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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합

서울 온 알렌 박사의 두 증손녀 할아버지와 '1세기 만의 대화'

  • 최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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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08.05.10 01:11 | 수정 : 2008.05.10 10:10

    후손으론 103년 만에 첫 한국 방문… "기쁘고 자랑스러워"
    사회 봉사 활동 대물림… 할아버지가 썼던 금테 안경 기증

    
	알렌 박사
    알렌 박사

    "Amazing! Now, finally I believe it(놀라워요! 이제서야 믿어지네요)." 9일 오전 9시, 연세대학교에 들어서던 두 미국 여성은 넓은 캠퍼스를 본 순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전날 저녁 한국에 온 리디아 알렌(63)씨와 마사 알렌(48)씨였다. 두 사람은 오전 내내 학교 곳곳을 둘러보며 "Amazing(놀랍다)!"을 연발했다. "이렇게 큰 학교인 줄 몰랐어요. 사진으로 본 옛 학교는 작고 허름한 모습이었는데…." 이들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이자 연세대 의대의 전신인 제중원(광혜원)을 설립한 호러스 알렌의 증손녀들. 알렌의 후손이 한국을 찾은 것은 그가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간 지 103년 만에 처음이다. 두 사람은 10일 연세대 창립 123주년을 맞아 연세대 의과대학의 초청으로 한국땅을 밟았다.

    ◆'알렌' 성을 가진 200여 명에게 편지

    알렌 박사는 개화기 한국에 개신교를 전파하러 온 선교사이자,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을 세우고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의학 교육을 시킨 인물이다. 1884년 조선에 발을 들인 뒤 21년간 머물렀다. 갑신정변 당시 명성왕후의 조카 민영익이 자객의 습격으로 생명이 위태로울 때, 서양 의술을 동원해 석 달 만에 생명을 구해낸 것이 계기가 돼 고종의 어의(御醫)로 임명됐다.

    1885년 제중원을 세운 뒤론 개원 1년 만에 1만 명 이상의 환자들을 치료했고, 조선인들의 질병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의학 보고서를 최초로 펴내기도 했다. 이후 고종의 외교 자문 역할을 하며 박정양 공사 일행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에 조선공사관을 설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년 만에 조선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주(駐)조선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출발해 공사 자리까지 올랐다.

    
	9일 오후 신촌 세브란스병원 본관 앞에서 연세대 의대의 전신인 제중원을 세운 알렌 박사의 흉상을, 증손녀 마사 알렌(왼쪽)과 리디아 알렌씨가 바라보고 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9일 오후 신촌 세브란스병원 본관 앞에서 연세대 의대의 전신인 제중원을 세운 알렌 박사의 흉상을, 증손녀 마사 알렌(왼쪽)과 리디아 알렌씨가 바라보고 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알렌은 끝까지 조선을 배반하지 않고 신의를 지킨 사람이었다. 1905년 미국과 일본 사이 가쓰라태프트협정(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 통치를, 미국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 통치를 인정한다는 밀약)이 맺어지자, 미국으로 달려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격론을 벌이며 항의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를 해임 소환했고, 알렌은 "나는 한국과 함께 쓰러졌다(I fell with Korea)"는 말을 남긴 채 그 해 한국을 떠났다.

    알렌은 고향인 미국 오하이오주 톨리도로 돌아간 뒤 'Things Korean'(한국적인 것들)이란 책을 썼다. 그는 책의 서문에 "불행하게도 미국은 한국의 신의를 저버렸다. 양국은 1882년 '한 나라가 외세 침략을 받을 경우 다른 나라가 도와준다'는 내용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지만, 미국은 이 신성한 맹약을 지키지 않아 조선인들의 분노와 반감을 샀다. 필자의 진심 어린 동정과 애정을 조선인에게 표하며…"라고 썼다.

    그가 귀국한 뒤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손들은 한국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1985년 연세대 창립 100주년을 맞아 학교를 세운 주역들의 후손을 초청했지만, 알렌의 후손들은 개인 사정으로 한국에 오지 못했다. 이후 가족들이 곳곳으로 흩어지면서 연락이 끊겼다.

    소식이 닿지 않는 이들을 찾아낸 것은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에 살고 있는 허정(70)씨였다. 허씨는 정형외과를 운영하다 5년 전 은퇴한 뒤, 재미(在美) 동문들을 위해 학교 앨범을 만들다가, 알렌의 생애를 접하고 감동해 후손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톨리도 근방의 모든 신문사와 방송국, 도서관에 문의를 하고 샅샅이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전화번호부에서 '알렌'이란 성을 가진 사람 200여 명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샘 알렌'이란 이름의 남자가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당신이 찾는 사람이 아니지만, 톨리도 지역의 역사 잡지에 기고하는 방법은 어떻겠소?"

    허씨는 당장 "알렌이 세운 학교가 문을 연 지 123주년, 알렌 탄생 150주년을 후손들과 함께 축하하고 싶다"는 글을 잡지에 실었다. 며칠 뒤, 알렌 둘째 손부(孫婦)의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알렌의 가족들이 소장하고 있는 고종의 사진.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상복을 입은 차림이며, 사진 아래‘대조선국 대군주 사진-개국 오백오년’이라고 써 있다.(왼쪽) 고종이 알렌의 부인에게 하사한 은 그릇. 알렌 박사 가족들이 소장하고 있다. /허정씨 제공
    알렌의 가족들이 소장하고 있는 고종의 사진.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상복을 입은 차림이며, 사진 아래‘대조선국 대군주 사진-개국 오백오년’이라고 써 있다.(왼쪽) 고종이 알렌의 부인에게 하사한 은 그릇. 알렌 박사 가족들이 소장하고 있다. /허정씨 제공

    ◆알렌이 생전에 썼던 금테 안경

    가족들은 톨리도 지역 근방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알렌은 슬하에 두 아들이 있었고, 중소기업 부회장을 역임한 장남은 아들이 셋, 변호사였던 차남은 후손이 없었다. 세 손자 아래엔 증손녀만 5명. 생존해 있는 이는 큰손부(93)와 증손녀들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후손들에겐 '알렌의 피'가 흘렀다. 큰손자는 심장을 전공한 내과 의사였고, 나머지 두 손자도 2차 대전 때 전장에서 위생병으로 부상병들을 돌봤다.

    증손녀 마사씨와 그 여동생은 소방서 응급구조대원이고, 리디아씨는 식물을 심고 가꾸는 과정을 통해 자폐아들을 치료하는 원예치료사로 병원에서 일한다. 마사씨의 언니도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리디아씨는 "의사였던 아버지는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줬고, 새로운 의료기기를 만드는 연구에 골몰해 있는 날이 많았다"며 "우연인지 아니면 알렌 할아버지의 영향이었는지 몰라도 가족들 대부분이 남을 치료하고 돌보는 일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고 했다.

    가족들은 고종이 선물한 은 그릇과, 명성황후가 시해 된 뒤 상복을 입은 고종의 사진을 갖고 있었다. 알렌이 입었던 관복의 흉배, 향로, 꽹과리 등도 소장하고 있다. 두 증손녀는 이 중 알렌이 생전에 썼던 금테 안경을 연세대에 기증했다.

    이들은 10일 연세대 창립 123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뒤 11일 미국으로 돌아간다. 마사씨는 "증조할아버지가 한국에 심은 작은 씨앗이 이렇게 풍성한 열매를 맺은 것을 보니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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