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사랑]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一死覺悟)

조선일보
  • 이덕일 역사평론가
    입력 2007.11.08 22:52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결성된 조선청년회연합회 창립총회의 임원 명단에는 윤자영(尹滋瑛)·이영(李英) 같은 사회주의자, 안확(安廓)·장덕수(張德秀)·장도빈(張道斌) 같은 민족주의자와 함께 경남 창원 웅천청년운동단의 대표로 주기철(朱基徹)도 올라 있다.

    주기철이 웅천에서 1500리 떨어진 평북 오산중학교로 진학해 교장 조만식을 만난 것을 아들 주광조는 ‘나의 아버지 순교자 주기철 목사’에서 ‘하나님의 섭리’라고 썼다. 주기철은 1935년 5월 금강산 온정리 수양관에서 250여 명의 목회자들 앞에서 ‘중단된 설교’로 더 유명한 ‘예언자의 권위’라는 설교를 한다.

    “지금 목사들은 선지자 예레미야와 달리 왜 이 사악한 시대에 맞서 싸우지 않는가”라고 절규하다 경찰에 강제로 끌려 내려졌다. 은사 조만식의 요청으로 1936년 평양 산정현 교회 담임목사로 간 주기철은 1938년 전국 27개 노회 대표가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의식”이라며 찬성 결의를 할 때 예비 검속되어 갇혀 있었다. 주기철은 1940년 2월 산정현 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원’이란 유언설교를 한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해 달라, 오랜 고난을 견디게 해 달라”면서 노모와 처자를 부탁한 주기철은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의지를 밝힌다. 일사각오는 일제의 살인적 탄압에 몸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한 종교인의 신앙고백이었다. 이 설교 후 다시 검거되어 황실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0년 형을 언도 받고 복역 중 1944년 4월 옥사했다.

    주기철 목사를 비롯해 최봉석(崔鳳奭)·최상림(崔尙林)·박관준(朴寬俊) 등 50여 명이 순교하는데 이는 한 개개인의 신앙을 넘어 십자가의 고난을 민족의 고난에 일치시킨 것이었다. 해방 당시 50만 명이 채 안 되던 개신교의 급속한 성장은 이런 순교자의 희생 덕분이다.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주기철 목사가 선정됐다. 일부의 교회세습과 성장제일주의 같은 비기독교적 행보로 비난 받는 한국개신교가 눈물로 비춰보아야 할 반성의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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