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60년… 역사의 현장마다 조선일보가 있었다

조선일보
  • 유석재 기자
    입력 2008.03.04 23:25 | 수정 2008.03.04 23:26

    조선일보 지면으로 살펴 본 '건국이후 10대 사건'

    건국 60년, 1948년부터 2008년까지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자유와 평등의 원칙을 정착시켜 나간 험난한 피와 땀과 눈물의 여정이었다. 1920년 창간된 뒤 1948년 만 28세를 맞았던 조선일보는 이후 60년의 역사 동안 늘 대한민국 정치·경제·사회·문화의 현장에 함께 있었다. 한국사회학회가 지난달 소속 학자 1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뽑힌 '건국 이후 10대 사건'을, 당시 발간됐던 조선일보 1면 지면을 통해 시대순으로 살펴본다. 


    1.  6·25 전쟁 (1950년) 

    전란 속에서도 51년 7월까지 戰時版 발행  

    북한군의 기습 남침이 시작된 1950년 6월 25일, 조선일보는 국방부 정훈국장이 정오에 발표한 담화를 긴급히 호외로 발행해 첫 보도에 나섰다. 그날 제작한 26일자 1면에는 '이북 괴뢰 불법 남침'이라는 제목의 머리기사가 실렸다. 다음날에도 전투상황과 종합 전과를 크게 보도했으며, 정부가 대전으로 옮겨간 27일 저녁까지도 신문 제작은 계속됐다. 방응모 사장이 납북되고 북한군이 인쇄 설비를 뜯어가는 등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난을 겪었지만, 조선일보는 서울·부산·수원 등을 전전하며 1951년 7월까지 전시판(戰時版)을 발행해 전쟁의 상황을 계속 국민에게 전했다. "우리가 원하는 평화는 거짓 평화가 아니다"며 공산군측의 정전회담 지연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2.  4·19 (1960년) 

    "평화적 시위 방해말라" 사설 실어 

    1960년 4월 19일, 조선일보 석간 1면은 유례없이 큰 2호 활자를 사용해 '전(全) 대학생이 총궐기'란 제목을 뽑아 학생들의 시위를 크게 보도했다. 2면의 사설에서는 "학생들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하지 말라"는 경고를 실었다. 그날 조선일보 지면은 자유당 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항거를 국민적 차원으로 확산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3.  5·16 (1961년) 

    군부의 검열에도 '쿠데타' 용어 사용 

    1961년 5월 16일 조선일보 석간 1면의 제목은 '군부(軍部) 쿠데타 군사혁명위 조직을 발표'였다. 당시 군부의 공식 용어는 '혁명'이었고, 바로 그날부터 서슬 퍼런 사전 검열이 시작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1면 제목과 사설에서 헌정 중단 사태를 빚은 군부의 불법 행동을 의미하는 '쿠데타'라는 용어를 쓴 것이다. 독자들로 하여금 행간에 숨은 뜻을 읽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17일 조간의 사설에서는 "군부 쿠데타의 동기가 여하튼 간에 법질서에 의하지 않은 이와 같은 비상사태가 민주주의의 본도(本道)가 아니라는 것은 역사의 증언을 위하여 일차 기록하여 둘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고 썼다. 


    4.  유신체제 수립 (1972년) 

    계엄령속 검열 도장없인 신문 못찍어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 해산과 정당 정치활동 중지를 발표하는 '10월 유신'을 단행했다. 70일 동안 이어진 계엄령하에서 모든 신문은 '검열 필' 도장을 받아야 인쇄할 수 있었다. 아직 '유신'에 대한 진의 파악이 어려웠던 가운데 이 조치를 지지하는 기사와 광고만이 지면에 살아남았다.


    5.  광주 민주화 운동 (1980년) 

    통제속에도 상황 전하려 애써 

    1980년 5월 18일, 조선일보는 광주로 기자들을 급파해 진행상황을 면밀하게 취재했다. 통제로 인해 기사가 나올 수 없었던 21일자에도 '신현확 내각 일괄 사표' 기사에 '최근 소요사태 인책'이란 부제를 달아 간접적으로 광주의 비극을 전하려 애썼고, 22일자에는 첫 기사를 내보냈다. 31일자에는 "광주 시민 전체를 폭도로 몰지 말라"는 현지 반응을 실었다. 


    6.  6월 항쟁 (1987년) 

    제목 통해 '개헌 논의 재개를' 

    1987년 6월 11일자 조선일보 1면은 오른쪽 상단에 전날 있었던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의 선출을, 왼쪽 상단에는 같은 날 태평로 성공회 대성당에서 열린 '호헌철폐 국민대회'와 도심 곳곳의 시위를 나란히 실었다. 12일자 1면에는 명동성당에서의 시위 사진을 6단으로 게재했고, 이날 시작된 최석채·김준엽의 대담 기사에서 '개헌 논의 재개하라'는 제목을 달았다. 20일자 3면에는 '비상조치-유혈사태 막아야 한다'는 제목으로 한 면을 털어 각계 원로들의 긴급 제언을 실었다. 6·29 선언 당일에는 긴급히 호외를 발행,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갔음을 알렸다. 


    7.  서울 올림픽 (1988년) 

    '벤 존슨 약물복용' 세계적 특종 

    1988년 8월 '올림픽취재부'를 발족한 조선일보는 올림픽 개막 다음날인 9월 18일자 1면에 '화합의 세계 막 오르다'란 제목으로 그 감격의 순간을 전했다. 5면 칼럼 '우리 가슴 울린 북소리'에선 "어느 체제도 인간의 만남을 거스를 수 없다는 진리를 안고 동과 서를 한 자리에 모은다"고 썼다. 9월 27일자 1면에서는 세계적 특종 기사인 '벤 존슨 약물복용'을 게재했다. 


    8.  IMF 경제위기 (1997년) 

    다양한 기획으로 IMF탈출 믿음 심어  

    1997년 11월 22일자는 IMF에 2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하겠다는 임창열 경제부총리의 회견을 실었다. 한민족에게 커다란 시련을 안겨다 준 IMF체제의 서막이었다. 12월 4일자에서는 본지 워싱턴 특파원이 단독으로 입수한 'IMF 극비 보고서' 전문(全文)을 공개했다. 한국이 금융개혁을 준수한다면 구제금융 전액을 인출하기 전에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조선일보는 지면을 통해 국민들이 용기를 되찾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12월 5일부터 10일까지 6회에 걸쳐 실린 1면 기획 칼럼 'IMF를 넘어서'는 새로운 리더십 창출과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역설했다.


    9.  평화적 정권교체 (1997년) 

    '갈등 씻고 21세기 준비를' 특집 

    1997년 대선에서 조선일보는 대선주자 초청 '정치개혁 국민대토론회'(6월)와 대선 후보 3명의 합동토론회(11월 17일)를 갖는 등 후보들의 정책과 국가관을 국민에게 소상히 알리려 노력했다. 12월 18일의 대통령 선거에서 건국 후 첫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지자 다음날인 19일자에서 '갈등과 분열 씻고 21세기를 준비하자'는 사회면 특집 기사를 냈다. 


    10.  한·일 월드컵 (2002년) 

    돋보인 편집·기사 他紙 압도 

    4년 동안 월드컵을 준비한 조선일보는 독보적인 편집과 기사, 펠레·=885" name=focus_link>차범근 등 외부 필자들의 활약으로 시종일관 타 언론을 압도했다. '새벽에 그들이 왔다' '오늘밤, 한 사내는 운다' 같은 제목은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된다. '아! 코리아 황홀한 밤'(첫승) '미치도록 좋은 밤'(8강 진출) '가자! 요코하마로'(4강 진출) 등의 기사들이 온 국민과 기쁨을 함께 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