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세계 미술시장의 블랙홀'

입력 2008.05.27 16:33 | 수정 2008.05.27 17:14

한국 화가들도 앞다퉈 중국행
“중국은 실력만 존재, 비명문 미대 설움은 없다”

130여 곳의 갤러리와 200여 개의 작가 작업실이 몰려 있는 중국 베이징 따산즈(大山子) 798 예술구역. 이곳은 원래 버려진 재래식 공장지대였다. 처음엔 임대료가 싸다는 이유로 현지 작가들이 모여들어 창고를 미술 작업실로 바꿔나갔다. 중국 미술이 세계 미술시장의 주목을 받자 외국화랑들도 속속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현재 이곳은 전 세계의 작가들이 교류할 수 있는 예술 구역이다.

따산즈 예술구역에서 약 2㎞ 정도 떨어진 대형창고에 위치한 한국인 조각가 송필(39)씨의 작업장 바닥에는 석고 가루가 수북이 쌓여 있다. 벽에는 군데군데 흑연가루가 묻어 얼룩져 있다. 헤라(조각할 때 쓰는 칼)는 작업실 바닥 곳곳에 떨어져 있고, 창고 2층에는 먼지가 쌓인 침대와 싱크대만 덩그러니 위치해 있다. 넓이 3300㎡(약 1000평), 높이 8미터의 대형창고에는 김씨와 같은 한국인 작가와 중국인 작가 300여 명이 모여서 작업을 하고 있다. 이들은 칸막이를 이용해 창고 공간을 나눠 각자 개인 작업실로 쓰고 있다.

2006년 6월 베이징에 간 김씨는 1년만인 지난해 7월 798 예술구역의 한 갤러리에서 한달 간 개인전을 열었다. 하루 평균 갤러리 방문객은 150여 명.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할 때 30~40명이 찾은 것에 비하면 방문객이 3배 이상 많았다. 대만과 상하이의 갤러리는 김씨의 작품 5점을 구입하면서 한국에서 판매되는 가격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했다. 김씨는 “중국시장은 미술시장의 블랙홀”이라며 “실력만 갖춘다면 이 곳에서 작업하는 한국 작가들이 세계 미술시장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 베이징 따산즈 예술구역에 위치한 대형 창고가 미술 작업실로 개조되고 있다.

◆세계 미술시장의 블랙홀 중국

중국이 우리나라 미술학도들의 ‘기회의 땅’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에서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새로 짓는 건물 안에 들어갈 그림이나 조각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경제 성장으로 인해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예술을 찾는 부유층도 부쩍 늘었다. 시티 프라이빗뱅킹(PB)에 따르면 투자자산만 100만 달러가 넘는 중국의 백만장자들은 4월 현재 37만 3000여명에 달한다. 이들에게 미술품은 새로운 투자처다. 한국의 미술시장 규모가 약 4000억원 수준이지만 중국은 4조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외국 갤러리들의 중국 진출도 활발하다. 베이징에는 약 50개의 갤러리가 있으며 이 중 절반이 외국계 갤러리다. 우리나라는 아라리오 갤러리, 금산갤러리 등 대형 갤러리 8곳이 중국에 진출했다. 현재 798 예술구역을 포함해 베이징에만 약 1000개의 작가 작업실이 있다. 약 70명의 한국인 작가들이 베이징에서 활동하고 있고, 이들이 세운 작업실만 50여 개다. 작가들은 주로 재래식 공장이나 대형창고를 개조해 작업실로 쓰고 있다.

버려졌던 한 대형 창고가 미술 갤러리로 변신했다.

◆중국으로 가는 화가와 미술학도들

중국 미술시장이 뜨면서 중국으로 가는 미술학도나 작가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특히 서울미대, 홍익 미대와 같은 명문대 졸업장이 없는 ‘비(非) 명문대’ 출신 미술학도들이 전략적으로 중국에 진출하는 경우도 많다.

최성진(35)씨는 미술 디자인 분야 중국 유학생 1호다. 최씨는 2003년 초 국민대 패션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한 대기업에 취업했다. 하지만 디자인 사업을 하고 싶었던 최씨는 과감히 사표를 낸 뒤 그 해 12월 중국으로 건너갔다. 최씨가 디자인 강국인 미국·영국 대신 중국을 선택한 것은 중국의 넓은 시장 때문. 2년간 어학연수를 마치고 2005년 9월 베이징 중앙미술학원에 입학해 디자인을 배운 최씨는 중국에 진출한 국내 대기업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기업들은 중국어와 중국 디자인에 능통한 최씨의 도움을 받아 시장에 진출하려고 한 덕분이었다. 최씨는 “중국 내 여러 소수민족의 다양한 디자인 감각을 익혀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패션을 만들어 내겠다”고 밝혔다.

북경의 유명 미술대학의 하나로 꼽히는 중앙미술학원에 따르면 지난 2003년 10명에 불과했던 한국 유학생들이 2005년 48명으로 늘었고, 올해 1월 현재 130명의 한국인 유학생이 대학을 다니고 있다. 4년 만에 13배가 늘어난 셈이다.

동양화를 전공한 류시호(46)씨는 지난 2004년 중국 북경으로 유학을 가 중앙미술학원에 입학했다. 류씨는 국내에서 3차례 작품전을 열었던 베테랑 작가였지만 명문대 미대 졸업장은 없었다. 실력은 뛰어났지만 미술계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스스로 판단했다. 류씨는 돌파구로 중국을 선택했다. 류씨는 “중국화는 이미 세계적 그림으로 대접 받고 있다” 며 “중국화를 제대로 배워야 국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판단해 유학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가나연(여·26)씨는 원광대 서예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2001년 교환학생으로 중국 베이징에 간 후 이듬해 곧바로 베이징의 한 미대에 다시 입학했다. 가씨는 “학력을 우선시하는 우리나라 풍토상 지방의 미대 출신 작가들이 설 자리는 매우 좁다” 며 “처음부터 넓은 시장에 도전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따산즈798 예술구역에서는 고압난방 파이프가 지나는 골목 양편에 폐공장 내부를 그대로 화랑이나 전시, 공연장으로 쓰고 있는 곳을 흔하게 볼 수 있다./조선일보 DB

중국 미술유학을 통해 국내에서 당당히 취업에 성공하는 경우도 있다. 충북대를 졸업한 정상수(35)씨는 중국 유학을 통해 쌓은 실력을 인정 받아 국내의 직장에 취업한 케이스다. 2003년부터 베이징에서 중국미술을 공부한 뒤 현재 청주의 한 미술 스튜디오의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스튜디오의 작가들이 중국 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중국미술 스타일을 접해 본 큐레이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씨는 “유학 당시 교육비용이 한국에 비해 저렴한데다 국제 미술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점이 끌렸었다”고 밝혔다.

이정하(39) 베이징 중앙미술학원 부주임은 “지방의 미술학도들이 어려운 취업시장 때문에 중국에 진출해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것이 최근 눈에 띈다” 며 “대학원 출신들은 주로 미술관 큐레이터로, 학부 출신들은 디자인을 배워 중국에 진출한 다국적 디자인기업에 취업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큰 시장이 장점, 화교들 텃세는 조심해야

중국은 현재 미국·영국과 함께 3대 미술시장으로 꼽힌다. 약 6000~7000만 명의 미술품 투자자들이 있다. 중국 스타일의 미술을 익히려는 젊은 미술학도 들은 물론 베테랑 작가들이 중국을 찾는 이유다.

베이징에서 2005년부터 1년여 간 작품 활동을 했던 장진연(41)씨는 올 9월 베이징에서 다시 개인전을 연다. 장씨는 “중국은 학력·학벌 위주의 우리나라 미술계와는 달리 실력이 중요하다” 며 “미술품 컬렉터(수집가)들이 한국 미술시장과 중국 미술 시장에 쏟는 관심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인들의 텃세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지난해 8월 베이징에서 갤러리 문을 연 최구일(36)씨는 “우리나라 작가들의 미술품들이 화교투자자들의 입맛에 맞지 않아 고전하는 경우도 많다” 며 “되도록 어렸을 때부터 중국 스타일의 그림을 배우는 것도 경쟁력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밝혔다.

신종식 홍익대 미대 교수는 “중국의 미술시장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단지 중국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것만으로는 성공을 보장 받을 수는 없다” 며 “중국시장에서는 세계에서 모인 작가들간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만큼 끊임없는 노력과 투자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으로 가는 미술학도들이 늘고 있는 가운데 한국에서도 중국미술 작품들을 전시하는 갤러리를 많이 볼 수 있다.. 서울 인사동 아트싸이드 갤러리에서 지난 7일부터 3주에 걸쳐 열린 중국현대미술 대표작가전에는 500여명의 관객들이 찾아와 중국 미술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여줬다. /박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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