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안녕! 친구들아 로봇 찌빠가 돌아왔어 너희들 늙었네 주름살 펴줄게~

조선일보
  • 염강수 기자
    입력 2008.06.20 13:31 | 수정 2008.06.21 20:14

    ■ 52부작 애니메이션 작업 한창… '로봇 찌빠의 아빠' 신문수 화백을 만나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오피스텔 5층에 들어서자 만화방 특유의 종이 냄새가 확 풍겼다. 1964년 데뷔 후 45년간 어린이들에게 꿈과 웃음을 준 신문수(申文壽·69) 화백의 작업실이다. 신 화백은 고우영(高羽榮)·신동우(申東雨·이상 작고)· 길창덕씨 등과 함께 '명랑만화'시대를 열었다.

    그의 서가 한쪽은 40~50대의 기억에 생생한 주인공들 차지였다. '로봇 찌빠' '도깨비 감투' '원시소년 똘비' '포졸 딸국이' '카이젤 상사' '칠칠이 모험'…. 다른 쪽은 만화 원본이다. 그는 "말 풍선에 주인공 대사를 타자로 쳐 프린트한 다음 한 문장씩 오려 붙인 것들"이라고 했다.

    80년대 중반 이후 열혈 팬들이 나이 들고 명랑만화 전성시대가 끝나면서 시야에서 사라졌던 신 화백이 최근 '애니메이션 로봇 찌빠'를 들고 나타났다. 내년 하반기 TV방영을 목표로 고구미 프로덕션과 함께 52부작 로봇 찌빠 애니메이션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했다.

    신 화백의 대표 캐릭터인 로봇 찌빠는 미국의 로봇회사에서 만들었지만 두뇌 회로 이상으로 엉뚱한 짓만 일삼다 한국의 '팔팔이'네 집에 정착한다. 아톰과 같은 제트추진장치도 없이 머리통에 달린 프로펠러로 하늘을 날고 돼지 코에 몸통은 깡통이지만 어린이들은 20년 넘게 로봇 찌빠에 열광했다.

    신문수 화백이 단행본으로 나옷 '로봇 찌빠'를 보고 있다. 그는 "로봇 찌빠는 내 인생의 동반자"라고 말했다. ☞동영상 chosun.com/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로봇찌빠가 올해 몇 살이죠?

    "1974년부터 소년중앙에 연재했으니 올해 서른넷이죠. 서울 도봉구 쌍문동 일대가 로봇 찌빠의 활동무대였죠. 나중에 보니 '아기공룡 둘리'와 동향(同鄕)입디다. 쌍문동이 만화 캐릭터 명당인 모양입니다."

    ―로봇찌빠 친구 이름이 왜 '팔팔이'이죠?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88서울올림픽이 결정되고 난 뒤 나온 이름 아닌가요?

    "로봇 찌빠를 80년대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저는 그냥 '건강하고 활발한 어린이'라는 뜻으로 팔팔이를 지었는데 팔팔 다방이나 팔팔 당구장과 유래가 같은 걸로 오해하죠."

    신 화백의 인생 초반은 그리 '명랑'하지 않았다. 중학교까지 충남 천안에서 다니다 서울 중앙고로 유학했다. 반 친구들이 필기에 열중할 때 그는 교사의 캐리커처를 그렸다. 그 3년 사이 가세가 기울자 그는 등록금이 필요 없는 공사(空士)에 응시했지만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

    신 화백은 "군대는 공군으로 갔다"며 "빠이로트(파일럿·비행기 조종사)가 꿈이었는데 비행장에서 자동차에 기름칠만 했다"고 말했다. 1962년 12월 제대 후 일자리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어떡하다가 만화가가 됐나요.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으로 승부를 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게 명랑만화였어요. 우연히 동아일보에 독자 투고한 만화가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한 김성환 화백의 눈에 띄어 신문에 나왔어요. 1963년이었습니다. 이듬해 잡지 '로맨스'에 '너구리 형제'로 데뷔했죠."

    ―서울까지 유학 보내준 부모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유명 화가들도 굶던 시절이었어요. '만화가'라고 하면 다들 그게 뭐냐고 되물었어요. 부모님은 서울 유학 보냈더니 '환쟁이'가 돼 돌아왔다며 난리였죠."

    ―만화가로 이름 얻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잡지 '로맨스'에 처음 그린 만화가 2페이지였어요. 그 원고료로 생활이 될 리 없죠. 그래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절박했어요. 목구멍에 진짜 거미줄 치겠다는 생각에 죽어라고 그림을 그렸죠. 배는 고픈데 웃기는 만화를 그려야 했죠."

    ―언제쯤 사람들이 알아봐주던가요?

    "1965년에 '새소년'에 '알태자'를 그렸어요. 14페이지였어요. 원고료를 받는데 그 무게감, 부피감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원고료로 동네 가게 쌀값, 연탄값 등 외상값 다 갚고 월세에서 전세로 옮길 계획까지 세웠어요."

    ―비교적 빨리 성공했네요.

    "돈을 한번 만져보니 콧대가 어찌나 높아졌는지…. 얼마 뒤 그 잡지 편집장하고 식사하면서 '원고료 더 올려달라'고 튕겼습니다. 그 다음 날 답이 왔어요. '다음 달부터 푹 쉬십시오'. 하하하."

    1968년 소년한국일보에 연재한 '칠칠이 모험'으로 그는 만화가로 자리 잡았다. 1972년 당시 최고의 인기 어린이 잡지였던 어깨동무에서 별책부록으로 만화를 주는 새로운 기획을 내놨다. 새 기획을 맡아줄 만화가로 그가 선정되자 내놓은 작품이 '도깨비 감투'였다.

    머리에 쓰면 투명인간이 되는 감투를 얻은 소년 '혁이'와 또래 친구들이 각종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 스토리다. 74년에는 소년중앙에 로봇 찌빠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로봇 찌빠는 이후 20년간 연재했다. 어린이 잡지를 정기 구독하는 아이들이 또래의 권력자였던 시대였다.

    ―대박이 터졌군요.

    "당시 어린이들이 참 착했어요, 로봇 찌빠가 북한의 할머니를 데리고 와 남한의 아들과 만나게 해주는 이야기가 나갔을 때 독자들이 자기 일처럼 좋아했어요. 로봇 찌빠를 베껴 '내 솜씨가 어떠냐'며 편지를 보내는 어린이도 많았어요. 자기 애를 만화가로 키워달라고 부탁하러 온 부모도 있었어요."

    ―로봇 찌빠 연재를 중단했다가 팬에게 혼났다면서요.

    "80년대 중반 새 만화를 그리려고 연재를 중단했어요. 팔팔이와 눈물의 이별을 한 로봇 찌빠가 미국으로 돌아갔죠. 잡지사에 어린이들의 항의가 얼마나 빗발쳤는지 몰라요. 결국 1년 반 만에 미국에서 업그레이드된 로봇 찌빠를 등장시켰어요. 그 열혈 어린이들이 이젠 다 어른이 됐어요."

    ―그 정도 인기였으면 다른 유혹은 없었습니까?

    "80년 초 신촌의 만화회사에서 이름만 빌려달래요. 그림은 자기네들 만화공장에서 다 그려준다면서요. 월 1000만원을 준다고 했지만 거절했습니다. 내가 살아남은 비결은 작품을 조절하고 모두 제가 그렸기 때문입니다. 많은 후배들이 이름을 빌려줬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죠."

    80년대 중반 만화시장은 급변했다. 단편 위주의 명랑만화보다 긴 스토리를 가진 만화들이 인기를 끌었고 일본 '망가'(漫畵)가 물밀듯 밀려왔다. 명랑만화의 전성기가 가버린 것이다.

    ―90년대에는 주간지에 성인만화도 그리셨죠.

    "한 주간지에서 성인만화를 의뢰 받았어요. 일감도 필요했고 재미있겠구나 싶어 연재했는데 독자들이 편지를 보내왔어요. '왜 선생님이 이런 만화를 그리느냐, 실망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접었어요. 돈도 좋지만 평생 우리 애들이 봐서 좋은 작품만 그리겠다고 했는데 좀 심했다 싶었어요. 지금도 그 만화를 보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명랑만화 시장이 줄어 경제적으로 다시 힘들어졌나요.

    "IMF 직전에 무려 30군데의 거래처가 있었죠. 주로 대기업 사보에 만화를 그리는 것이었는데 쪽당 20만~30만원씩을 받았어요. 만날 통장 찍어보면 유수의 대기업 명의로 돈이 들어와 있었어요. IMF 이후로는 딱 끊겼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학습지 시장이 발전하면서 거기에 만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일복이 있나 봅니다. 반도체를 주제로 한 만화도 그렸어요."

    70년대 두뇌 회로가 고장 난 로봇 찌빠를 등장시켰던 신 화백은 30년 뒤 실제 반도체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하게 된다.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공정에 대한 만화를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다. 신 화백은 "외부인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는 반도체 생산 현장을 특별 견학하기도 했다"며 "1년을 고생하며 만화를 그렸는데 지금은 웬만한 신입 연구원보다도 반도체 생산 공정에 대해 더 잘 안다"고 했다.

    인터뷰 중 신 화백에게 영화사에서 전화가 왔다. '도깨비 감투'를 애니메이션화하는 영화사에서 온 전화였다. 왜 옛날 7080세대의 명랑만화를 찾는 수요가 늘었을까? 신 화백은 "지금 학부모들이 어릴 때 본 만화고 자기들이 무탈하게 잘 자랐으니 애들에게 권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저는 유수한 신문이나 출판사에서 만화를 의뢰 받아 그렸어요. 거기에 실렸던 만화는 지금 어른이 된 당시 아이들에게 분명히 도움이 됐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로봇 찌빠를 보고 탈선한 아이들이 있었을까요? 그런데 요즘 어린이가 보는 만화를 보면 아찔해요. 아이들이 부모에게 대 들고 빈정거리는 장면이 예사로 나옵니다. 재미를 위해서라지만 그러면 안 되죠."

    2008년 6월6일 로봇찌빠를 애니매이션으로 만드는 만화가 신문수씨를 분당 작업실에서 만났다. /이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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