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순직(殉職)이 뭐야?"

발 아래 아버지 묘비에 새겨진 글자를 한 자씩 읽어가던 7살 꼬마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아빠 이름 위에 적힌 두 글자가 소년에게는 영 낯설었다.

"응, 그건 아빠가 멀리 공부하러 떠났다는 뜻이야." 대답 끝에 엄마는 목이 멨다. 20년 후, 그 꼬마가 자라서 아빠와 같은 길을 가겠다고 했다. 우리 영공(領空)을 수호하는 조종사다. 그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제 제가 아버지 대신해 하늘을 지킬게요."

청년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짐했지만 그 온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어머니를 남기고 아버지를 따라갔다. 고(故) 박인철 대위다. 박 대위는 작년 7월 서해 상공에서 KF-16을 몰고 야간 훈련에 나섰다가 사망했다. 박 대위의 부친 박명렬 소령은 1984년 순직했다.

지난달 20일 육군 헬기 추락사고로 장병 7명이 숨졌다. 3일에는 유엔 네팔 임무단(UNMIN)에서 평화유지활동(PKO)을 하던 박형진(50) 중령이 사망했다. 조국을 지키다 떠난 그들 뒤에 남은 가족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작별 인사조차 전하지 못한 고통을 어떻게 이겨가고 있을까. 조종사 유가족들의 '그 후'가 궁금했다.

고 박명렬 소령의 부인이자 고 박인철 대위의 모친인 이준신씨가 한 미용 학원에서 학원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다. 지난해 순직한 아들에게 훈장을 달아주는 것이 꿈인 이씨는 "일에 몰두하며 아픔을 달랜다"고 말했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설마 아들까지 보낼 줄은…

고 박명렬 소령의 부인이자 고 박인철 대위의 모친인 이준신(54)씨. 남편을 묻은 하늘로 하나뿐인 아들까지 보내야 했던 그녀는 서울의 한 미용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안녕하세요." 살며시 웃으며 인사하는 얼굴에서 고통을 읽어내기 쉽지 않았다. "학생들 중에는 제가 그런 일 겪은 거 모르는 애들도 있어요. 티 나는 게 싫어요. 속은 아무리 썩어도 겉으론 버티고 있어요. 그래야 앞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남편 박 소령은 1984년 F-4E 전투기를 몰고 팀스피리트 훈련에 참가했다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아들 박 대위는 지난해 7월 아버지가 떠난 그 바다에서 순직했다.

"남편이 죽고 처음에는 원망하는 마음도 들었어요.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그러나 원망도 하루 이틀이죠. 당장 먹고살아야 했어요."

눈이 까만 다섯 살 아들, 세 살 딸이 있었다. 살아야지. 아이들을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미용학원에 나갔다. 1년 반 정도 공부하고 실력을 닦아 미용학원에 강사로 들어갔다. 다행히 적성에 맞았다.

아들은 원래 물리학자가 되겠다고 했다. 그러나 재수하던 아들이 "아무래도 공군사관학교에 가야겠다"고 나섰다. 가슴이 철렁했다. 한번 마음을 정한 아들은 완강했다. 말리다 말리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 그렇게 가고 싶으면 한번에 붙어야 해. 아버지 이름 부끄럽지 않게. 대신 조종사가 되지 말고 공사 교수가 돼야 해." 두 가지 조건을 붙여서 허락했다. 남편을 보낸 일을 한번 겪었는데 설마 두 번 겪을까 싶었다.

몰랐다. 그때의 결정이 가슴을 인두로 지지는 후회의 고통을 남길 줄.

"아들이 학교 다니면서 '비행을 위해서 태어난 거 같다'며 좋아했어요. 안장식까지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어디 살아있지 않을까, 생각이 계속 들어요. 현관문 비밀번호도 못 바꿔요. 만신창이가 돼서라도 혹시 올지 몰라서…."

잠시나마 고통을 가슴 뒤편으로 밀어두는 유일한 처방약은 일이다.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순간에 몰두한다. 그러나 퇴근하려 운전석에 앉으면 참았던 눈물이 어김없이 터져 나온다. 아들아, 내 아들아. 그때 너를 말리지 못해서 내가 너를 보냈구나. 엄마가 미안해, 정말 미안해.

딸은 이제 27세. 컴퓨터 회사에 다닌다. "저도 딸도 서로 내색을 안 하려고 애를 많이 써요. 지난달에는 같이 일본 여행을 다녀왔어요."

이씨는 지난해 인간성회복운동추진협의회가 선정하는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 동작동 국립묘지에 아버지와 나란히 묻힌 아들에게 훈장을 달아주는 것이 남아있는 유일한 소망이다. "훈장 추서 건의서를 여러 번 냈지만 번번이 안 됐어요. 왜 안 되는 건지… 내 가슴이 얼마나 더 찢어져야 되는 건지…."

◆남편에게 감사해요

마지막 순간까지 조종간을 놓지 않아 수많은 목숨을 구했던 한 순직 조종사의 아내는 남편이 좋아하던 노래를 휴대폰 연결음으로 쓴다. '참 많은 이별 참 많은 눈물 잘 견뎌왔기에… 그대를 사랑해도 될까요.' 유리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다.

"거기 있어도 계속 사랑해도 되느냐"고 묻고 싶은 남편은 그녀에게 초등학생 아들과 딸을 남겼다. "오래 앓다 갔으면 가슴에 이 멍은 안 들었을 텐데. 갑자기 그렇게 가버리다니…."

아직도 생생한 고통에 그녀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남편의 이름이나 가족의 신상이 알려지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남편이 사고를 당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았다. 아빠 찾으며 밤마다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다 같이 우는 게 일상이 됐다. 지인들이 찾아와 도와주겠다고 나서거나 식사를 함께 하자고 청하는 것조차 아직은 힘겹다고 말했다.

그녀의 남편은 활주로에서 훈련 중 사고를 당했다. "억울했어요. 그렇게 좋은 남편을, 그렇게 좋은 남자를 왜 그렇게 빨리 데려갔을까. 한동안은 아무도 안 만났어요. 말을 하기 시작하면 눈물이 나니까요. 아들이 한참 동안 아파서 병원에 데리고 다니느라 정신을 수습할 겨를도 없었어요. 이제는 아이들에게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만 해요."

그녀의 귓가에는 사고 1시간 전 수화기 너머로 들었던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야간비행이야. 갔다올게." "응, 조심해서 다녀와."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당분간 직장을 갖지 않고 아이들에게 정성을 쏟을 생각이다. "아이들은 아직 잘 몰라요. 아이들이 어려 제가 집에 없으면 불안해해요. 제가 아빠 몫까지 따뜻하게 해줘야지요. 겪지 말았어야 될 일을 너무 일찍 겪었잖아요. 아이들만 바르게 잘 자라주면 더 바랄 게 없겠어요."

최근 세 식구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한 그녀는 하늘에 있는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아빠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할 수 있잖아요. 저를 두고 먼저 갔지만, 제겐 너무나 고맙고 소중한 사람이에요. 아이들이 아빠의 뜻을 기억할 수 있게 키울 거예요."

◆조종사 되려거든 엄마를 죽이고 가라

순직한 조종사의 아들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아버지의 길과 아버지가 아닌 길. 1973년 7월 블랙이글 팀장이던 남편 홍승남 중령을 잃은 이능자(69)씨는 공군사관학교에 가겠다던 아들을 말리기 위해 부엌칼을 꺼내 들었다.

"너하고 나하고 둘 중에 하나가 죽는거다. 지옥 같은 그때를 내가 다시 겪어야 한단 말이냐. 네가 또 목숨을 내놓고 조종사가 된다면 나는 너를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조종사가 되려면 나를 죽이고 가라." 아들은 결국 뜻을 꺾고 의사가 됐다.

남편이 떠난 후, 슬픔의 썰물이 어느 정도 빠져나가자 당장 현실적인 문제가 닥쳤다. 집도 없고 돈도 없고 직업도 없었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애들 데리고 거지가 되겠구나….' 정신이 번쩍 든 이씨는 홀로 된 지 두 달이 채 못 돼 은행에 취직했다. 당시만 해도 주판으로 계산을 맞췄다. 저녁 때만 되면 장부의 금액을 맞추려 주판알을 정신없이 튕겼다.

집에서 밥을 짓던 이씨에게 숫자가 난무하는 서류는 고문이었다. 수십 번 계산을 맞춰가며 이씨는 울었다. 보고 싶어서 울고, 힘들어서 울고, 억울해서 울었다. 딴 여자하고 살고 있어도 좋으니 살아라도 있었으면. 그러면 희망이 있을 텐데. 부질없는 생각도 했다.

아이들이 아플 때 제일 서러웠다. 혼자서 아들을 업고 병원으로 직장으로 뛰어다녀야 했다.

미워도 하고 원망도 했지만, 이제는 다 자란 아이들을 볼 때마다 먼저 떠난 남편이 못내 안쓰럽다. "이렇게 잘 자란 아들딸도 못 보고…."

◆마음속의 남편과 배낭여행을

윤송죽(64)씨는 몇 년째 남편과 함께 세계 여행을 다닌다. 그러나 혼자다. 남편은 마음속에 있을 뿐 곁에 없기 때문이다.

전투기 조종사였던 남편 박수길 중령은 1976년 7월 비행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다 윤씨가 지켜보는 앞에서 땅으로 추락했다. 관사의 창 너머로 불길에 휩싸인 전투기를 보면서도 남편인 줄 몰랐다. "어머, 저걸 어째… 누굴까… 식구들은 어떻게 하나."

활주로 밖은 논이었다. 햇볕 쨍한 여름 오후, 논에서 농부들 수십 명이 모를 심고 있었다. 다행히 조종사가 방향을 틀어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밤이 깊어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부대 내에서 사고가 난 날에는 모든 조종사가 퇴근할 수 없었다. 사고 자체가 기밀이었다. 전화도 쓸 수 없었다. 사고를 당한 조종사가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다른 장병들은 출근하고 있었다. 아, 내 남편이었구나. 그제서야 알았다.

막내딸이 3살이었다. 위로 5살, 7살 딸이 둘 더 있었다. 연애 4년 동안 "비행기는 택시보다 정교한 기계다. 차보다 안전하다"고 말했던 남자. 걱정 말라고, 안심하라고 말해주던 남자. 그 남자가 이젠 없었다.

계속 살아야 하나. 우울증을 길게 앓았다. 몇 년 동안 무기력하게 지냈다. 믿을 수 없었다.

당시 국방연금은 한 달 1만5000원. 연이율이 24% 하던 때라 은행에 둔 예금으로 버텼다. 딸 셋을 불러놓고 단단히 일렀다. "네 인생은 네가 책임져야 돼." 다행히 셋은 잘 자라 대학과 회사에서 자기의 길을 찾았다.

윤씨는 '슬픔은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감추고 옅어지는 듯하다가도 어제 일처럼 바로 다시 살아난다. 외로울 때는 동작구 국립묘지에 차를 몰고 간다. "여보, 나 왔어요." 잊기 위해서라도 여행을 자주 다닌다. 배낭 하나 메고 혼자 떠나는 여행이다. 이제까지 40개국 정도를 돌았다. 미국, 캐나다, 요르단, 시리아…. 올해는 마음속의 남편과 함께 쿠바로 떠날 예정이다.

故 조익성 중령의 부인 손이분씨

◆40년 지났지만 고통은 그대로

지난달 20일 TV 뉴스를 보던 손이분(70)씨는 온몸의 피가 발끝으로 몰려나가는 듯 현기증을 느꼈다. 육군 헬기가 추락해 7명이 숨졌다는 소식이었다. 심장이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남편의 순직 소식을 듣던 그날과 똑같은 느낌이었다. 헬기를 몰던 남편 조익성 중령은 1969년 1월 환자를 태우고 가다 서산 앞바다에 떨어졌다. 악천후 때문이었다.

"헬기는 전투 비행기보다 안전한 줄 알았지. 사고 나고 보니 헬기 조종사라고 다를 게 없었어. 그때가 벌써 40년 전이네. 그런데도 헬기 사고 뉴스를 접할 때마다, 악몽 같던 그 순간이 고스란히 되살아나. 내 고통을 그대로 앓고 있는 유가족들을 TV로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요."

다행히 남편의 시신은 찾을 수 있었다. 당시 수습 현장에 참여했던 한 장병이 "조종간을 꽉 붙잡고 돌아가셨다"고 알려줬다. "40년간, 단 한순간도 남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그래서 미안하기도 해요. 난 이렇게 살아서 여기저기 구경도 해보고, 놀러도 다니는데, 한창 나이에 하늘로 갔으니."

故 강춘근 대령의 부인 이명자씨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마지막 밥상, 좋은 반찬 차려줄걸

1975년 6월 블랙이글 팀장이던 남편 강춘근 중령에게 차려줬던 마지막 밥상을 이명자(67)씨는 수천 번 머릿속에서 다시 차렸다.

"밥 줘." 저녁 먹으러 들어왔다던 남편. 어딘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아, 그런가? 그럼 내가 나가봐야겠군." 빨리 나가야 된다며 채근하는 남편 앞에 냉장고에 있던 반찬을 급하게 차려냈다. 남편은 바쁘게 한 그릇을 비우고 집을 나섰다.

얼마쯤 지났을까. 비행장 안에 있던 관사에까지 엔진을 가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1번기가 이륙했다. "무사히 떴구나." 안심하려는 찰나, 뒤따라 오르던 2번기가 수직으로 땅에 꽂혔다. 불바다가 된 활주로로 달려갔다. 옆에서 누군가 이씨를 붙잡았다. "아이구, 아주머니 어떻게 해요." 아냐, 내 남편은 1번기에 탔을 거야. 정신을 잃었던 이씨가 눈을 떴을 땐 군의관과 가족들이 이씨를 에워싸고 있었다.

"급하게 밥상을 차려내느라고 있던 반찬 그대로 냈는데, 그게 가슴에 맺혀서…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있었으면 좋아하던 반찬을 해줬을 텐데. 딴걸 먹고 나가서… 지금도 속상해."

그해 6월 말, 첫 연금이 나왔다. 3만6080원. 봉투를 손에 들고 조용히 집으로 왔다. 문을 들어서고 나서야 이씨는 울음을 토해냈다. "여보, 이게 당신 목숨 값이래요."

5년 후, 1980년 6월에 이씨는 군무원 시험을 쳤다. 그 후 20년 가까이 공군 역사를 담당하는 연구원으로 공사에 근무했다. 아들은 대기업 연구소에 다닌다. 딸 둘은 자라 스튜어디스가 됐다. 하늘 어딘가 있을 아버지에게 날마다 인사하러 간다.

♣ 바로잡습니다

▲8~9일자 B6~7면 사진설명 중 '고 박수길 중령'을 '고 홍승남 중령'으로, '아내 윤송죽씨'를 '아내 이능자씨'로, 강춘근 중령을 대령으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