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 정·도쿄특파원

한국 기업이 세계 TV시장을 석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새삼 놀랐다. "TV" 하면 "소니" 하던 시대가 불과 얼마 전이다. 그런데 지금 세계시장 판도는 '삼성→소니→LG→샤프' 순서로 짜여 있다고 한다.

시대를 잘못 읽어 액정(液晶) 기술을 소홀히 한 소니가 왕좌에서 밀린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샤프가 이해가 안 됐다. 샤프는 40년 전부터 세계 최고의 액정 기술을 보유한 일본 기업이었다. 세계 처음 액정 기술과 액정 TV를 상용화시킨 곳도 샤프였다. 한국의 액정 역사는 길게 잡아도 20년을 못 넘긴다. 대체 어떻게 이겼을까?

액정 TV에서 핵심 부품은 영상을 표시하는 '액정 패널'이다. 백라이트가 쏜 형광 불빛을 통과시키면서 영상을 만들어 낸다. 이 액정 패널에 한국 기업이 재빨리 투자한 것이 시장을 장악한 요인이라고 한다. 1인치라도 더 큰 TV를 1달러라도 더 싼 값에 공급해 대형화로 진보하는 TV시장을 차례차례 석권해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의문이 남았다. 그럼 액정 패널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백라이트의 빛은 액정 패널 내부에서 '편광판→유리판→액정→컬러필터→유리판→편광판' 순서로 통과한다. 정수기 필터가 수돗물을 생수로 걸러내듯 이들 부품이 빛을 걸러내 영상을 만들어 내는 방식이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의 지난 1월 1일자 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편광판. 일본의 닛토전공과 스미토모화학이 세계시장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은 유리판. 미국 코닝이 50%, 일본 아사히글라스와 니혼덴키글라스가 45%를 점유하고 있다. 다음은 액정. 일제 때 한국에 수풍 수력발전소를 만든 일본 칫소와 독일 머크가 40%씩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이번엔 컬러필터. 일본의 돗판(凹版)인쇄와 다이니혼인쇄가 70%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전자산업의 기술력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부품과 장비를 사용하면서 더 경제적으로 더 질 좋은 제품을 만드는 공정 기술은 한국이 일본을 능가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부품, 소재를 일본에 의존하는 구도는 언제나 그대로다. TV만이 아니라 일찌감치 '한국이 세계 최고'라고 해온 반도체도 일본의 기술력이 없으면 무너져 내릴 수 있는 나약한 기반 위에 있다. "한국 전자산업이 일본을 앞질렀다"며 환호하던 기간(1990~2007년) 동안 대일 무역적자가 59억 달러에서 298억 달러로 5배 급증한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샤프가 주도한 일본의 40년 액정 기술력은 바다처럼 넓은 일본의 부품, 소재기업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한국이 만든 금자탑은 일본의 기술적 토대 위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애당초 20년 기술력이 40년 기술력을 능가하는 기적이란 존재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삼성이 일본에서 'SAMSUNG' 브랜드를 감추면서까지 자신을 낮추는 모습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본의 깊이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일본이 기울인 수십 년, 수백 년의 분투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늘 이런 과정을 생략하고 자신을 뽐내는 데 열중해 왔다.

해외에서 보면 한국은 여전히 약한 나라다. 강한 나라의 기술력, 강한 나라의 외교력, 강한 나라의 자본력, 강한 나라의 소비력에 의존해 후대의 안위를 도모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작은 나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밖을 향해 한없이 겸손해야 하고 한없이 인내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의 숙명이자 번영의 길이 아닐까 한다. 밖에서 보면 분명히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