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 코드는 잘 안봐요. 벤치마킹도 잘 안해요. 사용자들이 요청하는 것들이 (유일한) 답입니다.”
5일 오후 3시 NHN(네이버) 분당 본사에서 만난 고영수 NHN 기술연구센터 OCTF 과장의 대답은 의외였다.
유명한 제로보드 개발자라면 경쟁사 제품이나 해외 유명 모델을 바탕으로 벤치마크 하지 않을까? 이 대답 역시 의외였다.
"다른 사람들의 웹 프로그래밍 코드를 참조하는 것 보다는 새로 만드는 방식을 고민합니다. 사용자들의 요구사항만 반영해도 좋은 소프트웨어가 됩니다. 다른 서비스와 비교요? 벤치마크 하기도 귀찮을 뿐만 아니라, 요청받는 서비스를 구현하는 것만으로도 힘듭니다. 우선순위를 두고 적용하다가 보면 (자연스럽게) 좋아지는 것 같아요. 제로보드를 처음 만들 때는 체계 없이 시작했는데, 그 때부터 사용자들의 반응(피드백)을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웹 애플리케이션 개발의 정석을 말하고 있었다. 억지로 우수 서비스의 장점을 꿰어 맞추려는 것 보다는 이 서비스들을 사용하는 사용자들의 의견을 가장 먼저 생각하겠다는 생각이다. "기본 기능은 적을수록 좋고, 확장 기능은 많을수록 좋다"는 지적도 인상적이었다.
고영수 과장은 현재의 한국 웹 생태계를 이뤄 낸 ‘제로보드’ 게시판 툴을 개발한 사람이다. 온라인에서는 '제로(zero)'라는 아이디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제로보드는 ‘한국 웹의 산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웹 게시판 문화를 이끌어온 설치형 인터넷 게시판이다. 2001년 초 네 번째 버전이 등장하면서 지금까지 많은 네티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2002년 6월 4.1 패치 레벨(pl) 2까지 기능 개선 및 보안 패치를 공개한 뒤 4.1 pl3부터 pl8까지 줄곧 보안 패치에만 집중하면서 기능 개선이 이뤄지지 않아 궁금증을 불러 일으켜왔다. 지난 해 5월 마침내 5년 만에 ‘zb5’ 개발을 선언했으며, 현재는 ‘제로보드XE’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터넷 문서 30%가 제로보드”…압도적 영향력
고영수 과장은 “일부에서는 인터넷 문서의 70%가 제로보드 기반이라는 조사가 있는데 신빙성은 없는 것 같다”며 “다만 네이버에서 수집한 외부 웹문서 통계 결과, 약 30%가 제로보드 기반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한 웹 응용프로그램이 거대한 웹의 30%를 차지한다는 것은 유래가 없는 일이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주요 인터넷 커뮤니티나 홈페이지에는 거의 대부분 제로보드 게시판을 사용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영수씨는 최근 네이버에서 근무하고 있는 두 명의 전일(풀타임) 오픈소스 개발자라는 타이틀이 더 붙게 됐다. 즉 다른 업무 없이 오직 '오픈소스' 개발에만 몰두할 수 기회가 마련된 것이다. 특히 그가 올 8월 네이버와 정식 계약을 통해 제로보드 개발 지원을 받기로 했을 때만해도 전례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세간의 화제가 됐었다.
네이버는 고영수 과장 이외에도 또 한분의 풀타임 오픈소스 개발자가 있다. 그는 아파치 루신 검색기술을 이용, 구글 GFS나 맵리듀스(MapReduce) 기능을 초대형 플랫폼에서 오픈소스로 구현하는 프로젝트인 '하두프(Hadoop, http://lucene.apache.org/hadoop) ' 전문가다. 네이버와 같은 거대한 시스템을 운영해야 할 상황이라면 매우 관심을 가져야 할 기술 중 하나다.
그는 “네이버에서 장기적으로 풀타임 오픈소스 개발자를 확대할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네이버 오픈API 역시 본격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고영수 과장은 과거 신생 검색벤처 ‘첫눈’에서 재택근무를 하며 일해 왔다. 그 이후 지난해 첫눈에 NHN에 인수되면서 통합서비스개발팀에서 일본 검색을 개발했다. 그 동안에 게시판형 ‘제로보드 4’를 홈페이지 빌더로 업그레이드 한 ‘zb5 시험판’ 등을 발표했으나 시행착오를 겪었다. 우여곡절을 겪는 과정에서 NHN은 제로보드를 통해 오픈소스 진영을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하게 된다.
"누가 보더라도 네이버로서는 당장 이익이 될 수 없는 것이죠. 그렇다고 네이버 사내에서 이걸 쓰는 것도 아닙니다. 높은 분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오픈소스를 '지원'하기 위한 의지라고 봅니다. 대신 브랜드나 도메인 정도는 별도의 이탈을 막기 위해 '인수'라는 형태로 진행한 것입니다."
당시 NHN이 계약서에 내 걸었던 조건도 파격적이다. ▲제로보드의 모든 결정과 진행은 PM인 고영수 과장에게 일임, ▲제로보드의 모든 코드는 오픈소스이고 GPL 라이선스 유지, ▲NHN에 종속적이거나 제한적인 기능을 구현하지 않고 오픈 API를 통한 연계만 가능, ▲제로보드를 개발할 때 디자인, 번역 등의 NHN 보유 인력이나 장비를 적극 지원, ▲다른 업무를 하지 않고 전일 오픈소스 개발자로 근무 등 한 사원과 회사와의 계약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다.
◆나 홀로 개발…“제로보드XE, 올해 말까지 안정화 할 것”
“웹 생태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제로보드 사용자가 많아지고, 웹 생태계가 풍성해지길 원하는 건 검색회사인 NHN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로보드를 키웠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기술연구센터 내부에 ‘OCTF(오픈 콜레보레이션 태스크포스)’라는 팀이 생겼습니다. 인력, 개발, 디자이너 등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기로 약속 받았습니다. 1차적으로 이득이 되는 건 없을 테지만, 제로보드 브랜드와 닷컴은 회사 소유로 하자는 데는 동의했습니다. 제로보드 공동 결과물을 손에 쥐고 소유권 주장을 하고 싶진 않습니다.”
지난 5월 검색 팀에서 OCTF로 자리를 옮긴 후 NHN의 지원을 받아 '제로보드XE(Zeroboard eXtra Edition, http://www.zeroboard.com)'로 공개 시험판 서비스가 진행됐다. 현재 고영수 과장이 혼자 개발을 전담하고 있으며, 초기에는 네이버 디자인팀이나 개발팀의 도움을 받아 서비스를 다듬었다.
제로보드 4 버전에는 정식등록이라는 메뉴가 있다. 그러나 제로보드 XE는 GPL이기 때문에 누구나 코드를 가져다 쓸 수 있다. 제로보드 4가 출시될 당시만 해도 소프트웨어는 모두 ‘카피라이트’ 개념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제로보드 4는 이를 유지하고 있지만, XE 버전은 GPL로 자유롭게 고쳐 쓸 수 있도록 했다.
"심지어 제가 빠져도 커뮤니티가 돌아갈 수 있는 외부 참여 오픈 프로젝트를 만들고 싶습니다. 0.2.4 버전을 내 놓은 현재 안정화 단계로 접어들고 있고, 올해 말까지 어느 정도 안정화를 한 뒤 사내 전문가 도움을 받아 좀 더 다양하게 발전시킬 계획입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커 나가는 커뮤니티를 지향하고 있었다. NHN이라는 브랜드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강조했다. NHN 내부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디자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개발자들의 힘을 합할 수 있는 터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또한 ‘줌라(Joomla)’ 등 해외 콘텐츠 관리 시스템(CMS)처럼 오픈 프로젝트를 통해 정당한 개발 대가를 돌려받는 ‘상업적 행위’도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현재 제로보드XE는 '개발자 홈페이지(http://spring.zeroboard.com) '를 통해 다양한 개발자들이 소스 코드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특히 번역 프로젝트의 경우 특별한 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 스페인어'를 지원한다. 그는 "다국어 기능을 제공하면서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오픈 프로젝트의 위대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업계 공동 대처할 수 있는 스팸 센터 만들자” 제안
현재 공개시험판 3개월여 만에 약 1만2000곳 이상서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제로보드 XE의 향후 개발 진행 상황이 궁금했다. 이에 대해 그는 “사용자들의 참여에 달려 있다”고 했다. 제로보드 4의 경우 워낙 사용자들이 참여가 많아 정작 개발자인 자신도 제로보드의 응용 기능을 다 사용해보지 못한 정도였다. 그것이 제로보드를 지금까지 이어지게 한 원동력인 셈이다.
고영수 과장이 생각하는 제로보드XE도 이같은 모습이다. 기능을 모두 구현해 내 놓는 것 보다는 응용 기능을 안정적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몸집을 줄이고 구조적인 기능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특히 보안이나 스팸 문제는 그가 집중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다.
"제로보드XE에는 아직 댓글 스팸이나 트랙백 스팸 방어 기능이 없다"고 묻자 그는 "계속 고민 중이지만, 원천적으로 막는 것은 사실상 힘들다고 본다"며 "결국 난수 발생 등을 통해 사용자들을 불편하게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스팸 대응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제로보드만의 스팸 센터는 의미가 없고, (이종 플랫폼 간에) 서로 호환될 수 있는 공통 스팸센터가 마련됐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이 밖에도 그는 “사이트 간에 또는 제로보드와 다른 프로그램 간의 콘텐츠 교류를 가능하도록 전환(마이그레이션)하거나 호환 플랫폼 개발에도 집중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제로보드4, 이젠 워낙 변종이 많아 감당할 수 없을 정도”
지난달 말 국내 주요 커뮤니티를 떠들썩하게 했던 크래킹 사건에 대한 질문이 계속됐다. 제로보드 4를 사용하는 커뮤니티가 워낙 많다 보니 버그가 발견되면 동시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번 크래킹 사건 때문에 일부 커뮤니티에서 바이러스 피해를 입어 긴급 복구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최근 제로보드4가 원격실행 취약 버그 때문에 중국발 크래킹 피해를 입어 긴급히 패치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발견 즉시 최신 업데이트를 내 놓고 있지만, 제로보드 4는 php 코드를 직접 고쳐 쓰는 분들이 많아 보안취약점 관리는 제 손을 떠난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한 유명한 개발자가 만든 제로보드 스킨을 보니 완전히 다른 프로그램 수준이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보안 패치를 내 놓더라도 적용이 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그는 “웹 에이전시 등을 통해 제로보드 기반 홈페이지가 많이 만들어 졌다”며 “이런 곳에서는 향후 관리가 안 된 채 방치되고 있다”며 “제로보드XE에서는 이러한 문제 때문에 보안 기능을 특별히 더 신경 썼다”고 덧붙였다.
제로보드XE의 근황을 듣기 위해 만난 그는 ‘웹 프로그램 개발의 정석’을 아는 전문가였다.