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서 국보 1호가 '와르르'… 9·11 같은 충격"

입력 2008.02.12 01:03 | 수정 2008.02.12 09:43

"임란 때도 지켰는데… 우린 역사의 죄인"
잿더미 숭례문 앞에서 시민들 弔花 애도
"책임 소재 가려 역사 앞에 무릎 꿇려야"

● 시민 반응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전쟁 와중에도 지켰던 국보 1호를 어떻게 아무 일 없는 평화시기에 우리가 잿더미로 만들 수 있나. 우리는 역사의 죄인이다." (김희철·62·남대문시장 상인)

"전 국민이 4시간 동안 생방송으로 남대문이 불에 타는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봤다. 한국의 심장부를 강타한 '한국판 9·11'이 아니고 무엇이냐." (홍옥선·61·주부)

610년 역사의 풍상에도 꿋꿋하게 버텨온 국보 1호 '숭례문(崇禮門·남대문)이 한순간의 화마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본 시민들은 11일 충격과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를 표시했다.

숭례문 바로 앞에서 생계를 꾸렸던 남대문시장 상인 김희철씨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첨단장비를 갖춘 소방방재청이 멀쩡히 있으면서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서 국보 1호가 새까맣게 타 들어가도록 만들 수 있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김씨는 "책임 소재를 철저히 가려서 역사 앞에 무릎을 꿇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역삼동에 사는 홍옥선씨는 "아들이 '엄마, 남대문에 불났어'라고 해서 남대문시장에 불이 난 줄 알았다"며 "평소 고궁에 들어갈 때 입장료를 다 내는데 도대체 그런 돈들은 다 어디에 쓰는 거냐"며 문화재 관련 당국을 질타했다.

국민대 4학년 변인수(28)씨는 "새벽 1시 19분에 친구한테 '젠장, 빌어먹을, 국보 1호가 불타 없어지는 이런 경우가 어딨어'라는 문자를 받고 알았다"며 "공무원들은 도대체 뭘 하며 국민 세금을 먹느냐"고 말했다.

이날 문화관광부 홈페이지와 문화재청 홈페이지엔 허술한 문화재 관리를 비판하는 글들이 쏟아졌다. 문화재청 홈페이지는 네티즌의 방문이 폭주하면서 오전 1시부터 8시까지 7시간 동안 서버가 다운되기도 했다. 아이디 '김영훈'을 쓰는 네티즌은 문화관광부 홈페이지 게시판에 '운현궁은 차 돌진으로 문이 부서지고, 숭례문은 불타고, 화성의 장안문도 그을리고, 수어장대(서장대의 오기인 듯)도 불타 없어지고, 양양 낙산사는 다 타버리고…. 관리 좀 똑바로 하자'는 개탄의 글을 올렸다.
11일 오전 시커먼 잔해만 남은 숭례문을 보며 한 시민이 마치 제 몸이 불탄 듯 안타까워하며 울고 있다./최순호 기자 choish@chosun.com
숭례문에 생명이 있었던 것으로 여겼던 양 잿더미로 변한 숭례문 앞에 조화를 놓고 애도하는 시민들도 줄을 이었다. 이날 오후 숭례문 주변을 둘러싼 폴리스라인 앞에는 '애도'의 뜻을 담은 국화와 백합 다발이 수북하게 쌓였다. 김종희(여·58·서울 중랑구)씨는 하얀 국화 다발을 숭례문 주변을 둘러싼 폴리스라인 앞에 내려놓으며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국화 한 송이를 들고 이곳을 찾은 40대 남성은 숭례문을 향해 절을 한 뒤 "세계 최고 수준의 목조 건축물이 불타버려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한 꽃다발에는 '조상님의 유산을 못 지켜 죄송합니다'라는 검은 리본이 달려 있었다. 원고지를 들고 현장을 찾은 초등학생들이 잿더미로 변한 숭례문 앞에서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글을 쓰는 모습도 보였다.

전문가들은 '국보 1호'가 잿더미로 변하는 전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의 심리적 충격을 우려했다. 울산의대 강릉아산병원 정신과 백상빈 교수는 "미국의 상징물인 세계무역센터가 9·11 테러로 무너지는 모습을 TV로 지켜본 미국 사람들이 심리적 공황에 빠진 것처럼 남대문 붕괴를 눈으로 지켜본 한국 사람들이 엄청난 상실감과 참담함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재난 현장을 직접 눈으로 지켜보는 경우 정신의학적으로 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투사'(投射)현상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불안감과 공포감이 더 증폭된다고 백 교수는 덧붙였다.

건국대병원 정신과 하지현 교수는 "흔히 '남대문이 열렸다'는 말을 해왔듯이 남대문은 이순신 장군 동상과 함께 우리를 지켜주는 상징물이었다"며 "남대문을 잃은 상실감과 불안감은 우리 가슴에 오랫동안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신영철 교수는 차분한 대응을 주문했다. 그는 "집단적인 분노가 자칫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으로 발전할 수 있다"며 "허탈한 심정을 누르고 꼼꼼히 사후 대책을 논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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