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카트콤(KATCOM)'은 북한군 포로를 잡아오거나 정보수집 등에 공을 많이 세웠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훈장도 못 받고 찬밥 신세였지요." 6·25전쟁 당시 호주군에 배속돼 참전했던 황청학(79) 6·25영연방군참전유공자협회 카트콤 회장은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카트콤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카트콤은 Korean Augmentation Troops to Commonwealth Division의 약어다. 6·25전쟁에 참전한 영연방군에 배속된 한국군이라는 의미다. 미군에 배속됐던 카투사(KATUSA)와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붙었던 명칭이다.

당시 참전 군인들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관련 논문 등에 따르면 한국군 장병들이 영국을 비롯,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군에도 배속돼 함께 전투를 벌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동안 카투사의 활동상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카트콤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황 회장은 영어를 못하지만 1952년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뒤 차출돼 호주군에 배속됐다. 호주군 1분대당 1명씩 카트콤이 배정됐다. 임진강변 고왕산 전투에서 기관총 사수로 활약하다 중공군의 계속된 포격에 귀가 어두워져 청각 3급 장애인이 됐다.

황 회장은 "당시 고왕산이 뚫리면 서울이 위협 받을 상황이었지만 우리 카트콤들은 전투에 앞장 서며 고왕산 사수에 공을 세웠다"고 말했다.

6·25전쟁 당시 영연방군(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에 배속된 한국군‘카트콤’의 모습. 1953년 3월 처음 공식 배치된 카트콤은 이듬해 영연방 사단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해체됐다.

6·25전쟁 당시 장교로 참전해 영국군 부대에서 파견근무를 했던 김성진 전 문공부 장관도 카트콤의 역할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김 전 장관은 "6·25전쟁 중 카트콤은 영연방 사단과의 작전협력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을 격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영연방군은 1952년 카트콤을 비공식적으로 한국군으로부터 받아오다 1953년 3월부터는 카트콤의 존재를 공식화했다.

당시 카트콤 규모는 1000명에 달했고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김 전 장관을 비롯, 연락장교 4명이 파견됐다. 카트콤들은 영국군 군복을 입고 식량도 영국군 것과 같았지만, 급여는 한국 육군이 지급했다. 카트콤은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이듬해 영연방 사단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해체됐다.

영연방 국가뿐 아니라 다른 유엔 참전국에도 한국군이 배속돼 함께 전투를 벌였다는 증언과 정황 자료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벨기에 정부는 1966년 브뤼셀 외곽에 한국전 참전기념비를 건립하면서 벨기에 전사자 명단과 함께, 벨기에 부대에 배속됐다가 전사한 한국군 요원 9명의 영문 이름과 사망일자, 계급을 함께 새겨 넣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자국(自國) 병력과 함께 전투 중 사망한 한국군 20명에게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자유 훈장'을 수여했다. 프랑스군의 경우 한국군 1개 중대 100명이 배속돼 프랑스군과 함께 싸웠다. 호주 정부도 한국군 참전군인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카트콤 등 한국군이 다른 유엔 참전 15개국 군과 함께 전투를 벌인 사실은 당시 작전통제권을 미군이 아니라 유엔군에 이양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어서 의미가 크다는 평가도 나온다.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은 "1950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은 작전통제권을 미군사령관이 아니라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한 것인데 일각에서 미군에게 이양한 것처럼 왜곡해왔다"며 "한국군이 다른 유엔 참전국군과 함께 싸운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우리가 유엔 회원국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유엔군의 일원으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