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딸아이 묻은 날도 강의하자 학생들 엉엉 울어"

조선일보
  • 문갑식
    입력 2008.04.25 13:54 | 수정 2008.04.26 16:12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과외 선생에서 교육재벌로 손주은 메가스터디 대표
    "과외는 있는집 애들만 도와… 온라인 강의는 평등"
    홈쇼핑 채널 보고 '학원이 집으로 온다' 아이디어 처음 생각

    사람 팔자(八字)는 여러 번 바뀐다. 1987년 2월 26일, 서울대 졸업식날 손주은(孫主恩·47) 메가스터디 대표의 운명이 방향을 틀었다. 전날 아내는 빈털터리 대학생 남편에게 "통장에 3만원밖에 없다"고 했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4학년 손주은은 졸업식장 커피 장수가 됐다.

    커피 팔아 번 돈 5만원으로 1인분에 2000원짜리 동태찌개 4인분을 사 먹고 남은 돈을 아내에게 준 다음 날 그는 예전 하숙집을 찾았다. '과외 자리를 소개해달라'는 청을 넣기 위해서였다. 3월 2일 '대학생 과외 선생 손주은'은 서초구 잠원동 한신아파트 307동으로 출근했다.

    21년 후 손주은은 4000억 재산가가 됐다. 그가 만든 메가스터디는 코스닥시장에 상장된 지 4년 만에 시가총액 순위 2위가 됐다. 작년에만 1633억원의 매출에 583억원의 영업 순익(純益)을 올렸다. 올해 메가스터디 매출목표는 2100억원이다.

    봄비 뿌리던 22일 인터뷰를 위해 서초동 메가스터디 본사를 찾았다. 3시에 약속을 했지만 그는 15분쯤 지나서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 투자자와 상담하던 중 빠져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인터뷰 뒤에는 일본 투자자와 저녁 약속이 있다고 했다.
    "욕을 잘한다"는 기자 지적에 손주은 메가스터디 대표는 '유인자능호인능오인(唯仁者能好人能惡人·인자만이 능히 사람을 좋아할 수도 미워할 수도 있다)'이라는 공자 말씀을 칠판에 적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동생은 "오빠는 꼭 색깔 있는 분필을 쓴다"고 했다. /최순호 기자 choish@chosun.com

    ―그 학생의 성적을 단숨에 끌어올렸나요.

    "전교에서 200등 정도 하던 여학생이었죠. 5개월 만에 전교 15등을 만들었습니다."

    ―대박이 터졌군요.

    "월 20만원짜리 과외 선생이 딸 성적을 확 올려놓자 어머니 생각이 바뀌었어요. 오빠도 맡아달라는 거예요. 남자 애는 월 450만원을 주고 강남 최고의 A급 족집게 강사들에게 전 과목 과외를 받았는데 입시에 실패했거든요."

    ―그 재수생도 성공했겠죠?

    "원하던 대학에 갔습니다. 나중에 행시(行試)까지 합격해 지금은 고위 공무원이 됐습니다. 소문이 나자 그 아파트 라인을 돌며 과외를 하게 됐죠."

    ―살림이 나아졌겠군요.

    "첫 과외를 맡았던 아이 어머니가 목포여고 출신이었어요. 그분이 동창들에게 저를 소개했어요. 오라는 데 다 다니니 연 5000만원 수입이 되더군요. 그 다음 해에는 2억 가까이 번 것 같습니다. 대기업 사원 월급이 30만~50만원 할 때였어요."

    1961년 3월생 손주은은 3수(修) 끝에 서울대 81학번이 됐다.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친 후 3학년으로 월반(越班)할 정도의 수재였지만 79년에는 340점 만점인 예비고사에서 312점을 받고도 서울 상대 진학에 실패했다. 80년에는 299점을 받았다.
    “3修끝에 서울대 입학… 과외로 年2억 번적도 공부 못하는 애들 가르치다 보니 욕도 잘해 학생들 잘 가르치려 부모 재교육한 적 있어”

    ―공부를 잘해야 학생도 잘 가르치나요?

    "저는 몰아치기로 공부하다 몰아치기로 놀았어요. 모범생들은 남을 잘 가르치지 못해요. 문제 있는 아이들이 과외 받는 거잖아요. 자기가 일탈(逸脫)해봐야 남도 이해할 수 있죠."

    ―어떤 스타일로 가르칩니까.

    "전 과목을 혼자 다 가르쳤어요. 재수생 2명을 가르칠 때는 도서관에 가 제 좌우에 앉히고 셋이 함께'수학의 정석'을 풀죠. 어느 검사(檢事) 부부를 여행 보내고 그 집에서 9박10일간 학생들과 '지옥훈련'을 한 적도 있어요. 집중이 되면 하루에 암기과목 하나를 끝낼 수도 있죠. 나머지 어머니 9명이 하루씩 와 밥해줬죠."

    ―학생뿐 아니라 부모도 괴롭혔군요.

    "문제 부모는 있어도 문제 학생은 없다는 말이 맞아요. 저는 학부모 재(再)교육도 했어요. 현대철학도 강의하고 외부 강사도 초청했죠. 1주일에 두 번 이상 빠지면 아이를 제적시킨다, 대신 개근하면 수업료 10%를 할인해준다고 했죠."

    ―동영상 강의를 보니 욕도 잘하던데 계산한 겁니까?

    "공부 못하는 애들에게는 좋은 말로 타이르는 것보다 '돌대가리 같은 놈아'라고 하면서 한대 패는 것이 감동을 줄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학생들은 누가 자기에게 헌신하는 선생인지 알거든요. 공자가 말한 '유인자능호인능오인'(唯仁者能好人能惡人·인자만이 능히 사람을 좋아할 수도 미워할 수도 있다)도 같은 맥락입니다."
    서울 서초동 메가스터디 통합사옥 대표실 안마 의자에 앉은 손주은 메가스터디 대표. 이 의자가 건물 전체에서 손 대표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최순호 기자 choish@chosun.com

    ―과외 선생이 천성인 것 같군요.

    "처음에는 2년만 하고 과외 선생 생활을 끝내려 했죠. 90년 3월부터 사시 준비를 했어요. 1주일 공부해보니 이게 아니다 싶더라구요. 사시 1차 끝나니 다시 어머니들이 '합격자 발표(8월) 때까지 놀면 뭐 하느냐'고 해 과외를 재개했죠."

    ―돈 잘 벌어 집안에서 좋아했겠군요.

    "웬걸요. 돈을 벌었던 88년 추석에 집(경남 창원)에 내려가려고 기차표까지 끊었는데 어머니가 아내에게 전화해'오지 말라'고 했다는 거예요. 아버지가'서울대 나온 녀석이 과외 선생 하고 있으니 쪽팔린다'며 오지 말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 뒤 10년간 고향에 안 갔어요."

    손주은은 1990년 11월 처음 학원을 차렸다. 그러나 여전히 '과외선생을 계속해야 하나 독일로 유학이라도 갈까…'하고 긴가민가하던 그에게 비운(悲運)이 연달아 일어났다. 91년 9월 15일 일요일, 네 살 아들과 생후 6개월 된 딸을 데리고 대방동 교회에 다녀오던 아내 셋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함께 교회에 갔다가 3시30분 과외 약속이 잡혀있어서 먼저 나왔어요. 평소 차를 아내가 모는데 그날따라 피곤하더군요. 아내에게 '내가 차 몰고 갈 테니 너는 택시 타고 가라'고 했어요. 오후 5시30분쯤 과외 하는 집으로 연락이 왔어요. 큰일 났다고."

    ―어떤 상황이었나요.

    "가족이 탄 택시가 사육신(死六臣) 묘를 지나 부근 고가도로 교각을 들이받은 거예요. 병원에 전화해보니'세 명 전부 의식이 없다'는 거예요. 네 살 아들은 얼마 못 살았어요. 의식 잃었던 아내는 12월 퇴원했습니다. 퇴원 전날 아들 죽은 걸 알려줬죠."

    ―딸은요.

    "뇌수종이 와 뇌에서 척수가 안 빠지는 증상이 나타났어요. 살아도 평생 장애가 생긴다더군요. 아내와 딸아이 데리고 퇴원할 때 '그래도 살아있는 게 어딘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다음 해 5월 5일 아파트 바닥에 머리를 부닥치고 말았어요."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군요.

    "정말 어이가 없었죠. 하루에도 몇 번 씩 자살해버릴까, 별의별 생각을 다 했어요. 학원 강의마저 없었으면 미쳤을 겁니다."

    강남성모병원에서 한 달간 투병하던 딸은 92년 6월 11일 새벽 4시반 사망했다. 충북 청원군 공원묘지에 딸을 묻고 온 손주은은 딱 2시간 눈을 붙인 뒤 그날 오후 6시 학원으로 가 강의를 했다.

    "그때는 수업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나는 거예요. 수업하고 한 시간 정도 지나니까 학생들이 전부 엉엉 우는 거예요. '선생님 제발 그만하세요'하고요. 우는 학생들을 놓고 수업을 더 못 하겠더군요. 오후 7시30분까지 수업하다 '그래 그만하자. 사흘만 쉬고 올게'라고 했어요. 그 길로 제주도로 갔어요. 죽은 두 아이 생각이 96년 가서야 안 나더라고요."

    손주은은 그 뒤 자녀 둘을 다시 얻었다. 그들이 지금 중학교 3학년 딸과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이다. 그렇지만 그는 사고 이후 한번도 거르지 않고 주 60시간씩 강의를 했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강의 외에 탈출구가 그에게는 없었다.

    서른여섯이던 96년 말 손주은의 팔자는 다시 한번 바뀐다. 학원은 학생들로 넘쳤지만 살면서 해놓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때 그의 재산은 30억원 가까이 됐다.

    "과외가 사회적인 악(惡)이잖아요. 학생과 과외 선생 개인 사이는 선(善)이지만 사회적으로 분명 나쁘죠. 특수한 계층의 있는 집 아이들의 '밑'을 닦아주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떠나지 않았어요."

    ―어떤 결론이 나왔나요.

    "30억원으로 사립학교를 하나 만들까 생각했어요. 과외로 더럽게 번 돈 공교육으로 깨끗하게 쓴다, 신문기삿감 아닌가요? 그런데 찜찜한 거예요. 공교육에 헌신하겠다는 게 아니고 그 돈으로 명예를 사겠다는 얄팍한 계산이었던 거죠."

    ―그래서요.

    "96년 12월 31일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 97년 1월 1일까지 34시간을 집중적으로 생각했어요. 결론은 기왕 하는 거 '깨끗한 장사꾼'이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제 학원, 두 학원 원장 친구를 모아놓고 학원의 합병을 선언했어요. 올해 매출은 50억으로 한다, 앞으로 1000억까지 한다고 목표까지 제시했죠."

    ―어떤 반응이 나왔나요.

    "저를 미친놈 취급하더군요. 게다가 학원료도 정부가 정한 대로만 받겠다고 했죠. 당시 제 학원에서만 월 순익이 5000만~6000만원씩 나오던 시절입니다."

    ―합병 후 어떻게 했습니까.

    "당시 부원장에게 운영을 맡기고 저는 '대중강사'로 나섰습니다. 강남 학원가에 이력서를 다 뿌렸어요. 한 군데도 연락이 안 오더군요. 학원들을 일일이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만 당했어요. 딱 한 군데 원장만 만나주더군요."

    ―뭐라고 설득했습니까?

    "9년간 언더그라운드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실적 자랑도 하고요. 무슨 과목 강의할 거냐고 묻더군요. 전 과목 다 한다고 했더니 웃으며 하나만 하래요. '수학 강의 하겠다'라고 했더니 전공이 뭐냐고 해요. 서양사학과 나왔다니 역사 전공한 놈이 무슨 수학이냐는 거예요. 저는 당시 전공이 아닌 과목을 가르치는 게 불법이었던 걸 몰랐던 거예요. 거기서도 쫓겨 났죠."

    ―어떻게 강남 대일학원에 서게 됐죠?

    "서울시의원으로 있던 친구가 '백'을 썼죠. 전단지를 10만 장이나 뿌리고 10개반을 개설했는데 7개 반에는 한 명도 안 오고 세 개 반도 두 명, 세 명, 세 명 이렇게 왔어요."

    ―특이한 학생들이네요.

    "이상한 애들이 약간씩 있거든요. 유명 선생은 피하고 이상한 선생 강의만 찾는 아웃사이더들이죠. 그 아이들 데리고 피 토하듯 강의했어요."

    ―뭔가 보여주려고 했습니까?

    "저를 문전박대한 학원장들한테 꼭 한마디씩 했거든요.'당신들 나를 안 잡은 게 일생일대의 후회가 될 거'라고요. 몇 년 뒤 그 사람들은 정말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학생 두세 명 놓고 한 강의 이야기를 들으니 배 12척 가진 이순신 장군이 연상되는군요.

    "저는 그때 누구도 시도하지 않는'종합 사회'강의를 했어요. 요즘 말하는 크로스오버죠. 잘 가르친다는 소문은 학생들이 냈어요. 맨 먼저 한성과학고 어머니들이 달려왔어요."

    ―그 뒤로 순풍에 돛을 단 겁니까.

    "아니죠. 한성과학고 어머니들이 제 소유의 학원으로 나를 만나러 오전 11시30분쯤 왔는데, 시설이 형편없는 데 놀라 전부 가버렸어요. 그중 한 어머니 연락처를 알아 밤 11시쯤 전화했죠.'저를 만나지 않은 게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가 될 겁니다.' 다음 날 그분이 저를 찾아왔죠."

    ―협박을 잘 하는 성격입니까.

    "자신이 있었던 거죠. 1주일 뒤 대원외고 학생들이 30명 오고 다음 주에 이화외고 학생들이 40~50명 오는 식이었어요. 5개월 만에 100명씩 20개 강좌를 완전히 채웠어요. 2001년에는 월 6750명까지 가르친 적이 있어요."

    손주은의 팔자는 99년 다시 바뀐다. 집에 케이블TV가 설치된 첫날 홈쇼핑 채널을 보다 깜짝 놀랐다. 거기 사교육시장의 답이 있었던 것이다.'우리가 백화점에 가는 게 아니라 백화점이 우리 집으로 오는 거구나. 그럼 학생이 학원 가는 것이 아니라 학원이 집으로 가는 시대도 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겠군요

    "행동에 옮긴 건 2004년 4월입니다. 메가스터디를 만들어 인터넷 강의를 하겠다고 하니 주위에서 전부 다 미쳤다는 거예요. 사고 친다고요."

    ―그때는 어떻게 설득했습니까.

    "제가 강남대일학원에서 강의하고 제 소유의 학원 세 곳에서 번 돈으로 서울 주요 지역의 학원들을 인수했거든요. 오프라인에 진지(陣地)를 구축한 상태였죠. 그래서 2000년 7월 12일 메가스터디 법인을 설립한 겁니다. 증자할 때도 꺼리는 학원장들을 억지로 참여시켰는데 나중에 전부 100억, 200억씩 챙겼죠."

    ―인터넷 강의 방식이 생소하지 않았나요.

    "저 빼고 전부 동영상 강의를 15분짜리로 제작하자고 했죠. 강의 15분에 나머지는 오락 요소를 넣는 '에듀테인먼트'가 당시 대세였어요. 그때 메가스터디보다 앞서 동영상 제작한 업체가 많았는데 전부 그런 식이었죠. 저 혼자만 '공부가 재미있다는 걸 보여주자'고 주장했죠."

    ―수긍하던가요?

    "끝까지 말을 안 듣기에 '주식 수(數)로 하자'고 밀어붙였죠. 그래서 현장 강의를 라이브로 찍어 내보내게 된 겁니다. 대박이 난 거죠. 15분짜리 동영상 내보낸 회사들은 다 망했어요."

    ―지금 메가스터디 고등부만 강좌가 2500개죠. 어떻게 우수 강사들을 모았습니까.

    "처음에는 각 과목에 전국 최고의 에이스를 한 명씩만 모아 시작했어요. 최고의 강사는 강의를 할수록 학생들의 기(氣)를 빨아들여 체력이 보강됩니다. 강의 끝날 때 녹초 되는 강사는 에이스가 될 수 없습니다. 강사 스카우트할 때 그 기준에 따르죠."

    ―본인이 소심하다고 했는데 지금 보니 결단이 빠른 것 같습니다.

    "소심하지만 결단력이 있기도 하죠. 고민을 계속 하다가도 마지막 순간에는 굉장히 냉정하게 결정하는 편이죠.

    ―회사를 만든 지 10년이 안 돼 몇천억대 거부(巨富)가 됐는데 행복하십니까.

    "92년에 둘째 아이 죽으면서'행복해지겠다'는 욕구를 버렸습니다. 하도 엄청난 일을 당하고 나니''내 인생은 이제 손해 볼 거 다 봤다'라는 생각이 들고 세상에 초탈(超脫)해졌다고 할까요. 인생의 행복 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진 강박관념이라고 봅니다. 돈 벌었다고 달라진 건 없습니다."

    메가스터디 회사 소개는 이렇게 시작된다. "1232년 고려 사람들이 '남명천화상송증도가'와 '고금상정예문'을 금속활자로 간행한 이래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지식과 교육은 일반 대중들에게 급격히 확산됐습니다. 21세기 우리는 제2의 금속활자 혁명의 현장에 있습니다. 특정 지역에서만 얻을 수 있는 교육 정보를 전국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은 그럴싸한데 그래도 메가스터디는 과외 재벌 아닙니까? 학생 괴롭히는 입시제도 양산해내는 교육부가 은인(恩人)이잖아요.

    "저는 우리 교육 정책의 부산물로 메가스터디가 성장하는 건 원치 않습니다. 사교육 공화국이라는 오명도 사라져야 한다고 봐요. 학생들이 학원을 너무 많이 다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고민하고 해보는 능력이 떨어지게 되죠."

    ―말은 그렇게 해도 메가스터디 매출이 줄어들면 속이 쓰릴 텐데요.

    "저는 이미 오프라인 학원은 학원에 나올 수밖에 없는 재수생 위주로 바꿨어요. 학원생의 65%가 재수생입니다. 반면 온라인시장을 통해 학원비의 4분의1 가격에 강남 최고 강의를 전국 어디서나 들을 수 있잖아요. 과외의 지역 불평등은 우리가 해결했다고 자부합니다."

    메가스터디는 고등부, 중등부에 이어 의·치학 전문대학원 진학자를 위한 파레토 아카데미, 7·9급 공무원 수험생을 위한 베리타스 같은 자회사를 만든 데 이어 중국·일본 시장 진출도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세계 최강의 사교육 열풍이 역설적으로 세계 최강의 사교육 회사를 낳은 토대가 된 것이다.

    아폴로그룹 같은 세계적인 투자 회사는 아시아에 1조원 펀드를 만들었는데 메가스터디를 주로 매수하고 있다고 한다. 메가스터디의 총주식 가운데 51% 이상도 외국인들이 가지고 있다. 국내에서 아직 메가스터디는 '과외재벌' '사교육기업'쯤으로 취급되지만 세계는 "한국 선생들이 세계에서 가장 잘 가르친다"고 인정한 것이다.

    앞으로의 구상에 대해 묻자 손 대표가 "매년 수백만 명이 응시하는 미국 SAT시험에서 한국 학원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주목하고 있다"고 말할 즈음 줄곧 인터뷰를 '감시'하던 손은진 전무가 오빠의 말을 제지하고 나섰다. '골드미스'로 오빠를 돕는 노동신문 기자 출신의 이 여동생은 오빠에게 주식을 한 주도 못 받았지만 경영 기밀이 공개될 것 같자 몸이 단 것 같았다.

     


    ◆손주은 대표 

    손주은 메가스터디 대표는 1961년 3월 경남 창원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6남매의 교육을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는 전형적인 맹자형(孟子型)이었다고 한다. 손 대표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교사들은 "아이의 능력이 4학년 수준"이라며 월반(越班)을 제의했다고 한다. 부모들은 4학년에 올라가면 '왕따' 당할 것을 염려해 3학년으로 월반시켰다.

    학생 가르치는 것으로 세계 최고임을 자부하는 손 대표지만 중학생, 초등학생 자녀 교육은 직접 하지 못한다고 한다. 성적을 묻자 "반에서 5등 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술은 전혀 못하고 50㎏대이던 몸무게가 80㎏대까지 치솟자 요즘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양재천을 따라 걷고 있다.

    욕을 잘한다는 지적에 손주은 메가스터디 대표는 유인자능호인능오인이라는 공자 말씀을 칠판에 적었다. / 최순호기자chois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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