안나라는 갈보가 됐다. 한 끼 밥을 먹기 위해서 피를 뽑아 팔 듯 나는 내 몸뚱아리를 파먹고 스물여덟을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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