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추적] "車번호 XXX, 얼굴에 흉터"… 기억 꺼내 범인 잡는다

    입력 : 2008.07.05 03:54

    '무의식의 기억' 들여다 보는 최면수사
    강화도 모녀 살해 등 '증거부족 사건' 용의자 몽타주 작성 때 이용
    국과수에서 年150여건 처리… 떠올린 기억이 사실 아닐때도 있어

    윤복희(여·47)씨와 김선영(16)양 '강화도 모녀' 납치·살해 사건 수사에서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경찰이 '최면(催眠)수사'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있다. 윤씨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지난달 17일. 이날 윤씨는 국민은행 강화지점에서 현금으로 1억원을 찾았고, 은행직원 2명이 윤씨의 '무쏘' 차량까지 돈을 날랐다. 그때 20~30대로 보이는 남자 1명이 승용차 운전석에, 다른 한 명은 차 문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남자들은 윤씨를 '이모'라고 불렀다. 당시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은행 직원들은 현관에서 차까지 10여m를 '후닥닥' 뛰어갔다 왔다. 남자들을 눈여겨볼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경찰은 은행원 2명을 상대로 최면수사를 벌이고 있다. 그들의 무의식에 각인된 기억을 끌어내 남자들의 몽타주를 작성하려는 것이다.

    ◆국내에선 1997년 첫 실시

    미국의 경우 이미 1960년대부터 FBI, 미 공군 특별수사대, LA 경찰국 등이 강력사건 해결에 최면수사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1997년 정신과 의사 박희관씨가 목격자에게 최면을 걸어 용의차량의 번호를 기억해내게 한 것이 최면수사의 효시다. 당시 경찰은 박씨를 비웃었지만 최면수사를 통해 범인을 검거했다.

    현재 국내에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가 범죄분석실 안에 최면수사팀을 두고 매년 150여건 안팎의 최면 수사를 하고 있다. 경찰도 국과수 연수를 거친 3명의 베테랑급 전문수사관과 27명의 과학수사요원을 두고 필요할 때마다 독자적으로 최면수사를 한다.
    4일 오후 서울 신월동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함근수 범죄분석실장(오른쪽)이 최면수사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변지희 조선 일보 인턴기자에게 실제로 최면을 걸고 있다.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특히 뚜렷한 증거가 없는 살인·강도·강간 사건에서 용의자 몽타주 작성은 거의 최면수사를 거친다. 연쇄살인범 유영철 사건, 정남규 사건, 화성 여대생 실종 사건 때도 국과수가 주변 목격자 수십 명을 상대로 최면수사를 했다.

    유영철 사건 때는 "수상한 차량이 사건 장소 가까이 있었다"고 진술한 목격자에게 최면을 걸어 차량번호를 떠올리도록 했다. 그 목격자는 최면상태에서 그 차량번호를 기억해냈다. 하지만 그렇게 찾아낸 차량은 사건과는 무관한 것으로 밝혀져 허탕을 치기도 했다.

    지난해 서울 강변북로 뺑소니 사고처럼 최면수사가 범인 검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경우도 있다. 작년 4월 12일 이모(여·37)씨는 새벽 0시40분쯤 서울 이촌동 부근 강변북로에서 자전거를 탄 40대가 길을 횡단하다 처음 택시에 부딪힌 뒤 여러 대의 차량에 잇따라 치여 숨지는 것을 목격했다. 김모(47)씨로 밝혀진 피해자는 사고지점에서 5㎞ 넘게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다.

    국과수 함근수 범죄분석실장이 이씨를 상대로 최면수사를 벌였다. 이씨는 "강변북로 원효대교 부근에 사람이 쓰러져 있다. 차들이 그 남자를 매달고 달린다"고 말하며 몸서리를 쳤다. 이씨는 "SUV 아니면 승합차, 검정색"이라고 기억했고 번호도 일부 기억해냈다. 현장을 본 교통경찰관은 "승합차는 바닥이 높아 사람을 끌고 갈 수 없다"며 이씨의 진술을 폄하했지만, 이씨의 진술대로 33세 남성이 몰던 SUV차량이 결정적인 가해차량으로 밝혀졌다.

    ◆살인마 유영철때도 최면수사

    맨정신으로는 기억나지 않는 장면들이 최면상태에서는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함근수 실장은 "최면에 걸리면 무의식이 의식과 분리돼 자유롭게 활동하는, 이른바 해리(解離)상태가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해리상태에서는 성폭행범의 옆얼굴밖에 기억하지 못하던 사람도 성폭행범 앞에 있던 토끼인형을 기억해서 자신이 그 인형이 됐다고 상상해 성폭행범의 앞얼굴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면수사가 만능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최면이 아예 안 걸리기도 하고 최면으로 떠올린 기억이 진실과 거리가 먼 경우도 있다.

    대구 초등학생 허은정양 납치·살해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대구경찰청은 납치현장에 있었던 허양 할아버지에게 최면을 걸어 용의자 인상착의를 물어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3명의 과학수사요원이 돌아가면서 최면을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대구경찰청 관계자는 "정신적인 충격으로 정신집중이 어려웠고 할아버지 성격도 완고하고 퉁명스러워 최면이 안 걸린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 내 3명뿐인 최면 전문수사관 가운데 한 명인 김상현 경위(52·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는 "같은 장면을 목격해도 주관에 따라 다른 진실을 기억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2005년 20대 여자 회사원이 퇴근길에 실종돼 며칠 뒤 아파트 공사장에서 발견된 사건이 있었다. 김 경위는 "그 여성이 마지막으로 갔던 식당 주인과 2명의 종업원을 상대로 최면을 걸었는데 3명의 말이 모두 달랐다"고 했다.

    경찰청 이규문 강력계장은 "대형사건의 경우 목격자들이 사건을 보도한 신문이나 TV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왜곡된 기억을 갖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살인마 정남규 사건 때는 "용의자를 봤다"는 학생들을 상대로 최면수사를 벌여 몽타주를 만들었지만 저마다 달랐다.

    ◆“안 깨어나면‐”은 기우

    증거를 남기지 않는 지능범죄가 늘면서 최면수사가 적용되는 사건은 갈수록 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최면에 대한 편견으로 수사를 꺼리는 목격자들이 많다. 2002년 이후 60~70명을 상대로 최면 수사를 했다는 김상현 경위는 "깨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은 예외 없이 받는다고 했다.

    특히 여성 목격자들은 "최면상태에서 당신이 나를 마음대로 조종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한다고 김 경위는 전했다. 최면으로 무방비 상태가 된 뒤 성추행을 당하는 것 아니냐는 의미다.

    김 경위는 "TV나 영화에 나오는 것과 달리 최면에 걸려도 의식은 또렷하다"며 "그 같은 걱정은 모두 기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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