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300년 가업을 피할 순 없었어"

입력 2008.03.07 14:29 | 수정 2008.03.08 13:39

"가난해도 이게 사람답게 사는 길이니까"
[박종인이 만난 외길 인생]
활 만드는 남자… 안동권씨 충일공파 12대 弓匠 권무석씨

권계황(權繼黃)은 조선조 숙종(1674~1720) 때 사람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양에 살던 권계황은 일찌감치 경상도 예천으로 내려가 활을 만들기 시작했다. 소뿔을 다듬어 만드는 각궁(角弓)이다. 권계황은 그 활을 예천 관아에 납품하는 궁장(弓匠)이었다. 그가 죽자 아들이 활을 만들었다. 그 아들이 죽자 손자가 활을 만들었다. 그 손자가 죽자 또 그 아래가 활을 만들었고. 자, 그리하여 권계황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 안동 권씨 충일공파 12대 권무석(權武奭·65)이 지금 활을 만들게 됐다. 모든 게 광속(光速)으로 바뀌고 있는 이 시대에, 300년 동안 가업(家業)을 잇고 있는 무시무시한 고집쟁이 집안 이야기.


가난으로 가출·자살시도… 37세에 가업 이어 

1980년 추석, 고향 예천을 찾았던 권무석씨에게 17년 터울 큰 형(권영호·작고)이 말했다. "우리집 대(代)가 끊겼다." 남자는 으레 아버지를 따라 궁장(弓匠)의 길을 가는 게 권씨 집안 300년 전통이었다. 그런데 두 아들이 활 만들기를 포기하고 교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열두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활 만들기를 배웠지만, 형이 대를 이으면서 그는 활을 등지고 대신 버스 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권씨가 말했다. "정말 쩌릿하게 충격을 받았어요. 권씨 가문에서 활이 없어진다…." 며칠을 고민했다. 가난한 가업을 이을 것인가, 아니면 그저 평범하게 아내와 아이들이랑 알콩달콩 살 것인가. 누나도 반대했고, 아내도 반대했다. 그런데 그는 가업을 택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라고 그가 말했다.
조선 숙종 때 시작된 안동 권씨 충일공파의 활 만들기는 300년 지난 지금까지 이어졌다. 권씨 가문 12대 궁장(弓匠) 권무석씨가 활시위를 당기자 그 300년 내공(內功)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집이 가난해서 학교도 초등학교 4학년 때 그만뒀어요. 두 살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집은 가난하지, 어디 취직하려고 해도 학벌이 없지…. 무슨 인생이,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가출도 여러 번 했고, 자살 미수도 세 번 있었어요." 그때마다 어머니가 이렇게 아들을 달랬다. "제발 사람답게 살아라, 제발." "이미 사람인데 왜 사람 되라 하느냐"고 반항하는 아들을 남기고, 아들이 열여덟 살 되던 해 어머니마저 하늘로 갔다. 한탄하는 형님을 보고 있는데, "제발"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천둥소리를 내더라고 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두고 편히 돌아가셨을까… 바꿔서 생각하니까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노(老) 장인이 40대 기자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37세 버스 기사 권무석은 가업을 잇게 되었다.

형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기초부터 활을 다시 배웠다. 1986년 서울시 무형문화재 궁장 기능보유자인 장진섭(작고)씨로부터 또 배웠다. 장씨 또한 할아버지가 고종황제의 활을 만든, 궁장 집안이다. 그런데 두 아들이 가난을 버리고 다른 직업을 택했으니, 장씨는 유일하게 남은 전수자 권씨에게 모든 것을 가르쳤다. "쏴봐야 만들 수 있다"며 궁술도 배웠다. 전통활쏘기 기능보유자 장석후(작고) 선생에게 전통 사법(射法)을 배웠다. 그래서 서울 인왕산에 있는 활터 황학정에서 활을 가르쳤고, 1988년과 1992년 경찰대학과 육군사관학교에 궁도 강좌를 개설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육사에 제출한 이력서 학력란에는 '독학(獨學)'이라고 적었다. 내력을 알고서 인사 담당자가 "존경한다"고 했다. 권씨는 "내가 잘 살았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활 하나 값은 삼국시대나 지금이나 쌀 세가마" 

그가 만드는 활은 각궁(角弓), 소뿔로 만든다. 소뿔 중에도 탄력이 좋은 중국산 물소뿔이다. 길이 1m20 정도 되는 대나무에 소뿔을 잘라 붙이고, 소 힘줄을 덧대고 뽕나무, 참나무, 벚나무 껍질 따위 재료들을 붙이고 나면 활이 C자처럼 안쪽으로 휘어진다. 둥그렇게 휜 그 활을 반대쪽으로 휘어 활줄을 걸면 활이 완성된다. 그 만드는 방식, 1000년째 변함이 없다. 각각 재료를 붙이고 말리는 데 꼬박 석 달, 재료 준비와 가공에는 일 년이 꼬박 걸리니, 일 년에 50개 만들면 많이 만드는 것도 변함이 없다.

실학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최고의 무기는 조선의 활과 중국의 창, 일본의 조총"이라고 했다. 각국 최고이지만, 조총이 멀어야 50m 나가는 반면 조선 각궁은 400m 앞 물체까지 꿰뚫는다. 월남전 때 박정희 대통령이 미군 M16 소총을 들여와 한국형 소총 개발에 나섰듯, 청나라에서 언제나 공물로 각궁을 가져가 궁리를 했지만 나라가 망할 때까지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1000년째 변함 없는 것, 또 있다. 활 가격이다.
화살촉의 종류도 가지가지… 권무석씨가 만든 각궁(角弓)과 그가 수집한 각종 화살들. 왼쪽부터 조선시대 장군이 쓰는 의전용 화살, 공격용 화살, 1950년대 화살, 캘빈 소총 탄피로 만든 화살과 현대 화살.

"삼국시대 때부터 활 값은 하나당 쌀 세 가마예요. 조선시대에도 세 가마, 1950년대도 세 가마, 2008년에도 세 가마." 1000년 전 쌀 세 가마와 지금의 쌀 세 가마. 단위는 동일하되 가치는 하늘과 땅 차이다. "내 조카들이 그래서 활을 버렸어요. 우리 집사람이 반대한 이유도 그거고. 이제는 활 하나 팔면 친구랑 술 쎄게 한번 먹으면 남는 게 없어." 한때 전국에 60명 넘게 있던 궁장이 지금은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돈 안 되는 장인의 길이 험난하고 드물기에, 나라에서는 그들을 무형문화재로 만들어 명예와 경제를 후원한다. 권씨도 2000년 서울시로부터 무형문화재 23호로 선정됐다. 매달 지원금으로 100만원이 나온다. 그런데, "이게 잘못됐다"고 했다. "문화라는 것이, 전수가 되어야 문화지요. 전수자로 지정되면 매달 12만원이 나옵니다. 다 큰 성인이 다른 일 다 때려치우고 장인 공부를 하는데, 12만원이면 생계가 안 되지요." 전수자로 들어왔던 사람들이 6개월만 지나면 들고 왔던 보따리까지 집어 던지고 가버린다고 한다.


"무형문화재 전수자에 월12만원… 다 도망가" 

그런데도 그는 활을 만든다. "일단 굶어 죽지는 않았고, 또 이걸 하니까 외국에 전시도 하고 대접도 받고, 문화도 잇고 하잖소. 절대로 후회는 없어요. 한들 뭐해? 시간 되돌릴 수 있나?" 집안으로는 300년, 본인으로는 외도(外道) 15년을 제외하고 열두 살 때부터 지금까지 38년째다. 지독하다 못해 미쳤다. "'그래, 미치자, 안 미치면 이거 못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어요."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미쳐갔다. "활 없이는 4341년 조선 역사를 쓰지 못합니다. 주몽부터 이성계까지 모두 궁사였고, 외침 때는 활로 적을 물리치고 평화 시에는 활로 호연지기를 기르고 상무심을 단련했습니다. 농사문화보다 먼저 시작한, 조선의 뿌리문화예요." 물소뿔을 사려고 중국을 29번 들락거렸다. "한족 다음으로 많은 민족이 만주족인데, 자기가 만주족이라는 사람 딱 한 명 만났어요. 다 자기가 한족이라는 거예요. 왜? 그게 다 문화가 없고 전승이 사라졌기 때문이지." 그가 활에 미친 이유다. 활이 없어지면, 그에겐 조선이 사라진다.


"태권도처럼 세계에 국궁 가르치겠다" 미국으로 

예순다섯 된 권씨가 지난 6일 미국 워싱턴DC로 떠났다. 또 어딘가에 미쳐있다. 보따리에는 국궁 20개와 화살들, 그리고 영어로 번역한 궁술 교본이 들어있다. "궁술을 미국에 보급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허허벌판으로 들어가는 심정이지만, 자신 있다"고 했다. 예절을 가르치는 태권도가 미국에 인기리에 보급됐듯, 도(道)를 배우는 궁도(弓道)도 지식인의 교양체육으로 전파되리라는 자신감이다. 머리에 잔설이 내린 노 장인이 미친 곳, 국궁의 세계화였다. 이미 중국에는 옌볜(延邊)대학교에 활터를 만들었다. "미국에서 세 가마 이상 돈을 벌어 아들에게 궁장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했다. 어릴 적, 연장 하나 집어달라면 발로 차고 도망가던 작곡가 아들이 군대를 다녀와서는 활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안동 권씨 충일공파 13대 궁장이다. 권씨가 말했다. "지금 처져버리면 영원히 못 일어납니다. 죽을 때까지 도전해야죠."


작곡가 아들이 13대 궁장 대 잇기로 


몇 번의 눈물과 웃음, 그리고 활을 설명하는 진지한 표정을 보여준 장인에게 활시위를 당겨주십사, 하고 청했다.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 있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교육전시장 대청마루였는데, 순간 장인(匠人)은 허공에 사라지고 내 눈앞에 위풍당당한 장군 한 명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크게 젖힌 활을 들고 바위처럼 서 있는 그의 내공(內功)에,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