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2006년 출간된 ‘한국공포문학단편선’을 찾던 이용정(27)씨는 깜짝 놀랐다. 직원으로부터 그 책은 취급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청소년 유해간행물’로 지정돼 아예 판매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씨는 이어 인근에 있는 영풍문고를 찾았으나 역시 같은 대답을 들었다. 맞은 편에 있는 반디앤루니스에서 이씨는 비로소 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서가에 책이 배치된 것은 아니었다. 직원은 이씨의 말을 듣고 신분증을 확인한 후 카운터 뒤편에 마련된 캐비닛을 열어 책을 꺼냈다.
'청소년 유해간행물'이란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을 우려해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19세 미만 구독 불가' 지침을 내린 책을 말한다. 청소년 유해간행물로 지정된 책은 다른 책과 구분, 청소년이 볼 수 없는 곳에 격리해 진열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상 대부분의 서점들이 이 책들을 취급하지 않거나 카운터 밑 등 ‘19세 이상의 손님’들도 볼 수 없는 곳에 보관한다. 청소년뿐 아니라 전 연령대에 대한 시장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다. 이에 따라 청소년 유해간행물 선정이 사실상 책에 대한 ‘사형선고’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청소년 유해간행물’ 지정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청소년 유해간행물’은 어떻게 지정되나
현재 출판물의 '19세 미만 구독 불가' 여부를 판단하는 곳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다. 제1위원회(도서·전자출판물), 제2위원회(만화), 제3위원회(정기간행물), 제4위원회(부당광고), 제5위원회(외국간행물) 등 5개 위원회에서 각 분류에 따라 '청소년 유해간행물' 여부를 판단한다. 전문인사 7명과 내부 상근직 1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매달 2회씩 회의를 열어 심사하는 것이다. 보통 회의에 걸리는 시간은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두세 시간. 이때 회의록은 비공개에 부친다. 만화를 심의하는 제2위원회의 경우 2007년 한 해간 8485권을 심의해 1123권을 청소년유해간행물로 지정했다. 한두 시간에 달하는 한 번의 회의에 평균 353.5권의 책을 심의, 약 46.8권의 만화책을 청소년 유해간행물로 지정하는 셈이다. 김성만 심의지원부 도서만화팀장은 "위원들의 다수결로 도서의 유해성 여부를 심의·결정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에 수백 권의 책을 자세히 살펴 심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심의위원회에 회부될 책을 간행물윤리위원회 사무처 직원들이 먼저 분석해 소견서를 제출하면 두 명의 심의 위원이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검토한다. 심의위원회의가 오후에 열리면 오전에 두 위원이 먼저 검토하는 식이다.
심의 대상은 이미 출판된 서적들로 제한된다. 출판되지 않은 책에 대한 심의, 즉 사전심의는 ‘검열’로 불법이기 때문이다.
심의 대상 서적의 선정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문화관광부 등 국가기관의 의뢰 ▶청소년보호와 관련된 기관 또는 30명 이상의 서명 요청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자체 수집을 통해 심의 대상 서적을 선정한다. 2006년 간행물 심의연감에 따르면 2006년 한해간 문화관광부에서 심의를 의뢰한 4297권의 도서 중 청소년유해간행물로 지정된 책은 2권에 불과했으며,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자체 수집한 1232권의 도서 중에선 103권이 청소년유해간행물로 지정됐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사실상 문화관광부의 심의 의뢰 제도는 무의미하며 대다수의 심의 대상 서적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좌지우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는 심의 대상 서적을 어떻게 수집할까? 방법은 간단하다. 매일 직원 2명씩 서점과 도매점 등을 시찰하고 인터넷을 검색해 대상이 될 만한 책을 찾는다. 때론 지방에서 유통되는 생활 정보지를 수집하기 위해 지방으로 출장을 갈 때도 있다. 이렇게 해서 모은 책은 서울 강서구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본관의 한 켠에 마련된 서고에 보관한다. '청소년유해간행물'로 지정된 책은 3년, 그렇지 않은 책은 6개월간 보관 후 기증하거나 폐기한다. 현재 서고엔 수만 권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모인 책을 심의위원회에 회부하기에 앞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직원들이 검토 보고서를 작성한다. ▶청소년에게 성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선정적이거나 음란한 것 ▶청소년에게 포악성이나 범죄의 충동을 일으킬 수 있는 것 ▶성폭력을 포함한 각종 형태의 폭력 행사와 약물의 남용을 자극하거나 미화하는 것 ▶청소년의 인격과 시민의식의 형성을 저해하는 반사회적·비윤리적인 것 등 청소년보호법에 규정된 심의기준에 비춰 청소년 유해간행물 여부를 판단한다. 심의해야 하는 책이 많은 만큼 직원들이 책을 빨리 읽어야 하는 것은 필수다. 한 직원은 “보통 400페이지 정도의 소설책을 30분 내에 읽는다”고 말했다.
이 과정을 거쳐 '청소년 유해간행물'로 지정되면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는 이를 국가청소년보호위원회에 통보, 관보 고시를 요청하고 출판사에 알린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는 심의 기구일 뿐 행정이나 사법 권한은 없기에 사후 관리를 국가청소년위원회에 넘기는 것이다. 통보를 받은 출판사는 배포된 책 전량을 회수, 책의 앞뒤 표지 우측 상단에 가로 6cm, 세로 1.5cm의 붉은 띠를 만들어 흰색으로 '19세 미만 구독불가' 표시를 하고 책을 펴볼 수 없도록 포장을 해야 한다. 이렇게 '청소년유해간행물'로 지정된 책이 2007년 한 해간 3000권을 넘는다.
때로 성인에게도 해를 끼친다고 판단, '청소년 유해간행물'을 넘어서 '유해간행물'로 규정되는 경우도 있다. '유해간행물'로 지정된 책은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통보되며 심한 경우 해당 출판물의 발행 출판사가 등록 취소를 당한다.
◆어떤 책들이 지정되나
‘청소년 유해간행물’로 지정된 대부분의 책은 성애물이지만 최근 동성애물 역시 크게 늘고 있다. 2006년 ‘청소년 유해간행물’로 지정된 93권의 소설 중 65권이 동성애 소설이었으며 452권의 외국만화 중 동성애 만화가 230권으로 51%의 점유율을 보였다. 특히 외국간행물의 경우 2006년 유해간행물 등으로 지정된 동성애 간행물은 522종으로 전체 1212종 중 43%를 차지, 2005년의 460종에 비해 13% 증가했다. 박영배 제5심의위원회 위원장은 “대다수 동성애물이 일본산”이라며 “‘왕의 남자’나 ‘브로크백 마운틴’과 같은 영화가 동성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켜서 그간 금기시돼온 동성애를 남녀 간의 사랑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판타지 소설과 추리 소설 등 장르 소설 역시 증가 추세다. 2005년까지 단 한 편도 없었지만 2006년부터 ‘한국공포문학단편선’, ‘살육에 이르는 병’, ‘에나멜을 바른 혼의 비중’ 등 9권이 폭력성을 이유로 청소년 유해간행물 판정을 받았다.
이에 따라 해당 출판사나 팬들 사이에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판정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작년 1월 '19세 미만 구독불가 도서' 판정을 받은 '한국공포문학단편선'이 대표적인 경우다. 당시 간행물윤리위원회는 해당 출판사인 황금가지에 보낸 심의결정 통보 공문에서 "국내 작가들의 단편 공포 소설 모음집인 이 책에서 시체를 토막 내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며 문제가 된 소설의 페이지를 여섯 부분에 걸쳐 언급했다. 소설 속에서 신체를 훼손하는 장면들을 일일이 지적한 것이다.
출판사 측은 이에 대해 사실상의 검열이라며 재심의를 요청했다. 당시 황금가지 편집주간이었던 이지연씨는 “간행물윤리위원회의 통보는 곧 문제의 페이지가 없거나 수정된다면 심의에 통과할 수 있다는 의미와 똑같다”며 “이는 사실상의 검열일 뿐더러 ‘간행물의 성격과 영향, 내용과 주제, 전체적인 맥락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는 자체 심의 기준을 무시하고 특정 장면의 포함 유무만으로 기계적인 심의가 이뤄진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조치가 작가들의 자기 검열을 유도한다는 점도 지적됐다. 이 책에 단편을 실은 작가 이종호씨는 “내 단편이 같이 작품을 실은 작가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표현을 고르게 된다”며 “이번 판정은 한국에서 공포문학을 하지 말라는 소리와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논란은 형평성 문제다. 한국공포문학단편선에 등장한 신체 훼손과 비슷한 수위의 다른 책들에 대해서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청소년 유해간행물’ 판정을 내리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당시 이 책의 편집자였던 김종혁 차장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지적한 수준의 묘사가 있지만 심의를 통과한 책을 100권 넘게 찾아올 수 있다”며 “심의 대상 선정에 대한 투명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당시 심의를 맡았던 서명선 한국여성개발원장은 “청소년 유해매체물 심의기준이 규정된 ‘청소년보호법’ 조항 자체에 자의적인 해석의 여지가 남아있는 부분이 많다”며 심의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 밖의 논란들
이처럼 한편에선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심의 제도가 지나친 규제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한 편에선 지나치게 허술하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심의 위원 인원이 워낙 적어 출판되는 모든 도서를 다 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외국간행물의 경우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심의해야 하는 도서는 작년 한해 동안 3만권에 육박했다. 이를 관리하는 외국간행물팀 직원은 팀장을 포함해 5명이다. 한 사람이 1년 동안 6000권을 심의해야 하는 셈이다. 장택환 외국간행물 전 팀장은 "심의 대상 대부분이 일본 도서이기 때문에 팀 내에 일본어 전문가가 있지만 유럽 쪽에서 들어오는 경우엔 다른 팀에 도움을 받는다"고 말했다. 외국어로 쓰인 소설의 위험 수위 판단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사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점도 문제다. 간행물윤리위원회가 19세 미만 구독불가로 지정했으나 사후 단속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일부 책들은 19세 미만 구독 불가 도서임에도 버젓이 청소년에게 판매되고 있다. 2006년 12월 선정성을 이유로 청소년 유해간행물로 지정된 '기사와 맹세의 꽃'의 경우, 규정상 온라인 서점에서 성인인증을 받지 않으면 책의 관련 정보를 볼 수 없어야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검색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같은 책의 단속 책임 소재는 불분명한 게 현실이다. 청소년위원회 매체환경팀 엄기훈 사무관은 "우리만 단속하는 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와 경찰청에서도 단속할 수 있기 때문에 청소년위원회가 모든 책임을 떠맡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청소년 유해간행물’이라는 단어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지연 전 황금가지 편집주간은 “현재 국내 출판물에 내려지는 연령 등급제는 단순히 ‘19세 미만 구독 불가’가 아닌 ‘유해 도서’란 표현을 사용, 마치 도서 자체가 유해한 양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며 “이에 따라 설사 19세 불가 표시를 하고 포장을 한 상태에서도 시중 서점에서는 도서를 진열하지 못하고 매대 안에 감춰 두거나 출판사로 반품해버려 실질적으로 독자에게 통하는 통로를 거의 봉쇄당한다”고 말했다.
◆외국의 사례들
해외에선 어떻게 심의제도를 운영할까?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2004년 조사한 보고서인 '외국의 간행물 윤리 제도'에 따르면 호주, 독일, 프랑스 등은 법정 심의 기구를 두는 한편 미국의 경우 자율심의에 맡기고 있다.
가장 엄격한 심의 제도를 운영하는 호주의 경우 독립적인 법정 기구인 ‘매체물 등급국’ 에서 간행물 심의에 대한 업무를 처리한다. 96년 ‘연방등급법’ 시행과 함께 설립된 매체물 등급국은 등급분류거부, 제한등급, 16세 미만 금지, 18세 미만 금지로 간행물에 대해 등급을 매긴다. 김성만 도서만화팀 팀장은 “호주는 3년마다 한 번씩 전문가들이 윤리 기준을 조사하여 심의 법제를 운용한다”며 “이는 한국에 간행물 심의 제도와 비교하여 매우 엄격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반면 비교적 자율적인 심의제도를 운영하는 미국은 정부가 심의에 관여하지 않는다. 미국만화잡지협회가 설립한 '만화심의위원회'에서 아동, 청소년 만화를 사전 심의할 뿐이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인터넷에서 유해 매체물에 대한 접근이 쉬운 지금 한국의 심의제도는 사회적 실효성이 크지 않다"며 "정부는 심의의 큰 틀만 유지한 채 미국처럼 출판단체에 심의를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