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동안 방치된 '노천명 묘역'

입력 2008.03.04 01:55 | 수정 2008.03.04 02:44

고양시 벽제면 천주교 묘지에 묻혀 있어
친일 논란으로 안내 표지판도 설치 안돼

지난달 20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장명산 기슭 천주교 공동묘지. 겨울 바람이 부는 묘지 언덕을 정장 차림의 한 남자가 올랐다. 2300기에 달하는 무덤을 10여 분간 돌고 돌던 남자는 산꼭대기 가까이 한 묘역 앞에서 묵념을 했다. '盧天命之墓―베로니가(세례명)'. 바로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라는 '사슴' 시로 잘 알려진 노천명(1912~1957) 시인의 묘역이다.

고양시 정동일 문화재 전문위원은 5년 전부터 1년에 한두 번씩 이곳에 들른다. '고양시에 노천명 시인의 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공동묘지를 찾았던 정 위원은 이틀을 꼬박 걸려 시인의 묘를 찾았다. 안내문 하나 없어 고양시에 '사슴 시인'이 묻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정 위원은 "시인이 작고한 지 올해로 50년이 됐지만 반세기 동안 이렇게 찾아 오는 사람 없이 방치돼 있다"고 말했다.
노천명 시인의 묘(오른쪽)는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5만평 규모의 천주교 묘지에 언니 노기용씨와 함께 있다. 묘비 뒷면에는 서예가 김충현의 글씨로 시인의 시‘고별’이 쓰여 있다./김건수 객원기자 kimkahns@chosun.com
◆친일 논란으로 방치…안내 표지판 하나 없어

평생을 미혼으로 살다 1957년 사망한 시인은 처음에는 서울 중곡동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 1973년 고양시로 이장(移葬)됐고, 현재 언니 노기용씨와 함께 나란히 묻혀 있다.

35년간 시인의 묘지를 관리해 온 민정기(75)씨는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1년에 서너 명의 대학생들이 찾아오긴 하지만 찾기가 힘들어 직접 데려다 주고 있다"며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시인인데 표지판이라도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했다.

고양시는 2004년 한 차례 시인의 묘역을 단장할 계획을 세웠다. 국민이 애송하는 시를 남긴 문학인인 만큼 외부인이 찾아올 수 있도록 표지판이나 안내문을 설치하려 했다. 하지만 고양시민회,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단체들이 시인의 '친일 행적'을 문제 삼아 반발, 결국 계획은 무산됐다. 시인이 작고한 지 반세기가 지나자 최근 다시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하지만 고양시는 친일 논란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정동일 위원은 "친일 행적 때문에 시인의 아름다운 시와 일생까지 잊혀지고 있다"며 "시비는 안 되더라도 표지석 하나 세우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문학관으로 업적 기리는 시인들

친일 논란을 일으킨 문학인들 중 문학관이 만들어져 업적이 알려지고 있는 시인은 많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경우 고향인 전북 고창군 선운리에 2001년 '미당 시문학관'이 건립됐다. 시인의 작품과 일생에 관련된 자료가 풍부한 이 문학관은 고창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꼭 찾는 '관광 명소'가 됐다. 그의 친일 문학작품 11편도 전시돼 독자가 직접 친일 부분을 판단하도록 했다. '깃발'로 유명한 청마 유치환 시인의 고향 경남 통영시는 2000년 총 11억원을 들여 문학관뿐 아니라 생가까지 복원했다. 현재 1년에 2만5000여 명의 관람객이 찾고 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