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육참총장이 충돌할 때 …

조선일보
  • 이한우 기자
    입력 2007.12.07 22:23

    歷史는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나
    아메리칸 시저(1·2)
    윌리엄 맨체스터 지음|박광호 옮김|미래사|1286쪽|각권 3만원

    1964년 4월5일 미국 워싱턴 소재 월터리드 병원에서 84세의 노인이 급성 신부전 및 간기능정지로 숨쉬기를 멈췄다.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그러나 생전에 극명하게 갈렸던 그에 관한 양극단의 평가는 그의 죽음으로 수렴되기는커녕 계속해서 평행선을 달리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0세기 최고의 영웅이라는 극찬과 위선으로 가득 찬 허황된 야심가라는 혹평이 그것이다.

    맥아더를 옹호하는 편에 속하는 저자도 맥아더를 “위대하지만 역설적인 인간”이라고 규정한다. “고상하면서 비열하고, 영감이 가득하나 황당하고, 오만하면서 수줍어하며, 가장 좋은 인간인 동시에 가장 나쁜 인간이며, 매우 다재다능하고 매우 우스꽝스러우며 매우 숭고한 인물이다.”

    그래서 ‘맥아더 읽기’는 미국인에게 커다란 난제다. 평범과 비범같은 인간적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전쟁과 정치, 군인과 정치인의 적절한 경계를 어떻게 설정한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장면이 트루먼 대통령과 웨이크섬에서 회담을 가졌을 때다. 1950년 10월15일 6·25 전쟁 수행방식과 관련해 심각한 이견이 발생하자 두 사람은 만났다.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군통수권자인 트루먼에게 경례를 올리지 않고 악수를 나눴다. 맥아더 숭배자들은 열광했지만 반대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양식 있는 시민들도 경악하기에 충분했다. 맥아더에게서 ‘대통령을 넘어서려는 의지’를 봤기 때문이었다.

    그 해 겨울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내려오자 만주지역 중공군 기지에 대한 폭격을 주장하는 맥아더에 대해 트루먼은 이듬해 4월11일 현직에서 해임하고 귀국을 명했다. 그리고 4월19일 맥아더는 상하 양원합동회의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는 유명한 고별연설을 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과 존 F. 케네디는 맥아더를 좋아했고 트루먼과 아이젠하워는 좋아하지 않았다.

    멋진 장군모와 선글래스 그리고 옥수수대 파이프로 상징되는‘20세기 최고의 군인’맥아더장군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아남아 있다.
    ‘맥아더 읽기’는 실은 우리 한국인에게는 더 복잡한 난제를 던진다. 대부분 인천상륙작전의 영웅으로만 그를 기억하지만 실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탄생에도 맥아더의 흔적은 깊이 새겨져 있다. 2005년 친북 좌파 단체들이 맥아더를 ‘제국주의의 상징’, ‘침략자’로 규정하며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그의 동상을 철거하려 했던 움직임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2004년 10월에는 맥아더를 부정적 시각에서 비판한 애리조나 주립대 마이클 샬러 교수의 평전 ‘더글러스 맥아더’(이매진)가 국내에 번역되기도 했는데, ‘맥아더 좋게 읽기’와 ‘맥아더 나쁘게 읽기’가 고스란히 국내의 우파와 좌파의 충돌과 겹치게 되는 것은 결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하지 중장)의 지원이 아니라 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 지원으로 대한민국 건국에 성공하게 된 것과 무관치 않다. 해방 직후 미군정을 이끈 하지 중장이 여운형 김규식의 좌우합작노선을 지지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거대한 힘에 이승만이 홀로 맞설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도 바로 ‘맥아더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의 전역(戰役)은 아시아뿐만 아니라 멕시코 유럽 등 세계 곳곳에서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그는 미국 역사상 최다 수훈기록인 22개의 훈장을 받았다. 그 중 13개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적 행위의 결과였다.

    이번에 출간된 책의 제1권은 영국 글래스고우에서 이민 온 명문가 출신의 맥아더가 군인이 되고 전쟁영웅이 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추적하고 있다. 위대한 장군이었던 아버지 아서 맥아더의 절대적 영향하에서 더글러스는 일찍부터 군인의 길을 동경했다. 1880년 클린턴 대통령의 고향이 아칸소주 리틀록 병영에서 태어난 맥아더는 스무 살에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고 1903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샬러의 ‘더글러스 맥아더’는 맥아더의 쾌속승진이 거의 전적으로 군문(軍門)에 있던 아버지 친구들의 도움 때문이었다고 설명하지만 맥아더는 머리도 좋은 천부적 군인이었다.

    1914년 처음으로 멕시코 전선에서 전투를 치렀고 3년 후에는 제42보병사단의 참모장으로 프랑스 전선에 배치돼 참혹의 극치였다는 참호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18년 준장으로 승진한 맥아더는 1919년 5월 전쟁영웅으로 귀국해 다음날 미 육군사관학교장으로 취임한다.

    1922년 맥아더는 필리핀 주둔군 마닐라 지역사령관으로 보임된다. 아버지가 평생 공을 들인 곳이 바로 필리핀이었다. 이후 그는 승진을 거듭하며 필리핀과 본토를 오갔고 1930년 대장으로 승진해 미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한다. 1937년 전역한 그를 다시 군에 불러 들인 것은 2차대전의 발발이었다. 1941년 7월26일 미 육군소장으로 복귀한 맥아더는 다음날 중장, 12월에 대장으로 승진해 태평양전쟁을 진두 지휘했다. 여기까지가 1권이다.

    1944년 조지 마셜에 이어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5성 장군에 오른 그는 1945년 원폭투하와 함께 9월 미주리 함상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다. 이후 일본 군정장관을 겸한 그는 평화헌법안 작성, 천왕의 신격 박탈, 신도의 국교 폐지 등 개혁조치를 강력하게 추진했고 더불어 한국의 이승만을 측면 지원해 대한민국 건국을 이끌어냈다.

    유감스럽게도, 그러나 당연하게도 저자 맨체스터는 1945년부터 1948년간 맥아더 활동의 초점을 일본에 맞추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기독교 정신을 바탕을 두고 이승만과 맥아더가 1945년 이전에 미국에서부터 맺었던 ‘우정(友情)’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이 없다.

    한국과 맥아더의 관계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제9장에서 나온다. 도쿄에서 6·25발발 소식을 접한 맥아더는 목요일인 6월29일 비무장 프로펠러기를 타고 수원으로 날아온다. 전황을 직접 확인하고 향후 작전방향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 때 그는 시계(視界)가 불량함에도 불구하고 선글라스를 쓰고 입에는 옥수수대 파이프를 물고 있었다. 전쟁 발발 소식이 71세 노인의 의욕을 다시 불타게 했는지 모른다. 이후 저자는 전쟁보다는 전쟁을 둘러싼 맥아더와 트루먼의 논쟁에 지면을 대거 할애한다. 미국인의 ‘맥아더 읽기’로 돌아온 것이다.

    대통령과 장군, 정치와 군사의 갈등은 링컨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링컨은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과 비슷한 갈등을 빚었다. 이후 윈필드 스코트, 조지 맥클렐런, 아서 맥아더, 빌리 미첼 등도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놓고 대통령과 충돌했다. 그러나 결국은 대통령들이 이겼다. 맥아더가 트루먼에게 패한 것은 따라서 미국적 전통이 지켜진 결과로 볼 수 있다. 원제 ‘American Caesar: Douglas MacArthur 1880-1964’



    윌리엄 맨체스터 (William Manchester·1922~2004)

    제2차 세계대전 때 미 해병대에 입대해 오키나와 전투에 참가했다가 중상을 입고 전역했다. 이후 매사추세츠대와 미주리대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3년 전 타계할 때까지 18권의 저작을 남겼다. ‘아메리칸 시저’ 외에도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평전 ‘마지막 사자’와 태평양전쟁 회고록인 ‘암흑이여 안녕’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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