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에서 청와대 법무비서관을 지낸 이용철(47) 변호사가 청와대 재직 시절인 2004년 1월 삼성전자 법무팀 이경훈(45) 변호사로부터 택배로 보내온 현금 500만원을 되돌려 준 일이 있다고 폭로했다.
참여연대와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 60여 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삼성 이건희 불법규명 국민운동(이하 국민운동)’은 19일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강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이 변호사의 제보 문건과 1만원권 돈다발 사진 등 증거물을 공개했다. 이경훈 변호사는 이용철 전 비서관에게 돈다발을 보낸 지 5개월 후쯤인 2004년 6월 삼성전자를 그만두고 현재 미국 듀크대에서 법학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국민운동측은 “(이 전 비서관의 폭로 내용은) 김용철 변호사가 이미 양심고백을 통해 밝힌 사실이 단지 한 사람의 주장이 아닌 ‘사실’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뚜렷한 증거의 하나이며, 삼성의 뇌물제공이 단지 검찰만이 아닌 권력의 중심부까지 이르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라고 밝혔다. 이날 기자회견장에 이 전 비서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전 비서관의 폭로내용
이 전 비서관은 이 변호사 명의로 돈을 전달받아 돌려준 경위를 상세히 적은 A4 용지 2장 반 분량의 진술내용을 공개했다. 이 전 비서관은 2003년 12월 말 또는 2004년 1월 초쯤 이 변호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함께 점심식사를 했으며, 이 자리에서 이 변호사가 “명절에 회사에서 내 명의로 선물을 보내도 괜찮겠느냐”고 물어 한과(漢菓)나 민속주 따위의 의례적인 선물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괜찮다”고 대답했다고 진술내용에서 밝혔다.
당시는 청와대 민정2비서관으로 일하던 이 전 비서관이 2003년 12월 박범계 변호사가 사임해 공석이 된 법무비서관직과 민정2비서관직을 통합한 보직(법무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 직후였다. 이 전 비서관은 1996년 서울 도봉구 삼성아파트 주민들이 삼성물산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을 때 주민측 변호사로 일하면서 당시 삼성측 변호사였던 이경훈 변호사와 알게 됐다.
이 전 비서관의 진술내용에 따르면 2004년 1월 이 전 비서관이 휴직 중인 ‘법무법인 새길’ 사무실로 현금 500만원이 담긴 쇼핑백이 배달됐으며, 쇼핑백에는 이경훈 변호사의 명함이 붙어 있었다. 이 전 비서관은 이 쇼핑백을 설 연휴(1월 21~23일)가 끝나고 집으로 갖다 달라고 부탁했으며, 1월 26일 집으로 온 선물을 뜯어보고서야 (선물이) 책으로 위장된 현금 다발인 것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당시는 검찰에서 대선자금 수사가 진행 중이었고, 삼성이 이른바 ‘차떼기’ 사건으로 비자금 파문에 휘말려 있던 때였다.
이 전 비서관은 진술내용에서 “‘차떼기’ 당사자 중 하나인 삼성이 그것도 청와대에서 반부패제도개혁을 담당하는 비서관에게 버젓이 뇌물을 주려는 행태에 분노가 치밀어 함께 선물을 뜯어본 집사람에게 ‘삼성이 간이 부은 모양’이라고 말하고 이 사실을 폭로할까 고민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 전 비서관은 “뇌물꼬리를 밝혀봐야 중간전달자인 이 변호사만 쳐내버리는 꼬리 자르기로 끝날 것이 자명할 것으로 판단되어 후일을 대비하여 증거로 사진을 찍어두고 전달명의자인 이 변호사에게 되돌려주고 끝내기로 작정했다”고 밝혔다. 그는 현금 다발을 확인한 지 며칠 후인 1월 말쯤 이 변호사와 서울 프라자호텔 일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500만원을 돌려줬다고 밝혔다. 그 자리에서 이 변호사는 “현금을 선물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며 여러 차례 사과했다는 것이다.
◆왜 폭로했나
이러한 사실을 폭로한 이유에 대해 이 전 비서관은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를 보며 당시의 일이 매우 조직적으로 자행된 일이며 내 경우에 비추어 김 변호사의 폭로내용이 매우 신빙성이 있는 것이라고 판단되어 (국민운동측에 자료를) 제출하게 됐다"고 밝혔다. 전북 순창 출신인 이 전 비서관은 사법고시 31회 출신으로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 캠프에 합류했다. 그는 2003년 9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뒤 2005년 1월 국무총리실 산하 국방획득제도개선단장을 맡아 방위사업청 출범을 이끌었다. 지난해 1월 방위사업청 차장에 임명됐으나 그 해 10월 사표를 낸 뒤 현재 예금보험공사 사외이사이자 법무법인 새길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삼성 “회사에서 지시한 적 없어”
이 전 비서관의 폭로에 대해 삼성전자는 “법무, 인사 등 사내 관련부서에 확인한 결과 회사에서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현재 (미국에 유학 중인) 이 전 상무에게 연락을 시도하고 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아 그에게 직접 사실관계를 확인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