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이회영·시영 형제

입력 2008.04.18 22:03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의 아들 여섯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직후인 1910년 12월 수십 식솔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이 서울을 떠나 자동차·마차·썰매를 바꿔 타며 신의주를 거쳐 한 달여 만에 도착한 곳은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후손으로 10명의 재상을 배출한 명문대가 사람들이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세우려고 옮겨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민족지사들이 뒤를 따랐다.

▶이씨 형제들의 이주를 주도한 이는 넷째 회영(會榮)이었다. 일찌감치 개화와 민족운동에 뛰어들어 신민회 창립의 주역이었던 그는 나라가 없어지자 만주로 활동무대를 옮기기로 결심했다. 둘째 석영(石榮)이 일가인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의 양자로 들어가 물려받은 2만 섬 재산을 처분해 이주 자금을 댔다. 과거에 급제해 평안도 관찰사, 한성재판소장을 지낸 다섯째 시영(始榮)을 비롯해 다른 형제들도 기꺼이 따랐다.

▶이회영 형제들은 이상룡 이동녕과 함께 1911년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를 세웠다. 전자는 이주 한인의 정착과 단결을 이끄는 조직으로 만주지역 민족운동 효시로 평가 받는다. 후자는 1920년 일본군 압력으로 폐교될 때까지 독립군 3000여명을 배출했다.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핵심전력이 거기서 길러졌다.

▶이회영은 아나키스트가 돼 활동하다 1932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사했다. 다른 네 형제도 중국 전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세상을 떴다. 6형제 중 살아서 조국 땅을 밟은 이는 이시영뿐이다. 3·1운동 후 임시정부에 참여해 법무총장·재무총장·감찰위원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으로 선출됐다가 1951년 이승만의 비민주적 통치에 항의하며 사임했다.

▶1953년 4월 84세로 별세한 이시영은 서울 정릉에 묻혔다가 수유리 북한산 기슭에 이장됐다. 이시영의 아들들이 세상을 떠난 뒤 올해 99세 된 둘째 며느리가 어렵게 살며 묘소를 돌보고 있다. 유족들은 이시영의 묘를 부통령에 걸맞게 국립묘지에 만들어 주기를 원하고, 그게 어려우면 지금 묘소를 국가가 관리해 달라고 한다. 올해 건국 60년 행사를 준비한다는 정부가 '건국 부통령' 묘소는 나 몰라라 해서는 안 된다. 후손에게 송곳 하나 꽂을 땅도 남겨주지 않았을 만큼 곧았던 이시영 선생에게 대한민국이 최소한의 예의는 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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