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데뷔 40주년 맞은 조용필 "40년? 그거 숫자에 불과해요…"

조선일보
  • 한현우 기자
    입력 2008.04.11 15:31 | 수정 2008.04.12 10:01

    폭우 속 수만 관객 붙드는 마력의 소유자
    90년대 초, 25억원 짜리 밤무대도 거절
    고3 때 '비틀즈'에 빠져 가출… 음악 독학
    "내 모든 것은 관객의 힘… 관객이 기뻐하면 그렇게 힘이 날 수가 없어"
    "2003년 35주년 기념 공연, 인생에서 승리한 내 생애 최고의 날이었지"

    데뷔 40주년을 맞은 조용필(58)을 지난 4일 서울 역삼동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금요일 오후 강남은 자동차 지옥이다. 그 지옥을 빠져나와 식당에 도착하니 환갑을 눈앞에 둔 가왕(歌王)이 먼저 도착해 숯불에 등심을 굽고 있었다.

    조용필은 3시간 공연을 히트곡으로만 채울 수 있는 대한민국 대표가수다. 국내 최초로 음반 판매량도 1000만 장을 넘겼다. 올림픽 주경기장을 채운 4만5000여 관객을 폭우 속에 꼼짝 못하게 가둬둘 수 있는 마력(魔力)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기자는 2002년부터 조용필과 알고 지내왔다. 조용필 역시 기자를 동생처럼 대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번 인터뷰를 '공적인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오늘은 공식 인터뷰니 그간 물어보지 못한 것을 물어볼 겁니다.

    "무슨 소리야? 그런 게 뭐가 있어?"

    ―데뷔 40주년 인터뷰니까 그동안 못 듣고 못 쓴 얘기를 좀 해주시죠.

    "물어보세요, 뭐든지. 허허허."

    긴장을 만들어보려는 수작을 그는 허허실실 넘겼다.

    고교 시절 외국 음악의 영향으로 기타를 처음 잡은 조용필이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끊임없이 자신을 단 련시켜 최고의 뮤지션 자리에 오른 그는“최고의 비 결 같은 것은 없다. 오로지 연습, 연습뿐이다”라고 말 했다.
    ―이런저런 '신화'가 많습니다. 예전 어느 나이트클럽에서 엄청난 개런티를 주겠다고 했는데 거절한 적도 있다면서요.

    "아, 그거? 90년대 초쯤인가, 30회 출연에 25억원 주겠다고 했지. 그때 한 이틀 갈등을 했던 게 사실이에요. 액수가 워낙 크니까. 그렇지만 당시 밤무대는 물론이고 방송도 일절 않겠다고 선언을 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어. 공연만 하겠다고 결심한 뒤 밤무대에 서는 건 나를 배신하는 거지."

    한 회 출연에 서너 곡 부르고 내려오는 나이트클럽 무대는 당시로선 많은 가수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90년대 초 개런티로 25억원이면 요즘 시세로 50억원을 훨씬 넘는다는 게 음악계 사람들의 말이다. 그 당시 조용필은 전국 체육관 공연을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관객이 적었다고 했다.

    그는 "어떤 도시에 가면 관객이 절반밖에 차지 않았다. 히트곡도 많고 인기도 있는데 왜 객석이 차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이 안 왔다"고 했다. 그런 불면(不眠)을 뚫고 온 거액의 밤무대 스카우트 제의를 그는 냅다 차버린 것이다. 최고가 되기 위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았던 것이다.

    예술가들이 대개 그렇듯 조용필은 자신을 최고의 음악인으로 여긴다. 스스로 그렇게 말한 적은 없으나 음악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그 자부심은 천재적인 자신의 음악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용필은 악보를 한 번 보면 노래를 부르고, 어떤 노래든 한 번 들으면 바로 악보를 그리는 재능이 있다.

    공연기획사 서울기획 이태현 사장의 증언이다. "일본에 처음 진출했을 때였어요. 그때 외국 가수가 NHK에 출연하려면 일본 노래 한 곡을 부르는 게 관례였지요. PD가 일본 노래 악보와 카세트테이프를 가져왔는데 조용필씨가 노래를 딱 한 번 듣더니 '이건 필요 없다'며 테이프를 돌려주는 거예요. 그때 일본인 PD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저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 하는 놀람과 과연 한 번 듣고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뒤섞인 얼굴이었죠. 물론 그 노래는 기막히게 잘 불렀습니다."
    지난 9일 서울 서초동에 있는 연습실에서 조용필이 혼자 기타를 조율하고 있다. 수만 명씩 모이는 화려한 무대에 서려면 이렇게 고독한 연습을 한 달 이상 해야한다. /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초견(初見)에 악보를 읽지 못하고, 초청(初聽)에 악보를 쓰지 못하면 뮤지션으로 인정하지 않으시죠?

    "그런 건 아니야. 세계적으로 훌륭한 뮤지션 중엔 악보를 전혀 읽지 못한 사람도 많았어요. 그렇지만 그들이 악보를 읽거나 쓸 수 있었다면 더 훌륭한 음악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해."

    경동고 3학년이던 1968년 조용필은 '벤처스'와 '비틀스'에 빠져 살았다. 결국 "음악을 하겠다"며 가출해 미군 클럽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화성학(和聲學)을 독학했다. 종이를 기다랗게 이어 붙여 건반을 그려 넣은 '종이 피아노'로 음계와 화성을 깨우쳤다.

    음악에 대한 조용필의 자부심이 워낙 강하다 보니 주변에서 '금기 질문' 중 하나로 꼽는 게 있다. 조용필을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과 비교하는 투의 질문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의외의 대답을 했다.

    ―신중현씨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말 훌륭한 음악이지.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나왔을 때, 이게 컨트리인지 뭔지 잘 모르겠는데 지금까지 오고 있잖아. 신중현씨가 작곡한 김추자와 펄시스터즈 노래들은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 그 당시에 누가 그런 음악을 하려고 했어."

    ―그런데 왜 신중현씨와 관련된 질문을 싫어한다는 말이 나오나요.

    "싫어한 적 없어요. 다만 나와는 음악 색깔과 정서가 달라. 물론 근본적으로는 같지. 추상적인 감정을, 사랑과 기쁨, 슬픔을 음악으로 만들어 내고 뿌리가 록 음악에 있다는 것이 같아요."

    그의 40주년 기념 공연(문의 1544-1555)은 5월 24일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다. 그 다음 주말 대전을 시작으로 전국 투어가 시작된다. 화제는 자연스레 지난 2003년 폭우 속에서 벌어진 35주년 공연으로 이어졌다.

    "이건 정말 처음 하는 얘기야. 공연 마지막에 트랙을 한 바퀴 돌았잖아. 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나는 승리했다. 내 인생에서 승리했다.' 그 감동은 아무도 몰라. 내가 음악을 한 이래 최고의 날이었어요. 평양 공연도 아니고 그날이 최고였어."

    이 말을 할 즈음 조용필은 소주를 몇 잔 넘긴 상태였다. 기자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질문을 해야 했다. 바로 그의 첫 결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최정상의 인기를 누리던 1984년 3월 박지숙씨와 느닷없이 결혼을 했으나 3년 뒤 이혼했다.

    ―박지숙씨와의 결혼의 실체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죠?

    "그건 나중에 내 회고록에 써야 할 내용이야."

    ―결혼식에 하객도 없고 기자만 잔뜩 있었잖아요. 뭔가 사연이 많은 것 같은데요.

    "나는 그게 결혼식인 줄도 모르고 갔었어."

    ―그럼 '이런 결혼식은 안 한다'고 했어야 할 것 같은데….

    표정이 약간 굳어진 조용필이 말했다. "그때는 매스컴이 너무나 무서웠어."

    당시 조용필 나이 서른넷. 연말 방송사 가수왕을 모조리 휩쓸고 6집 '눈물의 파티'를 새로 내놨을 때다. 그 인기 주변엔 어김없이 스캔들로 먹고사는 연예 주간지들이 있었다.

    갑작스런 결혼과 그의 일본 진출은 거의 비슷한 시기 이뤄졌다. 그는 이혼 후에 한동안 혼자 살다가 소개로 만난 재미교포 안진현씨와 94년 3월 재혼했다. 미국에서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던 안씨와 한국에서 활동하는 조용필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2003년 1월 조용필은 다시 한번 아내와 이별했다. 심장병을 앓던 안씨가 갑자기 숨진 것이다. 안씨는 조용필의 선산이 있는 경기 화성에 묻혀 있다.

    ―요즘도 꿈에서 부인을 보시나요.

    "요즘엔 안 나타나요. 마누라 가고 나서 한 2년 반쯤은 꿈에 자주 나타났어. 이제 그 사람도 안심이 되나 봐."

    ―선산엔 자주 가십니까.

    "요새는 좀 뜸해. 한 달에 한 두 번쯤 가요. 예전엔 일주일에 한 번씩 갔지. 주변에서 너무 자주 가지 말라고 해서…."

    2년 전쯤 "조용필이 한 방송인과 사귄다더라"는 소문이 돌았었다. 조용필은 "내가 결혼한다는데?" 하며 웃었고, 그 방송인은 사석에서 불쾌감을 표하기까지 했다.

    ―다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식으로 받아들이던데요.

    "나도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애인하고 밥도 같이 먹으러 다니고 그러고 싶어. 중매 선다는 사람도 있고."

    ―그럼 결혼할 생각이 있긴 하세요.

    "아니지. (하늘에 있는) 마누라한테 혼나. 이제 혼자 사는 게 편하고." 조용필은 안씨가 저 세상으로 간 후 "앞으로 심장재단을 만들고 죽을 때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했다. 그만큼 아내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것이다.

    조용필의 5월 공연은 작년 12월 28·29일 체조경기장 공연 후 5개월 만이다. 당시 공연을 마친 조용필은 지인 몇 명과 집 부근에서 뒤풀이를 했다. 피로에 알코올이 겹쳐 녹초가 된 그를 부축하고 집 앞에 당도한 시각이 새벽 2시40분. 골목에 서 있던 승용차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여자 다섯 명이 뛰어나왔다. 팬들이었다. 이들은 "오빠, 왜 이렇게 술 많이 드셨어요", "건강하셔야 돼요" 하며 울먹였다.

    사실 조용필의 팬은 없는 데가 없다. 집 전화번호를 바꾸면 전화국에 있는 팬이 번호를 알아내고 비행기를 타려면 항공사에 있는 팬 때문에 공항에 꽃다발을 든 팬들이 나타난다. 조용필 팬은 끊임없이 자기증식하고 있다. 2004년엔 중3과 고1 학생들로 이뤄진 '광클(광적인 팬클럽)'이 생겼다. 이'어린 팬들' 덕에 조용필은 오랜만에 종이학 수천 마리를 선물로 받았다.

    ―잊을 수 없는 팬 이야기 좀 해주시죠.

    "80년대 초 부산 공연을 갔을 때야. 공연 끝나고 호텔에 가서 씻으려고 속옷만 입고 욕실 문을 열었는데, 그 안에서 여자애들이 와장창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한 열 명은 되겠더라고."

    ―어떻게 거기 있을 수 있죠?

    "몰라, 그건 나도. 하여튼 내 방에 들어와서 숨어있다가 내가 나타나니까 겁이 나서 그랬겠지."

    그는 "팬들이 밤늦게 집 앞에서 기다릴 때는 고맙기도 하지만 걱정도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조용필은 "팬들에게 항상 감사한다. 팬이 멀어지면 나는 끝이다"라고 했다.

    늘 팬들에 둘러싸여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조용필의 사는 모습은 '외로움'을 연상시킨다. 결국 매일 그가 돌아오는 곳은 혼자 살고 있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방 다섯 개짜리 빌라다. 그곳에는 사람 대신 운동기구만 가득하다. 그는 매일 아침 이곳에서 빨리 걷기 운동으로 땀을 빼며 하루를 시작한다. 조용필의 스태프를 제외하면 이 집을 드나드는 사람은 출퇴근하며 가사를 돌봐주는 아주머니가 유일하다. 국가대표 축구팀 허정무 감독이 바로 위층에 사는 이웃이다.

    그의 집 거실에는 대형 TV가 있지만 조용필은 화면 없이 음악만 틀어주는 위성방송 음악채널을 듣거나 동물 다큐멘터리를 본다. 그는 "복잡하고 시끄러워서 드라마나 쇼는 보지 않는다"고 했다. 차 안에서는 미군방송(AFN)이나 KBS 1FM을 늘 켜놓는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 몇 안 되는 그의 도락(道樂)은 술과 담배, 싱글 실력의 골프다. 그 가운데 담배는 3년 전 끊었다.

    조용필은 '앳킨스'라는 밴드로 데뷔해, '파이브 핑거스', '김 트리오', '조용필과 그림자'를 거쳐 오늘의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꾸렸다. 일본 활동 때는 일본인 밴드 이름은 '조용필과 괜찮아요'였다. 18집의 정규앨범을 냈고, 94년에 이미 음반 총 판매량이 1000만장을 돌파했다.

    "밴드 이름을 '그림자'로 했다가 너무 어둡지 않나 해서 '위대한 탄생'이란 이름을 내가 지었어요. 주변에서 '별로'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 같아도 유명해지면 진짜 좋은 이름'이라고 주장했어. 무지하게 건방질 때였지. 하하."

    그는 '건방지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자부심의 겸손한 표현이다. 작사가 양인자씨는 조용필 데뷔 초기인 70년대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방송국 대기실에서 조용필씨를 봤는데, 밴드 멤버 한 명이 늦게 왔어요. 그때 용필씨가 그 사람에게 달려가 사정없이 발로 걷어차면서 소리쳤지요. '정신 차려!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이야!'"

    ―처음 가출할 때 40년이나 음악을 할 거라고 생각했나요.

    "절대로 생각 못했지. 우리는 비틀스 세대니까 그냥 하고 싶은 건 해야 했을 뿐이지. 모든 게 관객의 힘이에요. 무대라는 게 관객과 음악을 공유하면서 즐거워하는 거잖아. 관객이 기뻐하면 그렇게 좋고 힘이 날 수가 없어."

    ―데뷔 40년을 맞는 감회가 있을 텐데요.

    "나는 현재진행형이에요. 한창 음악하고 있는 사람한테 왜 자꾸 40년을 물어봐. 40년은 숫자일 뿐이지."

    관객 4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번 공연 티켓은 이미 2만장 가량 팔려나갔다고 한다.

    기자가 조용필을 처음 만난 건 2002년 10월이었다. 오후 7시30분 한 일식집에서 시작한 인터뷰는 새벽 3시 그의 집에서 끝났다. 빈 맥주 캔이 40개쯤 됐다. 7시간30분 동안 조용필은 오로지 음악 이야기만 했다.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기자를 좋게 본 모양이었다. 이후 수시로 "어디 있느냐"는 전화가 왔다. 한 잔 하자는 뜻이었다.

    처음엔 "조용필이 부르는데 가봐야지"라고 했던 아내는 그 주기가 짧아지자 "조용필은 친구 없어?"라고 물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음악인들은 수십 년을 그와 알고 지냈으나 여전히 그를 어렵게 생각한다. 불 같은 성격을 알기 때문이다. 조용필이 오십 줄에 들어선 후배 음악인에게 "네가 음악에 대해서 뭘 알아?" 라고 호통을 치는 걸 본 적도 있다. 그런데도 혼쭐난 후배들은 며칠 뒤면 실실 웃으며 조용필 앞에 나타난다. 그 카리스마를 감당할 수 없을 뿐더러, 조용필과 함께 작업하면 자신들의 음악도 완벽해진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국민가수, 가왕, 라이브의 제왕… 그를 부르는 호칭은 많지만, 미당(未堂) 서정주가 칭한 '당대 최고의 명창'이 소박하고 명쾌하다. 30년을 한 세대로 치면, 그는 이미 한 세대를 10년이나 넘겨 여전히 최고의 자리에 서 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떤 이름보다 '조용필'로 부를 때 가장 정확하게 묘사된다. 조용필이 테이블 건너편에서 "더 물어볼 것 없느냐"고 빙그레 웃으며 잔을 건넸다.


    →가수 조용필…

    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군에서 태어난 조용필은 고3이던 68년 미8군 클럽 무대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했다. 곧이어 타악주자 김대환(2004년 작고)의 눈에 띄어 '김트리오' 멤버이자 가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80년 정규 1집을 내기까지 다양한 편집음반을 내놓았다. 첫 히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76년 발표했다.

    1980년 '창밖의 여자'로 스타덤에 올랐고, 함께 실린 '단발머리'는 당시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전자음으로 충격을 줬다. 1981년 한국 대중가수로는 처음 미국 카네기홀 무대에 섰으며, 1983년부터 일본 NHK 방송에 출연하는 등 해외 진출을 본격화했다. 1990년대 초까지 일본과 미국을 돌며 라이브 무대에 섰고, 그 사이 '촛불' '고추잠자리' '못 찾겠다 꾀꼬리' '친구여'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등 숱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1980년 정규 1집 음반을 냈을 때의 조용필. 서른살인데도앳된 모습이다(왼쪽 YPC 제공). / '못찾겠다 꾀꼬리'가 실린 1982년 4집 앨범 표지의 조용필.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다(오른쪽 조선일보DB)
    1993년 방송 출연 중단을 선언한 조용필은 대형 공연장 투어에 나섰다. 라스베이거스와 브로드웨이 쇼를 두루 섭렵하며 무대연출에 공들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1999년 대중가수로는 처음 예술의전당 오페라홀에서 3일간 공연한 뒤, 2004년까지 매년 말 예술의전당 무대에 섰다. 특히 2004년 공연은 11일간 연속 매진이었다.

    2003년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35주년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낸 그는 2005년 전국 월드컵 스타디움 투어를 전석 매진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현재 40주년 기념공연과 19번째 새 음반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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