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마지막 주 조선일보 영화팀의 선택은 어제(28일) 개봉한 루마니아 크리스티안 문쥬(Munjiu) 감독의 '4개월, 3주…그리고 2일'이다.
영화를 2시간의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는 관객에게는 차마 이 영화를 권할 수 없다. 취향에 따라 미국 대통령 암살이라는 자극적 소재를 실시간 액션 스릴러로 연출한 '밴티지 포인트'나 차태현·하지원의 믿을 수 없을 만큼 착한 멜로 '바보'를 추천한다. 하지만 단순한 쾌락이나 위로가 아니라 삶에 대한 각성(覺醒)으로 영화를 맞이하려는 관객이라면, '4개월…'은 제목에 써 있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오랜 기간 동안 당신의 영혼을 뒤흔들 것이다.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만장일치의 환호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4개월…'은 감정의 유출을 적극 배제하고 철저한 리얼리즘 정신에 입각해 만들어낸 루마니아발(發) 세태 보고서. 낙태가 불법이었던 1980년대 차우셰스쿠 정권 시절, 원하지 않는 임신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두 여대생의 2일을 포착했다. 독재 정권 당시 10대 후반이었던 문쥬 감독의 카메라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을 만큼 냉정하다. 기껏해야 스무 살 안팎일 여대생들은 제 몸뚱이 하나 건사하는 데도 부족한 나이. 아이가 아이를 밴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동정 없는 세상은 싸늘하기만 하다. 허름한 호텔은 방 하나 빌려주는 데도 보호자 운운하며 야박하게 굴고, 의사라고 불리기보다는 악마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불법 낙태 시술자는 소녀들의 약점을 잡고 그녀들의 성(性)을 요구한다.
'4개월…'의 등골 오싹한 전율은 날 것 그대로의 동물적 육체성에서 나온다. 이 영화에는 곱게 꾸미기 위한 화장은커녕, 땟물을 감추기 위한 최소한의 세면도 없다. 공권력에 벌벌 떠는 순진한 여대생이 사악한 가짜 의사를 만나 쩔쩔매는 장면만도 애처로운데, 비정한 카메라는 끝내 그 기술자의 시술과정과 결과까지 클로즈업으로 잡아낸다. 어린 엄마 뱃속에서 4개월을 보낸 뒤 3주 동안 고민의 대상이 됐고 마침내 운명의 2일을 보낸 어린 생명. 관객은 이제 비닐 봉지 속에 담긴 그 짧은 삶을 목도해야 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4개월…'은 불행한 시대를 살았던 두 소녀의 낙태 보고서지만, 결국 이 영화가 고발하고 싶었던 것은 시대나 국적과 상관없는 인간의 사악한 본성과 삶의 폭력성이 아니었을까. 인공 세트 하나 없이 현장 로케이션만을 고집한 뚝심, 그리고 인위적으로 이어 붙인 편집이 아니라 기교 없이 최대한 길게 찍은 롱테이크 영상이 이 영화의 사실감과 현장감을 극대화한다. 올해 미국 오스카를 휩쓴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나 폴 토마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 역시 이 동유럽 변방 국가 영화의 문제의식과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이 공교롭다. 2월 중순부터 3월 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 탁월한 수상작들의 영화 세례를 놓치지 마시기를.
단, 이 영화를 보려는 관객은 자발적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광화문 씨네큐브, CGV(강변, 상암, 서면) 명보 등 전국 7개 극장에서만 상영한다.
줄거리
1987년 차우셰스쿠 독재정권 치하 루마니아. 여대생 오틸리아(안나마리아 마링카)는 시내의 허름한 호텔방을 아무도 몰래 예약한다.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한 룸메이트 가비타(로라 바질리우)의 낙태 수술을 돕기 위해서다. 하지만 난관은 이제부터. 불법 낙태 시술자인 베베(불러두 이바노프)는 말을 바꾸고, 오틸리아에게 돈 대신 다른 것을 요구한다.
전문가 별점
―영화가 현실 안에서 낮은 포복을 할 때 발휘될 수 있는 묵직한 성찰의 힘.
(★★★★☆ )
(이상용·영화평론가)
―가슴에 묻은 비밀이 가슴을 꽉 메운다.
(★★★★)
(황희연·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