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王의 兄으로 산다는 것 외롭고 피말리는 줄타기

조선일보
  • 이한우 기자
    입력 2008.03.28 15:32 | 수정 2008.03.29 16:58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왕권 경쟁서 밀려난 한 추스린 세종의 두 형은 천수 누려
    미련 못버린 임해군은 죽임 당해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 차도다.

    낚시 드리우나 고기 아니 무는구나.

    무심(無心)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

    한명회의 계략으로 세 살 아래 아우인 성종에게 왕위를 넘겨줘야 했던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1454년~1489년·단종2년~성종19년)의 절창(絶唱)이다. 호 풍월정(風月亭)에도 '달'이 들어있다. 태양이 아닌 달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해야 했던 그만의 고뇌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학문과 술, 풍류로 달랬다고 하지만 30 생을 마친 데서 금상(今上·현재의 임금)의 친형으로 산다는 것의 고역(苦役)을 결국은 넘어서지 못한 게 아닐까 감히 추측해 본다.

    ■■

    울억(鬱抑)의 크기로 따지자면 세자로 있다가 쫓겨난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1394년~1462년·태조3년~세조8년)가 월산대군을 능가한다. 양녕(讓寧)이란 봉호(封號)도 태종18년 폐세자 될 때 태종이 내려준 것이다. 라틴어 경구 'Nomen est omen(이름은 암시다)' 그대로다. 왕위를 양보(讓步)했으니 평안하게 살아라! 주색잡기(酒色雜技)는 여전했으나 권력에는 거리를 뒀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시양(金時讓·1581년~1643년)의 문집 '자해필담(紫海筆談)'에 실린 양녕대군의 시다.

    산안개로 아침에 밥 짓고/山霞朝作飯

    담쟁이덩굴 사이로 보이는 달로 등불 삼네/�月夜爲燈

    외로운 바위 아래 홀로 누워 밤새우니/獨宿孤巖下

    오직 탑 한 층이 있을 뿐/惟存塔一層

    금상(今上)의 형님으로 살아야 하기는 둘째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1396년~1486년·태조5년~성종17년)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울억이 폐세자 된 양녕보다는 덜했을 것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李肯翊·1736년~1806년)이 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효령과 관련된 일화를 전한다. 양녕의 실덕(失德)이 계속되자 효령은 장차 자신에게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깊이 들어앉아 삼가고 글읽기에 몰두했다. 양녕이 효령의 방을 지나다가 그것을 보고는 발로 차면서 말했다. "어리석다. 너는 충녕에게 성덕(聖德)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크게 깨달은 효령은 그 길로 자주 가던 절에 달려가 하루 종일 북을 두드렸다. 그래서 이긍익이 이 글을 쓰던 조선 후기까지도 뭔가 부드럽고 축 늘어진 것이 있으면 "효령대군 북 가죽 같다"는 말이 있었다. 그 당시 효령이 절의 북을 하도 두드려 북 가죽이 부풀어오를 만큼 늘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욕심을 비운 효령은 90을 넘어 살았다.

    ■■

    1567년 명종이 후사(後嗣) 없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 중신들은 중종의 후궁 안씨의 손자 하성군으로 하여금 대통(大統)을 잇게 했다. 그가 선조다. 덕흥군의 세 아들 중 막내였다. 그의 두 형 하원군과 하릉군은 '금상의 친형'으로 조용히 일생을 보냈다. 애당초 하원군이나 하릉군 모두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에 양녕이나 월산 같은 울억은 없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에게도 임해군이라는 친형이 있었다. 정비(正妃) 박씨가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어차피 후궁(공빈 김씨)의 자식 중에서 왕위를 이어야 한다면 임해군이 서열상으로 광해군보다 우선이었다. 그러나 임해군의 난행(難行)을 부정적으로 본 선조에 의해 세자 책봉 때 밀렸고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광해군이 후계자를 차지했다. 임해군은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고 결국 1609년(광해군1년) 사사(賜死)되고 만다.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는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난 정원군의 장남이었기 때문에 친형님은 없었다.

    1863년 철종도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의 묵계로 흥선군의 열두 살짜리 둘째 아들 이재황(李載晃)이 대통을 이었다. 그가 고종이다. 그에게는 친형 이재면(李載冕·1845년~1912년)이 있었다. 이재면은 정치에 적극 참여해 이조 병조의 판서 등을 두루 지냈다. 그는 위험한 줄타기에도 불구하고 노련한 처신으로 천수(天壽)를 보존했다. 그러나 1910년 나라가 망할 때 흥친왕(興親王)으로 책봉돼 친일파로 몰리게 된다.

    다시 조선초다. 정종(定宗)은 동생 태종 이방원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20년 가까이 '형님 상왕(上王)'으로 불편한 삶을 살다가 1419년(세종1년)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15군(君) 8옹주(翁主)를 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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