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아닌 '어린왕자' 상표권 분쟁… 왜?

조선일보
  • 박영석 기자
    입력 2008.04.13 23:23

    생텍쥐페리 재단과 독점 계약한 국내 업체
    "상표권 행사하겠다" 갑자기 강경
    출판계 "외국의 로열티 장사에 휘말리고 있다…
    출판사들 연계해 상표권 무효소송 준비"

    SOGEX가 국대 대리인을 통해 서점에 보낸 통고서와 상표 등록된 《어린 왕자》의 한글·프랑스어 제호.
    국내 대형서점들이 요즘 《어린 왕자》 때문에 난리가 났다. 《어린 왕자》 책들 중 '상표권 침해' 문제로 번질 수 있는 책들을 분류해 해당 출판사에 반품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교보문고는 어학교재까지 합해 100종 넘는 《어린 왕자》 책을 반품하는 데 1주일 넘게 걸렸고, 인터넷 상에서도 시비거리가 될 만한 책들을 지우고 있다고 밝혔다.

    《어린 왕자》 도서 회수 사태를 부른 것은 동화 《어린 왕자》를 대표하는 생텍쥐페리의 삽화 2점과 한글·프랑스어로 된 제호(서체)의 상표권 때문이다. 책 외에도 각종 문구·완구·의류 제품, 소아과·치과 병원 간판 등에서 그 동안 상표권 로열티를 지급하지 않고 사용해온 한국의 관행을 생텍쥐페리 유족 재단인 SOGEX에서 정식으로 문제 삼은 것이다.

    SOGEX는 《어린 왕자》의 생텍쥐페리 삽화를 상표로 등록해 프랑스는 물론 미국·일본 등 각국에 대해 상표권을 행사하고 있다. 유명 해외 패션 브랜드의 국내 라이선스 사업을 하는 GLI 컨설팅이 한국 내 공식 에이전트이고, 인피니스가 GLI측 법률 대리인을 맡고 있다. 삽화와 제호의 국내 상표권 만료 기간은 각각 10년이다. 《어린 왕자》 주인공이 망토를 두른 채 칼을 쥔 이미지는 2013년,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이미지는 2016년, 한글 제호는 2015년까지로 돼 있다.

    SOGEX는 전세계적으로 상표권 기간이 만료된 이미지에 대해 상표 등록을 연장하고 상표권 지정 대상도 확대해 왔다. 상표권 지정 대상은 서적·연감·화보·연하장 외에도, 의류·시계·가방·화장품·향수와 포장지·크레용·펜대·연필·필통 등을 포함하고 있다.
    국내에 처음 상표로 등록된 생텍쥐페리의 삽화는 어린 왕자가 별을 바라보는 이미지로, 그 시점은 1996년 10월이다. 10여 년 간 '상표권 침해'를 문제삼지 않던 SOGEX가 강경 대응으로 돌아선 것은 국내 업체가 SOGEX와 독점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문구·출판업체인 아르데코7321은 지난해 수첩·다이어리·책 등 10여개 아이템에 대해 계약을 맺고 어린 왕자 다이어리 등을 판매 중이다. 이 업체는 《어린 왕자》 출간을 앞두고 상표권을 무단 사용한 책이 다량 출간돼 있는 도서 시장에 대해 법적 조치를 요구했다고 GLI 컨설팅 측이 밝혔다.

    조귀용 GLI 컨설팅 대표는 "상표권은 보호 받아야 하는 게 당연하다"며 "《어린 왕자》 스토리를 문제 삼는 게 아니라 상표 등록된 이미지를 도용 또는 모방했을 경우 법적 조치를 하겠다는 뜻이다"고 말했다.

    그러나《어린 왕자》를 출간한 국내 출판 관계자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출판인들은 "책 판매를 중지하려면 통고서만 보내서는 안 되고 법원을 통해 판매정지 가처분 신청을 해야 하는데 절차상으로도 문제가 있다"며 "외국의 로열티 장사에 휘말린 국부 유출 사태로 봐야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어린왕자》번역서와 연구서도 낸 시인 최복현씨는 "64년 전 별세한 작가의 삽화를 상표로 등록해 반품하다니 기가 찬다"며 "어린 왕자는 이제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에 가깝다"고 말했다. 박상희 비룡소 대표는 "저작권은 저자 사후(死後) 50년까지 인정되므로 유통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법률 조언을 받았다"며 "《어린 왕자》를 다시 서점에 공급할 계획이고 법적인 조치를 취할 경우 법으로 맞서겠다"고 밝혔다.

    전준배 문예출판사 이사는 "상표로 등록돼 있으니 해당 상표가 포함돼 있는 책을 서점에서 빼내야 하는 현실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모두 다 알고 있는 캐릭터에 상표 등록을 해 준 특허청에 잘못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상표권 무효소송을 내기 위해 출판사들과 협의하고 있다"고도 했다.

    문제는 특정 상표의 독점권을 인정해 이를 포함한 책의 유통까지 막을 수 있는지 여부다. 전문가들도 이에 대해 엇갈린 견해를 보이고 있다. 조원희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일반적으로 도안 자체가 누가 그렸는지를 금세 알아볼 수 있다면 상표권이 인정된다"고 말했다. 'X라는 디자인(삽화·서체)은 제작자 Y의 작품'이란 등식이 성립되는가 하는 주관적 기준이 적용되고, 따라서 "대중(수요자)이 《어린 왕자》 삽화를 생텍쥐페리 작품이라고 인식하고 있다"고 법원이 판단하면, 정식 계약을 맺지 않고 삽화를 쓴 《어린 왕자》는 판매할 수 없다.

    반면 구기완 특허법인 무한 변리사는 "상표권 침해는 상표로 사용했을 경우에 해당한다"며 "상표 등록된 그림이라 하더라도 (아르데코 7321이 아닌 출판사 등이) 자신의 상품을 구별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면 《어린 왕자》 책의 삽화는 상표권 침해로 해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국내 상표 등록된 생텍쥐페리의 삽화와 《어린 왕자》프랑스어 제호. /GLI 컨설팅 제공
    《어린 왕자》는 뛰어난 관찰력과 아름다운 서정, 독창적인 삽화로 '어른을 위한 동화'로도 불리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공군 조종사로 제2차 대전에 참전했던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1900~44)가 1943년 발표했다. 그는 발표 이듬해 정찰 비행 중 실종됐다.

    《어린 왕자》는 국내에서 비룡소·대교베텔스만·문학동네·지경사·도솔·소담·문예출판사·삼성출판사 등 지금까지 600여개 출판사에서 출간한 것으로 알려졌다. 매년 10만~20만권 가까이 팔리고, 현재 유통 중인 책이 190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전준배 문예출판사 이사는 "문예출판사가 1972년 3월 《어린 왕자》를 국내 처음 소개한 이후 36년 동안 지금껏 100만권 이상 판매했고 지금도 꾸준히 팔려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정대용 비룡소 이사는 "《어린 왕자》는 아이들 필독서여서 국내 총 누적 판매량이 500만권이 넘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BR>"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에게서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내 비밀은 이런 거야. 매우 간단한 거지.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만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은 법이야." 저자는 이런 명문(名文)들을 작품에 남겼다. 생텍쥐페리의 문장을 활용한 어학교재와 CD·DVD 제품도 많이 나와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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