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우완투수로 평가받는 이나오 가즈히사(稻尾和久) 씨가 지난 13일 오전 1시 후코오카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향년 70세.
한국계로 알려졌고 한국에 와 우리 선수를 지도하기도 했던 이나오 씨는 지난 10월 30일 뇌에 악성 종양이 생겨 입원했습니다. 당초 의료진은 1주일 정도 치료하면 퇴원할 수 있다고 진단했으나 갑작스레 증상이 악화돼 세상을 떠났습니다.
빙그레 이글스 2대 사령탑을 지낸 김영덕(71) 전 감독은 이나오 씨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나와 일본프로 입단 동기생이었는데…”라면서 안타까와 했습니다. 이나오씨는 1956년 니시데쓰(西鐵) 라이온스에 입단했고 김영덕 감독은 같은 해 난카이(南海) 호크스에 입단했습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을 이끌고 방한한 한재우 감독도 같은 해 니시데쓰에 입단했습니다.
김영덕 감독은 “프로 입단 후 나는 별 볼 일 없는 투수였으나 이나오는 첫 해 신인왕(21승5패)을 수상하는 등 격이 다른 투수로 성공했다”고 회상합니다. 김 감독은 난카이에서 7승을 올리고 1964년 3월에 조국으로 와 해운공사-한일은행을 거치며 퍼펙트게임을 기록하는 등 한국 최고의 우완 언더핸드 투수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이나오는 프로 2년 때 일본 최고 연승 기록인 20연승을 올리며 35승을 올렸고 이후 6시즌 내내 20승 이상을 기록했으며 특히 1961년에는 경이적인 42승을 올렸습니다. 김영덕 감독은 “그 당시는 요즘과 달리 투수들이 자주 출장했고 완투를 하던 시기였지만 이나오는 더 많은 경기에 나와 거의 하루 걸러 등판했다”고 회상했습니다.
또 김 감독은 “나보다 2년 늦게 난카이에 입단했지만 나가시마와 함께 릿쿄대학을 거친 2년 선배 스기우라 다다시는 보기 드문 서브머린 투수였는데 입단 2년째인 1959년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를 상대로 1~4차전에 모두 등판해 3경기는 완투하고 1경기는 구원으로 나서 혼자 4승을 따내는 괴력을 선보였다. 그리고 한시즌 38승4패를 기록하기도 하는 등 이나오와 비슷하게 많은 투구를 했다. 이후부터 일본에서도 잦은 등판과 완투를 자제하는 분위기가 생겼다”고 예전의 고지식하고 무시무시한(?) 야구 풍토를 들려 주었습니다.
스기우라가 1959년 일본시리즈 1~4차전에서 4승을 독식한 데 비해 이나오는 신인이던 1956년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를 상대로 6차전 전경기에 출장해 1 완투승 등 3승을 올려 요미우리와 앙숙이던 미하라 니시데쓰 감독에게 첫 우승을 선사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일본시리즈에서도 요미우리를 상대로 2완투승을 거두어 최우수투수상을 수상했고 1958년 다시 요미우리와 일본시리즈에서 대결해 팀이 3연패 후 4차전 완투승, 5차전 구원승, 6~7차전은 연속 완투승을 올리는 괴력을 과시하며 최강 요미우리를 3년 연속 물리치고 니시데쓰 황금시대를 열었습니다. 특히 5차전에서는 연장 10회말에 끝내기 홈런까지 터뜨려 타격도 대단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남자 팬이 시멘트 바닥에 꿇어 앉아 합장을 하고 "하느님! 부처님! 이나오님!"이라며 울부짖어 이 감동적 절규가 이나오의 대명사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나오는 개인통산 14년간 276승 137패로 역대 다승 8위에, 평균자책점은 1.98로 역대 4위에 올랐습니다.
OB-삼성을 거쳐 1988년부터 빙그레 이글스 지휘봉을 잡은 김영덕 감독은 “당시 노진호 단장과 일본통인 조해연 기록원이 이나오 씨를 초청해 3년 가량 지도를 받은 적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 당시 빙그레 투수였던 이상군 한희민 지연규 등이 코치를 받았습니다.
당시 이글스의 코치였던 강병철 전 롯데 감독은 “이나오 씨는 ‘규슈의 덴노헤이카(천황)’로 불릴 정도로 규슈, 벳푸, 후쿠오카 등지서 추앙을 받고 있어 빙그레의 전지훈련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밝힙니다.
강병철 감독은 “이나오 씨에 대해서는 한국계라는 말이 떠돌았는데 본인이 이를 정식으로 밝히지는 않았으나 골격이나 스타일로 봐 한국계로 누구나 알고 있었다”면서 “그분은 건강 체질이었고 약간 비만했으며 고기를 잘 먹는 포식가였다”고 회상합니다.
필자는 1980년대 말 대전구장에서 이나오씨를 잠깐 만난 적 있습니다. 생긴 모습이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1-0으로 물리친 북한 축구 영웅 박두익 씨와 비슷해 깜짝 놀랐습니다. 몸매가 굵고 둥글둥글한 인상의 중견 배우 백일섭 씨를 연상하면 됩니다. 한국에 자주 온 이나오 씨는 자신의 심복이었던 모토이, 시마바라 등 코치들을 한국에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홍윤표 OSEN 대기자는 지난 10월 12일 칼럼 ‘존경받는 야구인을 보고 싶다’에서 이나오 씨의 타계 직전 근황을 전했습니다.
‘지난 10월 2일 일본 오이타현 벳푸시에서 철완 이나오 가즈히사(70)의 '이나오 기념관'이 개관됐다. 새로 건립한 벳푸시민구장에 들어선 그 기념관에는 니시데쓰의 황금시대 에이스인 이나오 씨의 족적이 담긴 각종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그의 투구폼을 본 뜬 모형 동상도 세워졌다.
그는 "이 폼을 어린이들이 보고 흉내낸다면 좋겠네" 라며 농담 섞인 소감을 밝혔다. 벳푸는 이나오 씨의 고향. 벳푸시는 "이나오기념관과 벳푸시민구장을 통해 벳푸나 오이타의 어린이들의 야구를 지원할 것" 이라며 벳푸를 야구진흥의 거점으로 삼을 방침을 천명했다.
이나오 씨는 1950년대 후반부터 세이부 라이온즈 전신인 니시데쓰 라이온스에서 활약하면서 일본 프로야구 사상 재팬시리즈 최다인 개인통산 9완투 및 11승 기록을 지니고 있다. 승률왕 2회, 평균자책점 1위 5회(1956~1958, 1961, 1966년), 다승왕 4회(1957, 58, 1961, 1963년) 등의 업적을 남겼고 1961년에는 경이적인 한 시즌 최다 기록인 42승을 올리기도 했고 8년 연속 20승, 30승 이상 4차례, 20연승 등 그가 세운 숱한 기록은 일일이 손에 꼽기도 어렵다. 일본 프로야구 기록의 전설이라고 해도 그리 지나치지 않다.
1993년에 그는 야구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바다 건너 일본이지만 신화적인 제구력으로 전설의 대기록을 남긴 이나오 씨의 별세는 우리 야구인들에게도 안타까움과 추억을 다시 한 번 새길 기회를 갖게 만듭니다.
이나오 씨의 급사를 1면 톱으로 11월 13일치 일본
<2007 삼성 PAVV 프로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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